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가지 마요
글 사진 김선정
이 여행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람,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다. 사람 사는 세상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을 하고 살지만, 가보고 싶었다. 유럽 배낭여행. 여행한 도시는 런던, 파리, 베를린, 프라하, 로마다.

가지 마요, 외로우니까
유럽여행 첫 도착지인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다. 입국 심사가 까다로워서가 아니다. 봄이 왔는데도 추워서가 아니다(삼월 중순부터 사월 초까지 여행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모든 이유는 외로움에서 시작했다. 26일간 유럽여행을 하는 동안 외로웠고, 외로웠으며, 또 외로웠다. 새로운 세상을 만나보자는 기대감은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나는 여행하는 내내 외로움이 무엇인가를 생각했다. 내가 왜 여기에 와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나 싶어 떨치려고 노력을 해봤으나 쉽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어져만 갔다.
여행지에서 외로움은 알지 못한다는 무지에서 왔고, 낯선 장소, 낯선 이에서 오기도 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봐도 잘 알지 못하니 이게 뭔가 싶어 외로웠다. 이런 와중에 아주 가끔 감동적인 순간을 맞이해도 이 감동을 나눌 이가 곁에 없었다. 나는 외로웠다. 내가 이토록 외로움을 잘 타는 사람이라는 걸 이때 알았다. 집에 가고 싶었다.
나는 왜 뛰고 있는가
나는 낯선 곳을 걷는 게 좋다. 길을 헤매는 것도 좋다. 모든 길은 연결되어 있어 결국에 헤매다 찾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대충 지도로 목적지를 보고 ‘이 정도면 걸어갈 수 있다.’ 싶으면 무조건 걷는다. 이런 무모한 자신감은 가끔 예상치 못한 상황을 불러오곤 한다. 그럴 때는 뛴다.
파리여행 첫날 오전 8시 50분에 나는 어딘지도 모르는 길을 열심히 뛰고 있었다. 모든 도시 여행 첫날은 시내투어를 신청했다. 여행하는 도시를 조금이라도 알고 돌아다니고 싶어 인터넷으로 시내관광을 예약해 두었다. 이날은 오르세미술관과 몽마르뜨 언덕, 에펠탑을 둘러보는 투어였다. 약속 장소는 파리 숙소에서 꽤 떨어진 듯했지만, 30분 정도면 간다는 숙소 주인 말에 걸어서 가기로 했다. 약속 장소로 모이는 시간은 오전 8시 50분, 숙소에서 나온 시간은 7시 50분이었다. 걸어서 가기엔 아주 충분한 시간이었다. 게다가 나는 길도 잘 찾으니 더 일찍 도착할 수도 있었다. 걸음도 빠른 내가 걷기를 주저할 이유는 없었다. 자신만만하게 숙소에서 나온 나는 언제부턴가 약속장소까지 열심히 뛰고 있었다. 부지런히 걸었지만 길을 헤매다 결국 늦었다. 다행히 약속 장소에 모인 투어 일행은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 미안한 마음에 조용히 인사를 하고 여행 주의사항을 들었다.
뜀박질로 맞이한 파리여행은 만만하지 않았다. 나는 파리여행을 하는 동안 대부분 걸어 다녔다.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하철 타는 게 무서워서다. 지하철을 탄 첫 날 나를 빤히 쳐다보던 외국인의 인상이 너무 강했다. 낯선 환경과 낯선 이가 주는 무서움을 파리 지하철에서 느낀 후, 지하철을 타기가 꺼려졌다.
루브르 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니 이미 해가 저물어 있었다. 어두웠지만, 아침에 걸어온 길이기도 했고 그리 늦은 시간도 아니니 걸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숙소까지는 한 시간 거리였다. 루브르 박물관과 오랑쥬박물관을 잇는 길에 튈르리 정원이 있다. 이 주변에 집시가 많아 나처럼 혼자 다니는 여행객은 늘 그들의 소매치기 대상이 된다. 사실 오전에 나는 이 길을 뛰어다녔다. 집시를 피하기 위해 조깅하는 사람처럼 바람막이 점퍼 모자를 뒤집어 쓴 채 뛰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인 세느강을 따라 걷는데 생각보다 길이 어둡다. 가로등이 많지 않았다. 이건 생각지 못했다. 지하철을 탈까 하다가 이미 세느강을 건너왔고 바로 옆에서 에펠탑이 반짝이며 그냥 걸어서가라는 신호를 보내왔다. 나는 무서웠지만 에펠탑 뜻을 받아들여 걷기로 했다. 나는 다시 바람막이 모자를 뒤집어 쓰고 한밤중에 의도치 않은 조깅을 시작했다. 분명히 오전에 걸어온 길이었지만,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은 무서울 뿐이었다. 빛이 있는 곳을 찾아 열심히 뛰다보니 어느새 숙소 근처다.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잘 찾는 나를 대견해하며 다시 자신감을 회복한 나는 숙소에 들어갔다. 의도치 않게 뛴 적이 많았지만, 운동한 샘 치니 그리 불평할 일도 아니었다.
걷고, 뛰고, 먹는 와중에도 외로웠다
파리 시내 투어 약속 시간에 늦어 열심히 뛰는 동안 어느 공원을 지나갔는데 너무 넓어서 그때만 해도 ‘왜 이리 넓나.’하는 불만만 가득했다. 이곳은 뤽상부르 공원이었다. 투어를 마치고 일정 없이 돌아다니는 날 다시 가보았다. 그전에 안 좋은 말을 퍼부은 게 미안할 정도로 멋진 공원이었다. 대전으로 (굳이) 따지자면 서대전공원처럼 많은 시민이 찾는 공원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요가, 체조, 명상, 조깅 등 다양한 운동을 하고 있었다. 공원 가운데에 있는 분수대 근처에는 의자가 많이 놓여 있었다. 사람들은 이곳에 앉아 책을 읽거나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바람막이 점퍼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 쓰고 조깅하는 사람들을 따라 공원을 두 바퀴 정도 달려 보았다. 이대로 뛰어서 한국에 가고 싶었다.

