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낸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마을-구마니 마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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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여지도 시리즈

우리가 보낸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마을-구마니 마을2

by 토마토쥔장 2021.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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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보낸 시간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마을-구마니 마을2

[월간토마토 3월호 대전여지도 中] Part 2.

 

 

한때 200가구 살았던 큰 마을 구마니

글·사진 이용원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텅 빈 마을을 기웃거리다가 마을 초입에서 신흥슈퍼식당을 발견했다. 사실 마을 초입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곳이다. 한때는 마을 중앙 부분이었을 곳이다. 지금은 산업시설이 아닌 주택이 모인 마을로 들어서는 안길 시작지점이니 초입이라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어디선가 날아온 오동나무 씨앗이 슈퍼 담벼락에 붙어 뿌리를 내리고 껑충하게 자랐다. 반듯하게 자라지 못하고 담벼락 반대쪽으로 휘었다. 수형이 제법 당당하고 우람하다.

마을 초입 신흥슈퍼와 오동나무

 구마니 마을에 다른 건물과 달리 신흥슈퍼는 부서진 곳 없이 제법 온전하게 남았다. 그래도 더는 소소한 생활용품이나 음식을 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넓게 유리를 끼운 미닫이문 앞에 서서 안을 기웃거렸다. 밖처럼 안도 깔끔했다. 다음에 들어올 사람을 위해 전 주인이 깨끗하게 정리해주고 나간 것처럼 말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힘을 주어 미닫이문을 열어보니, 스르르 열린다. 안에 갇혔던 미적지근한 공기가 훅 몰려나온다. 공간 중심부에 있는 연탄난로가 내뿜는 열기였다. 그곳에서 김덕근 씨를 만났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면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에 앉아 있었다. 김덕근 씨는 멀뚱히 앉아 낯선 방문객을 대수롭지 않은 눈길로 쳐다보았다. 지금껏 마을이 겪은 수많은 변화에 비하면 모르는 사람 하나 마을에 들어와 돌아다니는 건 별일도 아닐 거다.

 

 

 김덕근 씨는 구마니 마을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았다. 마을이 대전산업단지 재생사업지구로 묶이면서 토지 주택 보상과 이주 대책 협의 등이 필요했다. 구마니 마을에서 나름 대책위원회를 꾸렸고 김덕근 씨가 위원장을 맡았다.

 

“LH하고 이주 대책으로 천동 3지구에 건립하는 아파트 입주권을 받기로 협의했어. 그거 신청도 2월 19일까지 받아야 하고 또 마을이 이러니까 이런저런 쓰레기 버리는 사람도 있고 해서 이렇게 나와 있어.”

구마니 대책위 김덕근 위원장

 주민을 만날 수 없을 거로 생각했던 터라 더없이 반가웠다. 김 위원장은 이주대책으로 마을 주민이 동구 천동 3지구에 입주권을 받아 헤어진 마을 주민 중에 20~30가구는 그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김 위원장은 다른 사람이 마을에서 운영하던 신흥슈퍼마켓을 인수해 구조를 조금 바꿔 식당까지 겸했다. 김 위원장이 장사를 한 건, 10년 남짓이다. 1947년생인 김 위원장이 태어난 곳은 슈퍼마켓 앞쪽에 있는 집이고 마지막까지 살았던 집은 마을 안쪽에 따로 있었다. 구마니 마을 토박이다. ‘구마니’라는 듣기에 사람 이름을 닮은 마을 이름 유래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했다. 대덕문화원 자료에는 마을 앞을 흐르는 물에 거북이가 많이 놀아서 거북이 구(귀) 자를 썼다는 유래와 고개가 아홉 개 있어 구마니라 불렀다는 유래, 마을을 싸고도는 유등천, 갑천 때문에 마을 지세가 거북이를 닮아 그렇다는 유래를 함께 소개했다.  마을 이름 유래는 몰랐지만 김 위원장은 수창(청)보와 원산모랭이라는 지명은 기억해냈다.

