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트 아니고, 프린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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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프린트 아니고, 프린팅

by 토마토쥔장 2021. 4.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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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린트 아니고, 프린팅

영진프린팅

글·사진 성수진

 

네 개의 유닛이 장착된 옵셋인쇄기

영진프린팅 신원식 대표를 만나는 자리, 카라그래픽스 유준 실장이 함께했다. 유 실장은 대전인쇄거리에서 30여 년 일한 경력을 지니고 있어 인쇄의 전 과정에 빠삭하다. 그는 “인쇄업 하는 사람들이 말수가 적어요”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며 취재에 도움을 주었다. 신 대표는 말수가 적은 대신 신중했고, 하는 말마다 뼈가 있었다. 그는 인쇄업의 미래를 낙관하지 않았지만, 현재에 집중하는 것으로 먼 곳을 내다봤다.  신 대표와 유 실장에게 옵셋인쇄 전반에 관해 이야기 들은 후, 이 일을 설명하는 두 가지 소제목을 골랐다. ‘사람의 손으로 하는 일’, ‘이웃 업체와 함께하며 오늘을 충실히 사는 일’이다. 과정 대부분이 자동화되어 있지만 결국 옵셋인쇄는 ‘사람’이 하는 일이고, 혼자 혹은 한 업체만으로는 할 수 없다. 각자가 오늘 일을 충실히 마쳐야, 우리 손에 잘 만든 책 한 권이 쥐어진다. 인쇄는 ‘프린트’가 아니라 ‘프린팅’이다.

 

 

 

사람의 손으로 하는 일

영진프린팅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제일 먼저 보이는 건 옵셋인쇄기다. 네 개 유닛을 장착한 기계는 미쓰비시사 제품이다. 크고 육중한 이 기계로 다양한 인쇄물을 찍는다.

 

옵셋인쇄는 디자인 결과물을 먹, , , , 네 가지 색으로 분리해 차례로 인쇄하는 방식이다. 종이가 인쇄기 네 개 유닛을 거치며 한 겹씩 색을 입는다. 그 과정을 위해, 먼저 조판한 파일(인쇄할 내용)을 먹, 청, 적, 황, 4도로 분리해 각각 CTP판(인쇄판)에 전사한 후 인쇄기 각 유닛에 장착한다. 롤러를 통해 CTP판에 잉크가 묻고, CTP판이 블랑켓으로 전이되며 블랑켓을 통해 종이에 인쇄한다. 대체로 먹, 청, 적, 황의 순서로 인쇄하며 4도 인쇄를 마쳤을 때, 우리가 흔히 보는 ‘컬러’ 인쇄물이 나온다.

 

먹, 청, 적, 황 네 가지 색은 흔히 CMYK[Cyan(청), Magenta(적), Yellow(황), Black(먹)]라 부르는 것으로, 먹색을 먼저 인쇄하는 이유는 인쇄 시 가장 많이 쓰는 색이기 때문이다. 먹, 청, 적, 황의 색 중 하나만 사용하면 ‘1도 인쇄’, 두 가지를 사용하면 ‘2도 인쇄’라 한다. 2도 인쇄는 대체로 검은색과 다른 한 가지 색을 지정하는데, 두 색을 혼합해 비교적 다양한 색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먹, 청, 적, 황, 네 가지 색을 사용한 4도 인쇄가 가장 보편적이며, 상황에 따라 금색, 은색 등을 한 번 더 입히는 5도 인쇄를 하기도 한다.  

 

옵셋인쇄는 ‘인쇄의 꽃’이라 불릴 만큼 인쇄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구현력이 좋아 현대 인쇄 방식 중 가장 널리 쓰인다. 우리가 흔히 보는 책과 팸플릿 같은 것도 대부분 옵셋인쇄 결과다.

 

유닛의 속 모습, 블랑켓과 압통 사이로 종이가 지나간다

옵셋인쇄소 영진프린팅은 2013년 대전인쇄거리에 문을 열었다. 신원식 대표는 인쇄거리에서 제책사를 하는 매형 덕분에 인쇄업에 발을 들이게 됐다. 인쇄업이 융성한 때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가능성을 봤다. 영진프린팅을 열기 전에는 5년간 다른 옵셋인쇄소에서 일을 배웠다. 인쇄에 관해 잘 모르는 이들은 5년을 두고 긴 시간이라 말하지만, 사실 5년이면 굉장히 빠르게 배운 편이다. 10년을 배우고도 제대로 일을 익히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만큼 옵셋인쇄는 ‘감’이 중요하다. 과정이 상당 부분 자동화되었지만 ‘잘 찍는 집’, ‘못 찍는 집’이 따로 있고, 기계를 제어하는 사람에 따라 결과물 차이가 확연하다.

