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이라고 다 같은 흑백이 아닙니다
마스터인쇄 - 명경문화사
글·사진 김연정미
인쇄판을 만드는 작업을 의미하는 전문용어는 소부다. 인쇄기 실린더 롤러에 소부판을 말아 붙여 잉크로 종이에 찍는 과정이 인쇄다. 소부판이 금속이면 옵셋인쇄, 인화지면 마스터인쇄라고 부른다. 마스터인쇄는 표면 처리된 특수 재질 종이로 마스터페이지Master Page를 만든다. 원가가 저렴해 짧은 시간, 많은 페이지의 책자를 소량 인쇄하는 데 적합하다. 규격에도 제약이 없고 공정도 단순해 속칭 인쇄골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쇄 방식이었다.
1980년대 초반 마스터인쇄기가 등장한 이후 마스터인쇄기를 통한 인쇄와 출판은 권력과의 가열한 싸움 한복판에서 대중의 호응을 얻기도 했다. 판금됐던 김지하의 첫 시선집 『타는 목마름』은 1984년 대학가에서 마스터인쇄로 출판되면서 대학생들을 만났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참상을 처음으로 엮은 책 『죽음을 넘어 시대를 넘어』도 1985년 5월 마스터인쇄와 게릴라 제본을 거쳐 독자들을 마주했다. 원고-교정-흑백 레이저 프린터 출력-종이 판뜨기-인쇄 과정을 거치는 마스터인쇄는 소량이라서, 가격 부담이 적어서, 인쇄 시간이 짧아서 여론을 움직이는 선전물을 만드는 데 효과적이었다.
관공서의 수요도 많았다. 대학 논문과 학회지, 기획서, 연수 교재 이외에도 공공기관에서는 회의 자료와 보고서를 만드는 데 마스터인쇄를 활용했다. 마스터인쇄기를 잘 다룰 수 있는 노하우가 있는 업체, 물과 약품의 농도를 적정하게 잘 맞출 수 있는 경험 많은 업체, 시간과의 싸움에서 품질도 놓치지 않는 업체에 일감이 몰렸다.
대전시 동구 정동에 위치한 명경문화사는 대전의 대표적 마스터인쇄 전문 업체다. 박천경(55) 대표는 인쇄 산업의 시대적 부침을 온몸으로 겪으며 30년 동안 인쇄골목을 지켰다.
“처음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인쇄 수요의 대부분이 마스터인쇄였어요. 인터넷이 발달하고 디지털로 전환하기 전에는 100부 미만의 소형 인쇄물이 많았죠. 사업 초창기엔 90%가 마스터인쇄였지만 지금은 완전히 역전돼 30%도 안 될 거예요. 디지털화로 물량이 줄어들다 보니 이왕이면 흑백보다 컬러로 인쇄하겠다는 사람이 증가했어요. 자연스럽게 마스터인쇄 수요도 줄었죠.”
명경문화사는 대전인쇄골목에서 이름깨나 알려진 업체로 통한다. 대표 이름은 몰라도 ‘명경’을 아는 사람은 많다는 것이다. 박천경 대표는 이런 유명세가 기술력 덕분이라고 자부했다.
“마스터인쇄가 1도라서 과정이 쉬울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 그렇지 않아요. 마스터판에 코팅이 되어 있지만 결국 종이거든요. 물과 섞인 상태에서 많이 돌리면 내구성이 떨어지고 품질이 낮아집니다. 그러니까 정해진 가격 안에서 발주자가 원하는 물량을 제때, 고품질로 뽑아내는 게 기술력이죠.”
박천경 대표는 흑백도 다 같은 흑백이 아니라고 했다. 물을 활용해 약품의 농도를 잘 조절하는 능력, 종이 판재의 선택, 기계를 다루는 노하우가 더해져 경쟁력이 된다는 것이다. 게다가 마스터인쇄는 시간과의 싸움으로 통했다. 납품 기간, 발주량, 품질 삼박자가 맞아야 했다. 일감이 몰리는 겨울 특수엔 4개월간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겨울 한철 벌어 한 해를 난다고 할 정도였다. 그렇게 10년여를 힘든 줄 모르고 일했다.
고비는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와 함께 시작됐다. 인쇄용지 등 원부자재 가격이 상승한데다 단체수의계약제도가 축소되면서 인쇄 산업 전체에 빨간 불이 켜졌다. 인쇄업계가 전문화, 계열화를 통한 경쟁력 강화에 나섰지만, IMF 한파 속에선 전문 인력을 확보하는 것도, 인쇄기술을 향상해 이윤을 극대화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박천경 대표는 인쇄골목의 많은 원청회사가 문을 닫고 계열화가 빠르게 진행된 것도 인쇄기술 및 디지털 환경 변화와 관련이 깊다고 분석했다.
회사 운영은 여전히 녹록지 않다. 기술의 진보는 더 많은 투자를 필요로 했지만, 인쇄 단가는 제자리였다. 인쇄 수요 역시 급감했다. 생존을 위한 변화는 거스를 수 없는 선택이었다. 노동집약형 수공업이었던 인쇄기술에 디지털화 바람이 불면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많은 동료는 간판을 내리고 골목을 떠났다. 박천경 대표가 달랐다면, 변화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는 점이다. 마스터인쇄 전문보다 디지털인쇄 전문이라는 수식을 강조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세요. 인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종이인쇄, 실크인쇄, 상패 등 어떤 재료에 새기느냐의 차이만 있지 모두 인쇄입니다. 그만큼 인쇄 영역이 굉장히 넓어졌어요. 최근엔 옵셋인쇄에서 찍을 수 없는 특수지 디지털인쇄에 공을 들이고 있어요. 디지털은 물을 사용하지 않는 건식이라 색상을 더 잘 구현할 수 있는 게 장점입니다.”
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마스터인쇄의 쇠락은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됐다. 명경문화사도 마스터에서 디지털로 전환하는 과도기에 있다. 다품종 소량 생산, 고급화가 변화의 핵심 키워드다. 2014년 7월, 명경문화사는 또 하나의 이름을 갖게 됐다. 아내 송민자 씨가 대표로 있는 북마을 커뮤니티다. 식당 메뉴판을 보면서도 인쇄 상태와 제본 상태를 살필 정도로 인쇄에 남다른 안목과 기술을 가진 인쇄 장인은 시장 선점을 위해 아내를 여성기업인으로 키웠다. 그리고 기꺼이 사업 파트너가 됐다. ‘따로 또 같이’의 힘은 인쇄골목 사업자들과의 협업을 통해 일찌감치 깨우쳤다.
대전인쇄골목을 지탱하는 힘은 협업이다. 모든 인쇄 공정을 나 홀로 해결하기보다 계열화된 업체들과 일감을 나눠 동반 성장하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대전인쇄골목을 대표하는 마스터인쇄 전문업체 명경도 생존을 위한 변화의 한복판에 있다. 지향은 디지털인쇄 전문 업체가 되는 것이다. 기계화와 자동화, 급변하는 디지털 환경 속에서도 ‘종이의 온도’는 여전하다고 믿는 사람들. 시대를 담았던 인쇄가 다시 인쇄의 시대를 열기 위한 도전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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