 

“옛날에 마찻길은 냇물을 건너서 삼천동으로 이어졌어. 우마차는 그리로 해서 시내로 나갔지. 튼튼한 다리는 아니었고 임시로 돌을 쌓아서 만든 거라 큰비라도 내리면 다 떠내려갔어. 매번 동네 사람이 모여 다시 놓곤 했지. 아주 힘든 일이었어. 사람은 산 너머로 오정동 쪽으로 걸어 다녔고. 안구마니보다 더 위쪽으로 수창(청)보가 있었어. 그건 이쪽 동네 사람이 농사지을 물을 대는 보였고, 갑천에 라바댐 만든 곳에도 보가 하나 있었는데 그건 저 건너 사람들이 농사 지을 때 물을 대는 보였지. 원산모랭이는 산자락 끝이었어. 무다리 마을로 가는 길옆으로 산에 붙어서 작은 묘가 하나 있었어. 어른들은 그 묘 안에 계신 분이 ‘원산’이라는 분이어서 원산모랭이라고 불렀다더라고. 또 할아버지 한테 듣기로는 이 마을에 처음 곽 씨가 들어왔고 그다음에 송 씨가 들어왔다고 하더라고. 우리 살 때는 집성촌은 아니었고 다양한 성씨가 모여 살았지.”

 

 김 위원장 얘기 중에 원산모랭이에 관한 설명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확인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원산’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궁금했지만 확인할 길은 없었다. 본래 이 마을 사람 대부분은 농사를 짓고 살았다. 실제로 벼가 잘 되는 마을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김 위원장은 마을 앞을 흐르는 물이 더러워지면서는 벼가 웃자라곤 해서 벼농사가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산업단지 조성이 이루어지면서는 많은 집이 남은 농사채를 꾸리면서 세를 놓고 살았다. 60~70호가 모여 사는 마을에 많을 때는 200가구가 살 정도였다. 한 집에 많게는 10가구도 살았다. 마을에 갑자기 그 정도로 사람이 늘어나면 무척 심란했을 듯한데 그렇지 않았단다.

 

“대부분 공단에서 일하는 사람이니까 벌이가 있는 거잖아. 슈퍼에서 외상으로 물건을 가져다 쓰기는 했어도 월급날이면 꼭 갚았으니까. 그렇게 많이 모여 살아도 마을 분위기는 좋았어. 오히려 최근에가 더 안 좋았어. 외상값도 떼이고. 예전처럼 많지는 않아도 세 사는 사람도 있었지. 연탄 때는 방은 6~7만 원, 기름보일러를 사용하는 방은 10만 원 정도 월세를 받았어. 보증금도 없이.”

 

마을 주민이 모두 함께 마시고 제도 올리던 구마니샘

 김 위원장은 덤덤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외상값 떼인 것도 역시 별로 대수로운 일은 아니었다. 구마니 마을도 어쩌면 급진적인 변화 앞에 줄곧 저렇듯 덤덤한 태도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업단지 조성 이후에도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 옛 대화리 흔적을 간직한 채 시간을 이어왔던 구마니는 그렇게 소멸을 앞두고 있었다. 신흥슈퍼를 나서며 구마니샘을 찾아보기로 했다. 이웃 마을 사람도 와서 길어 마시고 빨래도 했던 소중한 샘이란다. 김 위원장 표현으로는 가뭄이라도 들어 물이 부족할 때는 ‘아주 바짝 짜서 먹을’ 정도였단다. 그러니 마을 주민이 1년에 한 번씩 돈을 모아 고사도 지냈다. 구마니샘 물을 함께 마시고 고사도 함께 지내던 사람들이 한마을 주민이었다. 구마니샘은 마을 산자락에 붙어있었다. 골목 끝에서 쉽게 닿을 수 있는 곳이었지만 온갖 폐기물로 접근로가 막혀 다가서기가 쉽지 않았다. 없는 길을 만들어 애써 찾아가야 했다. 구마니샘은 샘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건물 안에 있었다. 사방이 막히고 지붕도 제대로 얹은 실내 공간에 들어앉은 동그란 콘크리트 우물은 묘한 느낌을 주었다.

 

-다음 화에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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