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쇄골목 구석구석에 '불어라 봄바람아~'
글·사진 이용원
1.
지금 ‘~리단길’처럼 한때 ‘~골목’, ‘~특화거리’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오토바이특화거리, 한의학거리, 한복거리, 헌책방골목, 공구거리처럼 말이다. 주로 동종 업종이 모인 곳을 일컫는 말이다. ‘장삿속에 장사된다’라는 말처럼 많은 유사업종이 모여 골목이나 거리를 형성한 곳은 그 자체로 마케팅 효과가 있다. 민선 자치시대에 접어들면서 이곳을 중심으로 간판 정비나 축제 개최 등 다양한 사업을 지원하기도 했다.
대전 동구에도 인쇄골목, 혹은 인쇄특화거리라고 부르는 구역이 있다. 인쇄와 관련한 다양한 업종이 모인 곳이다. 구역을 정확히 획정할 수 없는 건, 지금 이 순간에도 새로운 관련 업체가 들어섰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기 때문이다. 다만, 2015년에 개소한 대전인쇄소공인특화지원센터(이하 센터)는 대전 동구 삼성동과 정동, 중동에 걸쳐 인쇄 관련 업체가 모여 있는 것으로 파악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정동에 88개, 중동에 117개, 삼성동에 253개, 인쇄 관련 업체가 있다. 센터는 이들 업체에 모두 1,500여 명이 일하는 것으로 조사했다. 400개가 넘는 인쇄 관련 업체가 선으로 연결할 수 있는 공간에 들어섰으니, 분명한 특색을 드러내는 구역으로 분리하기에 충분하다.
대전인쇄특화거리라 부를 수 있는 삼성동과 정동, 중동 지역은 모두 대전역 인근이다. 일제 강점기 그즈음에 도심을 형성한 곳이다. 당시 첨단 지식 산업이라 부를 수 있는 ‘인쇄 산업’이 이곳을 중심으로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다. 물류를 책임질 대전역도 가깝고 인쇄 물량이 민간 영역보다는 아무래도 많았을 충남도청도 지척이었다. 이런 특성은 한국 전쟁을 거친 후에도 계속 이어진다. 인쇄 산업이 활황일 때, 대전은 서울, 대구와 함께 전국 3대 인쇄거리라 부를만큼 인쇄 산업이 특징적이었다. 전국에 큰 도시로 부산도 있고 광주, 인천도 있지만 대전이 3대 인쇄거리 중 하나를 형성했다. 인쇄거리에서 만난 관련 업체 사람들은 ‘지리적 특성과 집적’이라는 두 가지 특징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서울과 적당히 떨어졌고 대전역 주변을 중심으로 인쇄 관련 업체가 집중적으로 모여 단지를 형성한 것이 다른 대도시와 차별성을 띤 규모화로 이어졌다는 얘기였다. 여기에 정부대전청사 건립에 따른 인쇄 물량 증가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2.
지금처럼 대전역 주변으로 ‘대전인쇄거리’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인상적인 집적이 이루어진 것은 196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로 보인다. 일제 강점기에도 몇몇 인쇄소가 있었지만 당시 인쇄 산업 자체가, 관련 업체가 한곳에 많이 모여 있을 만큼 지역에서 큰 산업 영역으로 성장하기 전이었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재건기를 지나며, 인쇄 수요가 늘면서 인쇄거리라 부를 수 있는 집적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2002년 출간한 『대전충남 인쇄40년사』(이하 40년사)를 보면, 대전에서 확인 가능한 가장 오래된 인쇄소는 지금도 영업하는 ‘유신당인쇄㈜’다. 1910년 류석종이 창업한 회사다. 시작할 때는 ‘일도당’이라는 이름이었다. 목척교 옆 은행동에 가게를 차린 일도당은 도장을 파고 목각 명함을 제작하는 정도였다고 한다. 종이인쇄를 일상적으로 활발하게 할 만한 시대 상황은 아니었다. 이외에도 일본인 마쓰노가 창업한 ‘소화인쇄소’와 이름 모를 일본인이 창업한 ‘등경인쇄사(후지이인쇄소)’, 일본인 가꾸라는 사람이 창업한 또 다른 ‘일도당’이 일제 강점기에 인동과 은행동, 원동 등지에 있었다. 1932년에는 우리나라 사람인 이인구가 현재 ‘대전예술가의집’ 건너편에 ‘경남인쇄사’를 창업했다. 경남인쇄사는 목판인쇄를 시작으로 활판과 석판을 겸한 인쇄기를 들여와 영업을 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전통적인 목판인쇄를 상업 인쇄에 활용한 마지막 인쇄소로 추정한다.
