우리가 보낸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마을-무다리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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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여지도 시리즈

우리가 보낸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마을-무다리 마을

by 토마토쥔장 2021.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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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낸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마을-무다리 마을

[월간토마토 3월호 대전여지도 中] Part 3.

 

 

물이 많이 흐르는 다리 ‘무다리’

글·사진 이용원

 

 구마니에서 원산모랭이를 지나 좁다란 길을 따라가면 무다리 마을이다. 마을 이름은 ‘다리 이름’에서 유래했다. 마을 동쪽으로 내가 흘렀고 그곳에 다리를 놓았다. 그 다리 아래로 늘 물이 많이 흘러 무다리라 불렀단다. 이 유래가 사실이라면, ‘물다리’를 부르기 편하게 ‘무다리’로 부른 것이 아닌가 싶다.

 

 다양한 공장과 창고 건물 등이 빼곡한 산업단지 바로 곁에 주택 일부가 남았다. 이곳에서 마을 이름을 상호로 사용한 가게를 발견했다. 이마저 없었다면 무다리는 그냥 지나쳤을지도 모른다. ‘무다리 휴게실’과 ‘무다리 & 식당’이다. 담배 등을 팔았던 것으로 보이는 ‘무다리 휴게실’은 더는 영업을 안 하는 듯하다. 식당은 성업 중이었다. 근무복을 입은 공간 근무자들이 줄을 지어 들어갔다. 그곳 무다리 휴게실 바로 옆에 대화로 132번길과 만나는 지점에 다리가 있었다는 주민 이야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무다리 마을 안에 문 닫은 경북상회

 식당 옆으로 골목이 이어진다. 역시 문을 닫은 경북상회 간판이 보이는 곳이다. 그 골목을 들어서면 공장이나 창고가 아닌 무다리 마을 주택을 만날 수 있다. 일반 주택지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주변 공장이나 창고 건물 때문인지 압박감이 느껴지면서 뿌리 깊은 안정감보다는 불안하게 뜬 느낌을 준다. 경북상회를 지나면서 감나무 주변을 돋궈 콘크리트로 둘레를 마감한 감나무에 눈길을 빼앗긴다. 대문이 없는 출입구 부분은 자연스럽게 마당으로 이어지고 마당 가운데는 예쁜 석류나무가 자랐다. 정갈하게 관리한 집이 인상적이었다. 박은숙 통장 집이었다.

박은숙 통장네 예쁜 석류나무

 고향이 충북 보은인 박 통장은 1975년 결혼해 이곳에 정착했다. 당시는 1산업단지는 준공한 상태였지만 무다리 마을 근처는 전부 논밭이었다. 2공단이 들어온 곳은 대부분 산이었다. 마을에서는 각종 채소 농사와 벼농사를 주로 지었다. 작년까지는 배추 농사도 많이 지었다.

 

“처음 시집왔을 때는 무다리에 한 30호 살았던 거 같은데요. 지금은 열 가구도 안 되죠. 대부분 농사를 지었고요. 무다리 밑에는 물이 제법 흘렀어요. 비라도 내리면 다리 아래서 고기도 잡아다가 매운탕도 끓이고 회로도 먹었어요. 평소에는 그곳에서 빨래도 하고요.”

 

 마을 이름을 다리 이름에서 따올 정도로 다리와 그 밑을 흐르는 냇물은 주민 삶에 중요한 공간이었던 모양이다. 무다리 주민 삶이 본격적으로 변한 건, 역시 대전제2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다. 농토가 대폭 줄면서 주민은 세를 놓기 시작했다. 박은숙 통장도 마찬가지다. 많을 때는 한울타리 안에 여섯 가구가 살았다. 마당을 사이에 두고 세를 놓을 방을 들였다. 당시 무다리에서 한 가구만 사는 집은 없었다.

 

“처음 시집왔을 때는 버스 타고 대화동 대전병원 앞에서 내리면 마을까지 걸어왔어야 해요. 많이 힘들었지요. 택시도 안 들어오려고 했거든요. 무서운 곳이라고 그러더라고요. 저도 친정 갔다가 밤늦을 때 와서 택시를 타려고 하니까 안 가겠다는 거예요. 할 수 없이 버스 타고 대전병원 앞에 내려서 슈퍼에 가니까, 혼자 가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여기 있다가 그쪽으로 가는 사람들과 같이 가라고요. 그래서 기다렸다가 일행을 만들어서 걸어오는 데 한 30분 걸렸던 거 같아요. 그다음부터는 절대로 늦게 안 다녔죠.”

 

 박 통장이 말하는 대전병원 앞 버스가 다니는 도로는 17호 국도에 속하는 대전로다. 오정동 네거리에서 이어지는 도로다. 대전병원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지금 대화약국 옆 골목이 대화동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다. 새로 부여한 도로명으로는 동심1길이다. 2산업단지를 조성하기 전에는 산골짜기였다. 이 산골짜기를 넘어 유등천 쪽으로 향해야 마을과 들녘이 이어졌다. 지금은 아파트를 비롯한 다세대 주택과 단독 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찼지만 그것도 산업단지 조성 이후 본격적으로 일어난 일이다. 앞서 구마니에서 만난 김덕근 씨는 지금처럼 주거지역이 들어서기 전에는 대화초등학교 근처에 규모가 제법 큰 공동묘지가 있었다고 얘기했다. 나머지 산골짜기 골짜기에는 1960년대 전후로 가진 것 없는 사람을 강제 이주시켰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한국전쟁 직후 그 어렵던 시절에 폐지를 주워 삶을 꾸리던 넝마주이나 구두닦이를 이곳으로 보냈다. 택시가 안 들어오려고 했던 이유도, 구마니나 무다리 등에 사는 주민이 밤이 어두워지면 혼자 마을에 들어가기 두려워했던 이유도 모두 이 때문이었다. 우리 아픈 현대사의 한 단면이다.

 

 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에서 찾은 1961년 10월 18일 자 조선일보에는 ‘백오십 동 신축 계획, 대화리의 난민주택’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조선일보 충남지사에서 송고한 기사다. “17일 대전시당국에서는 지난번 판잣집 철거로 시내에서 대덕군 회덕면 대화리로 이주한 난민들을 돕기 위하여 도비 육천만 환을 들여 제2차 계획으로 대화리에 난민 구호주택 150동을 건립할 계획이다. 동 공사는 엄동 전에 끝낼 예정이다.”

 기사에서 표현한 이들 난민은 대부분 한국전쟁 과정에서 남으로 온 북측 사람인 듯하다. 1963년 3월 11일 경향신문에는 ‘기아선상의 난민촌’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6.25 동란 당시 월남한 가족들이 모여서 살고있는 대전시 교외 대화리 난민들의 구호대책이 시급한 단계에 이르고 있다.”라고 시작한다. 이 기사는 “366가구의 난민 2천여 명이 집결해서 살고 있다.”라고 설명했다.1960년대 신문 기사에서 엿볼 수 있는 암울함이 대화동 동쪽 마을에 계속 이어진 건 아니다.

 

-다음 화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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