 

“디지털인쇄는 인쇄집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어도 대개 비슷한 결과물이 나옵니다. 반면, 옵셋인쇄는 기계를 누가 제어하는지에 따라 차이가 크게 나요. 인쇄할 때마다 잉크 값도 따로 줘야 하고, 그때그때 세팅을 반복해야 합니다. 프린트가 아니라 프린팅이에요.”

 

유준 실장은 옵셋인쇄를 ‘프린트가 아닌 프린팅’이라고 설명했다. 육중한 인쇄기보다 중요한 건 언제나 사람의 손이며, 손으로 인쇄물을 만드는 과정 자체가 인쇄라는 뜻이다.

 

인쇄소의 ‘손’ 역할을 하는 사람은 기장이다. 영진프린팅은 기장과 부기장이 하나의 팀을 꾸려 두 팀이 주간, 야간 번갈아 가며 일한다. 인쇄 과정을 끊임없이 지켜보아야 하기에 교대 근무가 필요하다.

 

신원식 대표

이웃 업체와 함께하며 오늘을 충실히 사는 일

“지금 코로나 때문에 정말 힘들어요. 관공서 행사라든지 예년대로라면 진행했을 일들이 모두 취소됐으니까요. 그에 따라 팸플릿이나 책자를 안 만드니, 일이 6~70%는 줄었다고 보면 돼요.”

 

신 대표는 요즘 코로나19로 인해 일이 줄어 속을 썩고 있다고 했다. 한창 바쁠 무렵, 대책도 없이 일이 줄어든 것이다. 인쇄업은 졸업과 입학 시즌에 일이 많고 여름철이 비수기다. 연말·연초가 한 해 일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진프린팅뿐 아니라 대전인쇄거리에 적을 둔 많은 업체가 비슷한 상황이다. 하나의 책을 만드는 과정에 여러 업체가 참여하기 때문이다.

 

영진프린팅은 대체로 출력실을 통해 조판 파일을 넘겨받아 인쇄를 진행한다. 인쇄를 마친 종이는 건조 과정을 거쳐 필요에 따라 다양한 업체에 보낸다. 낱장 인쇄물은 바로 재단소로 가고, 책은 표지만 따로 코팅집에 보내기도 한다. 그리고 마지막엔 제본소에서 책의 형태를 갖춘다. 따라서 옵셋인쇄 전前 과정, 후 과정 업체와의 소통과 상생이 필수적이다. 한 과정에서 실수하거나 좋지 않은 결과를 내면, 전체 일정이 더디어지며 결과물의 질 또한 떨어진다. 각 업체가 자신의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며 서로 믿고 의지하는 수밖에 없다.

 

신 대표는 현재 50대, 기장, 부기장 등 직원들은 30대다. 대전인쇄거리에서는 젊은 인력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인쇄소 대표들 나이는 40대부터 70대까지 분포하며, 신 대표는 젊은 편에 속한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이 오랜 시간 일할 수 있다는 확신을 안겨 주는 건 아니다.

 

“앞으로는 전망이 없어요. 그래도 예순까지는 해야죠.”

 

신 대표는 인쇄업의 미래에 대해 다소 비관적 관점을 지니고 있다. 인쇄 산업이 점차 쇠퇴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삼성1구역 재개발 사업에 따라 인쇄소를 이전해야 하지 않을까 불안감까지 더해졌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인쇄소를 이전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인쇄타운이 들어선다 해도 분양가가 높게 책정되면 입주하기가 쉽지 않을 거고요.”

인터뷰 말미, 신 대표에게 일하는 보람에 관해 물었다. 하나의 책을 만드는 보람, 무언가 기록하는 일에 대한 애착……, 이런 대답을 기대했는데 돌아온 건 보다 간단하고 명확한 답변이었다.

 

인쇄 잘 나왔을 때가 좋죠.”

 

신원식 대표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어쩌면 영진프린팅을 지속하는 힘은, 미래를 내다보고 쉽게 좌절하거나 낙관하는 것이 아닌 그저 오늘을 충실히 사는 것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신 대표는 짧은 말로 위의 모든 이야기를 갈무리했다.

 

“인쇄물 질을 높이기 위해 좀 더 신경 쓰는 거죠. 기장, 부기장들에게도 기계처럼 찍어 내지 말고 인쇄를 자기 일처럼 해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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