광복과 한국 전쟁 이후에는 인쇄사 창업이 좀 더 활발하게 이어진다. 40년사에 따르면 세광인쇄사와 제일인쇄사, 태극사, 유천당, 활문사, 조흥인쇄사 등이 문을 열고 지금도 문중 족보 제작을 주로 하는 ‘회상사’도 이 즈음인 1954년 중동에서 창업한다.
이 시대 인쇄는 주로 활판인쇄였다. 자음과 모음을 모아 조판한 후에 잉크를 묻혀 종이에 찍어 내는 과정을 얼마나 기계화했는지 차이가 있을 뿐, 활판인쇄는 1990년대 중반까지 근 100년 가까이 대전인쇄거리에서 유지한 인쇄법이다. 음소를 하나씩 활자로 만들어 두고 필요한 활자를 뽑아 글자와 문장을 만드는 조판 과정을 거쳐 활자 표면에 잉크를 발라 종이에 찍었다. 활판인쇄가 주종을 이루던 초창기에 석판인쇄도 공존했다. 기름이 물 위에 뜨는 성질을 이용한 인쇄법으로 옵셋인쇄의 원형이다. 옵셋인쇄는 이 원리를 이용해 재료를 좀 더 구하기 쉽고, 다루기 쉬운 것으로 대체하고 일부 과정을 기계화한 결과물이다. 지금은 상업 인쇄에 쓰이지 않지만 예술 영역에서 석판인쇄는 판화 작업 방식 중 하나로 활용한다.
3.
40년사에 따르면 활판인쇄는 1980년대 초반부터 등장한 마스터인쇄기에 경인쇄 부문을 넘겨주며 역사에서 사라지고 석판인쇄는 활판인쇄보다 더 빠른 1980년대 초반, 상업 인쇄소에서 자취를 감춘다.
통계 기준이 자주 바뀌어서 절대 비교는 불가능하지만, 당시 시대 철학을 반영한 통계 기준을 살펴보면 1971년 대전 인쇄출판업체는 54개였다. 이곳에서 622명이 일했고 대전직할시로 행정 개편이 이루어진 1988년에는 147개 사업체에 1,020명이 일했다. 이상이 40년사에서 뽑아 정리한 통계다.
최근 대전시 통계자료인 2018년 사업체조사 통계자료를 보면 인쇄 및 인쇄 관련 산업 사업체는 모두 545개다. 이곳에 모두 1,683명이 일한다. 세부적으로 나눠 보면 인쇄업체 436곳에 1,264명이 일하고 제판 및 조판업 28곳에 160명, 제책업 53곳에 146명이 일한다. 기타 인쇄 관련 산업 사업체 28곳에 113명이 일한다.
인쇄업체 436곳 중 가장 많은 건 경인쇄업이다. 270개 업체에 704명, 옵셋인쇄업 94곳에 382명, 스크린 인쇄업체 46곳에 104명, 기타 인쇄업 26곳에 74명이 일하는 것으로 조사했다.
이런 통계 자료에서 흥미로운 건, 두 가지 사실이다. 센터가 조사한 결과를 보면 인쇄특화거리라 부를 수 있는 삼성동과 정동, 중동에 있는 인쇄 관련 업체가 458개, 근무자가 1,500여 명이다. 대전시 통계자료와 비교해 보면 대전시 전체 인쇄 관련 업체 중 80%가 넘는 사업체가 인쇄특화거리에 모여 있다. 전체 인쇄 산업 관련 노동자 중 인쇄특화거리에서 일하는 사람은 90%에 가깝다. 이곳에 관련 사업체와 인력의 집적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 쉽게 가늠할 수 있는 수치다.
다른 흥미로운 결과는 업체 대비 근무자 수다. 1971년 통계에 따르면 인쇄 관련 업체 한 곳당 근무자 수는 평균 11.5명이다. 1988년에는 6.93명, 2018년에는 3.08명이다. 같은 기간 업체 수는 54개, 147개, 545개로 늘어났지만 업체당 노동자 수는 계속 줄었다.
“이 조그만 기계 하나에 일하는 사람이 대여섯 명은 붙었다고, 지금은 대부분 기계가 자동화되어서 이것보다 더 큰 기계라도 나 혼자 충분히 움직일 수 있지만, 예전에는 안 그랬어. 북적거리던 인쇄골목이 조금 한산해진 이유가 그것도 있을 거야.”
인쇄골목에서 만난 대광지공사 전백현 대표 얘기다. 인쇄특화거리가 예전처럼 활기를 띠지 못하는 것에 절대적인 인쇄 물량이 줄어든 것도 영향을 끼쳤을 수 있지만, 인쇄 관련 기계가 자동화되면서 필요한 인력이 확 줄어든 것도 적잖은 원인이었다. 18세기 초반 영국에서 산업혁명으로 일자리가 줄어들 것을 우려해 기계를 파괴하는 형태로 사회운동을 벌였던 ‘러다이트운동’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지금도 자동화는 계속 이루어진다.