여행한 다섯 도시 중 걷기 좋았던 곳을 뽑자면, 파리와 로마다. 특히 파리는 세느강을 따라 걷다보면 우중충한 날씨와 함께 우울함이 내안으로 깊숙이 밀려 들어온다. 이 느낌이 나쁘지가 않다. 더욱더 나에게 찾아왔으면 하는 기분이 든다. 파리에 예술가들이 많이 이유가 바로 이 세느강이 있어서라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왜인지 알겠다. 정말 기분 좋은 우울함이다. 로마는 골목이 굉장히 복잡하게 이어져 있어 걷는 재미가 다른 곳에 두 세배다. 일부러 지도를 보지 않고 걸어야 한다. 골목마다 볼거리가 다양해 보물찾기 하듯 즐겁다. 특히 젤라또 가게를 찾는 재미가 있다. 지나가다 여기서 한 번 먹고, 또 다른 데서 한 번 먹고 하다보면 세 번은 먹게 된다. 이 맛있는 걸 혼자 먹고 있으니 다시 찾아온다. 외로움.


일인실은 행복하지 않다
여행에서 잠을 잘 자는 건 아주 중요하기에 숙소만큼은 꽤 투자했다. 런던을 빼곤 모두 혼자 쓰는 숙소를 이용했다. 하지만, 일인실이라고 해서 모두 만족할 숙소는 아니었다. 오히려 아침을 푸짐하게 차려준 6인실 런던 민박이 괜찮은 숙소에 속했다. 파리 숙소 침대는 스프링 결이 등으로 그대로 느껴지는 ‘입체 침대’에다, 프라하 숙소는 난방이 제대로 되지 않아 때늦은 3월 추위의 매서움을 맞보며 자야했다. 그래도 다른 숙소는 로마에 비하면 단 한 가지 단점만 갖고 있는 평범한 곳이었다.
로마 숙소는 제발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벽이 아주 얇아 복도를 지나가는 사람들 소리는 물론 옆 방, 앞 방, 모든 소리가 들려왔다. 화장실 변기 물 내리는 소리마저 들려와도 다 이해할 수 있었다. 가격이 싼 데는 이유가 있으니까.
로마는 유럽여행 마지막 도시였는데 이곳에서 보낸 6일 동안 나는 여행 중 가장 조용하고 고독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와이파이... 와이파이가 연결이 되지 않았다. 나는 또다시 한국에 돌아가고 싶었다. 로밍을 하지 않았던 나에게 와이파이는 여행지에서 쌓인 외로움을 풀어주는 세상과의 유일한 소통수단이었다. 호텔 직원에게 말하니 와이파이 쓰고 싶으면 복도에 나와서 사용하라고 한다. “뭐라고요? 복도? 복도요?” 몇 번을 복도라는 말을 반복한 뒤 나는 방안에 들어왔다. 침대에 앉아 알아듣지도 못하는 이탈리아 방송을 멍하니 바라보며 나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리고 스마트폰 없이, 와이파이 없이 살지 못하는 내 자신을 꾸짖었다. ‘나는 언제부터 전자기기에 의존하는 나약한 인간이었는가’ 부터 시작해, ‘왜 로밍을 하지 않았는가, 지금이라도 유심칩을 살 것인가, 왜 이 호텔을 예약했는가, 왜 유럽여행을 왔는가, 나는 뭐하는 인간인가, 왜 나는 외로운가,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 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는 생각을 접었다. 답 없는 고민을 너무 오래 했다는 것을 유럽여행 막바지에서야 알았다. 그리고 TV를 끄고, 와이파이 신호를 찾아 호텔 복도로 나갔다. 신호가 약하다. 다시 방에 들어와 생각이란 걸 했다. 빌어먹을 호텔이 다시 나에게 외로움을 불러왔다.
월간토마토 vol.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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