4.
인쇄 관련 사업체가 한곳에 무리짓는 건, 글 앞에 밝힌 공구거리나 책방거리 등과는 조금 다른 지점이 있다. 인쇄 산업이 잘게 쪼개진 ‘협업 구조’라는 점이다. 최근 다양한 기계화와 자동화가 이루어지면서 나뉘었던 공정이 하나로 합쳐지거나 한 개 업체가 여러 공정을 포괄해 사업을 규모화하는 사례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인쇄물을 만드는 과정은 종이, 출력, 인쇄, 제본을 비롯해 형압과 부분코팅 등 다양한 후반 작업으로 공정이 나뉘었다.
한 권의 책, 한 종의 인쇄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종이를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며 여러 사업체가 함께 작업해야 한다. 이동 거리가 멀다면 제작 시간과 품질 관리에도 영향을 미치고 결정적으로 비용 상승을 유발한다. 싫어도 모일 수밖에 없다.
“우리 작은 아버지 강정득 씨가 대구에서 올라오셔서 1965년에 이곳 삼성동에 제일인쇄재료사를 차리셨지. 다른 인쇄 재료도 있었지만 주로 활자를 취급했어. 신쭈(황동을 일컫는 일본식 이름, ‘신주’라고도 함)로 자모를 만들어, 300도에서 납을 녹이면 물처럼 된다고, 그걸 부으면 활자가 만들어지지. 인쇄소에서 활자를 사서 쓰다가 많이 닳아서 못 쓰면 무더기로 모아서 무게를 달아 다시 팔았어. 그럼 그걸 녹여서 다시 활자를 만드는 거지. 활판인쇄가 대부분이던 시절에는 활잣집이 가까이에 있는 게 좋잖아. 그렇게 쇄 관련 업체가 하나둘 모여든 게 아닌가 싶어.”
지금은 남강문화사를 경영하는 강해구 대표 얘기다. 대구에서 작은 아버지가 올라온 1965년 즈음, 인쇄골목에는 관련 업체가 하나둘 모여 나름 단지를 구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1980년대 인쇄골목 한복판에서 영업하다가 지금은 대동천 옆으로 자리를 옮긴 ‘협성문화사’ 염형영 대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아마, 듣기로는 1970년 이쪽저쪽에 골목을 형성하기 시작했을 거야. 종이 도매업을 하는 지업사가 자리를 잡으면서 그 주변으로 활판인쇄소가 모여들기 시작했지. 그 일대가 대부분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둔 주택가였어. 토착민도 살고 피난민도 살고, 그곳에 건물이나 주택을 얻어 인쇄 관련 업체가 들어오기 시작해 점점 확장한 거지.”
종이 도매상이 먼저인지 인쇄재료사가 먼저인지는 그닥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재료를 공급할 수 있는 인쇄소가 몇 곳 있는 걸 보고 재료사나 종이 도매상이 나중에 들어왔을 수도 있다. 각 인쇄 관련 업체마다 재료나 원료 수급이 쉽고 다른 협력 업체와 작업하기 편리한 곳을 찾다 보니 하나둘 자연스럽게 모여든 것으로 보인다. 살아 있는 생태계처럼 인쇄 관련 업체가 소우주를 형성한 것이다.
5.
“글쎄, 쇠락이라고 하면 지금이 바닥이 아닐까 싶어. 더는 내려갈 곳이 없어. 이대로는 유지될 거야. 한동안 공공기관을 중심으로 종이책 대신 CD로 출판한다고 관련 예산을 엄청 세웠지. 서울 인쇄업자를 중심으로 CD 제작할 수 있는 설비를 들여놓기도 했어. 근데, 금방 USB라는 저장 매체가 나왔잖아. 그러다 결국 다시 종이책을 만들어. 아무리 새로운 문물이 등장해도 종이책으로 만들어서 봐야 충족되는 영역이 있는 거야. 없어질 수는 없지.”
40년 가까이 인쇄소를 경영한 염형영 대표는 우리나라가 금융 위기를 겪었던 소위 IMF를 기점으로 인쇄 산업이 급격하게 쇠락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1980년대부터 그 이전까지 인쇄 산업은 호황이었다. 협성문화사도 직원 30명에 납품 차량만 두 대를 운행해야 할 정도로 일이 넘쳤다. 그중 규모가 큰 일은 역시 관공서 일이었다.
당시 다양한 일이 있었지만, 큰 무게감을 지녔던 일은 국정감사용 자료를 만들고 대통령 업무보고 자료를 인쇄하는 일이었다.
“국정감사 자료 인쇄를 처음 했을 때가 1988년이었나? 우리가 그때 인쇄소에서는 거의 처음으로 ‘서울시스템’이라는 컴퓨터용 편집프로그램을 도입했어. 앞으로 대세가 될 거라 예상한 거지. 당시 인쇄소에서 컴퓨터용 시스템을 도입한 곳은 없었어. 비싸기도 무척 비싸고. 조판 글씨체만 보다가 컴퓨터 글씨체를 보고는 눈이 번쩍 뜨인 거지. 그때 한 사흘을 십 분도 못 자고 일을 했어. 충남도청 기획실 직원들이 옆에서 붙어 앉아 가지고 자로 글자 자간을 재고 다녔던 시절이니까. 그때 인쇄물 잘 만들어 줬다고 도청에서 상도 받았어.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스릴 있었지.”
인쇄소에서 작업하는 동안 충남도청 실·과장도 사무실에서 대기하며 수시로 업무 진행 상황을 체크했다. 문서에 담긴 내용도 중요했지만 그를 편집해 낸 꼴도 중요했다. 만듦새 수준에 따라 행정 역량을 평가 받던 시절이었다. 그러니 인쇄물 발주를 내는 관청과 인쇄소와의 관계가 지금보다 훨씬 더 밀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염 대표는 통일만 되면 북한 쪽에 인쇄소를 차릴 생각이었다. 관공서 일이라는 것이 다른 일과 달라서 일정한 규칙과 법칙이 있는 일이다. 경험이 없는 곳에 덜컥 맡겼다가는 낭패 보기 십상인 일이다. 실제로 그런 일도 비일비재했다. 오랜 경험을 쌓은 협성문화사가 충분히 경쟁력 있을 거라 예상했다. 안타까운 건, 통일도 아직은 예상하기 어렵고 인쇄 산업도 점점 사양길이다. 그럼에도, 염 대표는 작은 인쇄소가 하나둘 문을 닫으면 결국 실력과 규모를 갖춘 큰 인쇄소가 독보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인쇄 영역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6.
희미하게 사라져 가던 흔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애써 찾으면 다시 또렷하게 떠오르는 신기한 경험을 선사한다. 인쇄거리 곳곳에서 새롭게 인테리어를 하거나 최근에 개업한 곳 사이로 낡은 간판이 도드라지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간판 중 유독 많이 보인 건, ‘○○문화사’였다. 지금 정서로는 간판만 보아서는 직관적으로 무엇을 하는 곳인지 쉽게 감이 잡히지 않는다. 편집디자인 개념이 없고 조판 편집 개념이 주를 이루던 시절부터 있던 곳이다. 조판 편집만 하거나 규모에 따라 직접 인쇄까지 겸했던 곳이다. 당시 사회 정서로는 다양한 사업체 중 가장 문화적인 사업체였던 모양이다. 그처럼 자신있게 포괄적이고 방대한 개념을 함축한 ‘문화’라는 낱말을 사업체 간판에 적어 넣을 정도면 말이다. 그런 측면에서 낡은 간판에 함께 스민 고집스런 자긍심 같은 것이 읽힌다. 어쩌면, 대전인쇄특화거리 정체성을 보여 주는 상징 같은 것이 ‘○○문화사’일지도 모르겠다. 이 정체성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대전이라는 도시 안, 문화생태계에서 중요한 한 축을 담당했던 인쇄특화거리는 최근 삼성동을 중심으로 재건축, 재개발 등 개발 현안이 등장하며 시끄럽다. 조합설립 인가 등을 축하하는 현수막과 재건축, 재개발을 반대하는 현수막이 공존하며 현재 시대상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단독 주택이나 개별 사업체가 아닌 서로 연결된 산업군이 단지를 형성한 곳이어서 상황이 더욱 복잡해 보인다.
다른 재개발, 재건축 지역과 마찬가지로 ‘낡은 것을 교체한다’는 관점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인쇄 영역은 무척 중요한 영역이야. 인터넷이 없던 시절, 인쇄물이 담당했던 역할을 생각해 보라고. 그런데도 인쇄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천대받는 장인이었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인쇄 일을 대부분 일본인에게 천대받으며 배운 거잖아. 그런 정서가 이어진 경향이 있지. 안타까운 부분이야. 인쇄인들이 자부심을 가져야 해.”
협성문화사 염 대표가 스치듯 던진 이야기가 묵직하게 남는다. 인쇄 영역은 지금껏 그리고 앞으로 담당해야 할 역할에 비해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인쇄기술 발전을 통해 우리는 다양한 지식을 효율적으로 공유했고 이는 민주주의 실현과 사회 발전에 막대한 기여를 했다. 사회가 보존해야 할 문화재나 사회에 준공공재로서 가치를 평가하는 예술 분야처럼 접근해야 한다. 인쇄 문화를 경험하며 지금에 맞게 재해석하는 작업은 우리에게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는 힘’을 줄 것이다. 지금 대전인쇄특화거리에 공공의 관심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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