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태우다' - 겹겹이 쌓인 껍질 안의 순수함을 되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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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나를 태우다' - 겹겹이 쌓인 껍질 안의 순수함을 되찾다

by 토마토쥔장 2021. 4.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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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태우다'

겹겹이 쌓인 껍질 안의 순수함을 되찾다.

이주연 사진 이주연, 노형규 제공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표현하자면,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내게 덮인 무언가를 태우는 일이다. 태우고 난 뒤에 남은 그것이 본래의 나 자신이라고 확신한다. (중략) 규칙이 있는 곳에선 통제가 있고, 때론 통제가 제 역할을 초월해 대상을 전혀 다른 존재로 변화시킨다. 그러다 보면 점점 본인의 모습을 잃고 통제 받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본래의 자아인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처음엔 벗어나려고 했던 것들로 하여금 길들여지는 것이다. (중략) 타의 또는 자의로 인해 날 덮어 버린 규정들은 정체성과 목표를 잊게 만들고 본래의 나를 지워 버리려 했다. 이에 나는 살아남기 위해, 나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나를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태운다. 이것이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이자 대상을 태우는 작업은 내게 있어 가장 최소한의 생존 방식인 것이다.”_작가 노트 중에서

 

 

<발화, 저항이자 최소한의 생존방식>

불에는 사람을 한 없이 무력하게 만드는 묘함이 있다. 반면에 정체된 무엇인가를 들끓게 하고, 변형시키는 힘도 함께 가진다. 노형규 작가의 작품에 담긴 불은 조금 다른 의미로 기능한다. 그에게 불은 스스로를 태워 본래의 알맹이를 찾는 작업을 의미한다.

 

노형규 작가는 캔버스 안에 불을 담는다. 붉게 타오르는 불은 그가 찾은 저항의 방법이다. 우리는 때때로, 아니 수시로 외부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 영향은 억압일 수도 있고, 통제일 수도 있으며 어쩌면 참견이나 일반화, 또는 과시일 수도 있다. 이러한 영향은 새로운 자극이 되기도 하지만 지속될 경우 결국 스스로에게 또 다른 가면을 씌운다. 노형규 작가는 많은 외부 영향으로 인해 스스로에게 갑갑할 만큼 여러 겹의 가면을 씌웠다. 그리고 외부 영향으로부터 길들여지고 자신이 쓴 가면을 마치 자신인 양 착각했다. 본래의 나 자신에서 벗어나 다른 이가 되어 갔다.

 

“살면서 일정한 틀이나 규칙 안에서 사람을 획일화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사람이 태어난 목적은 성공해서 잘 먹고 잘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어릴 때만해도 다들 꿈이 많았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공무원, 건물주가 꿈이라고 하더라고요. 꿈 자체도 획일화되어 있는 거죠. 물질이라는 하나의 틀에 갇혀 있어 꿈을 꾸지 못한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물질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고 느꼈죠. 그래서 그걸 깨고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노형규 작가

 

언젠가 누군가 이런 말을 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우리 윗세대들이 꿈꾸고 일궈낸 세상이라고. 그러니 그들이 꿈꾸고 일궈낸 세상에 사는 지금의 세대는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그려야 한다고. 윗세대에 맞춰진 세상에서, 맞춰진 대로 사는 것이 아닌 또 다른 시대를 꿈꿔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그들이 정해 놓은 틀 안에서 살아간다. 정해 놓은 성공의 길은 누구에게나 맞는 옷은 아니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은 개인을 괴롭게 하고, 자책하게 만든다.

 

노형규 작가는 고민하고 괴로워했다. ‘나’라고 생각했던 것에서 가까워지기 위해 끊임없이 생각했고, 그 끝에 내린 결론은 외부의 변화가 아닌 나 스스로를 변화하자는 것이었다.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 그리고 저항하는 것. 결국 불태우는 일,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과거를 되돌아보고 자신을 덮고 있는 것들을 태워 혼자서 고통을 감내하는 것은 그의 평소 성격에서 비롯한 선택적 저항이자 생존 방식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감싸는 껍질을 계속해서 태워 내며 스스로를 단련하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그가 가졌던 원래의 순수한 마음, 그저 그림이 좋아 순수하게 그림 그릴 수 있는 용기를 얻는 일이다.

 

“그림을 그리면서 많은 현실적 문제와 충돌, 제약을 받았어요. 작가가 되고 싶지만 그러한 문제는 꿈을 꾸지 못하도록 했어요. 그래서 스스로를 태워 다시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자 생각했어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순수한 마음으로 할 수 있도록 나아가는 것이죠. 작가 노트에도 말했듯이, 그래서 그림을 그리는 행위이자 태우는 작업은 제게 가장 최소한의 생존 방식인 거예요.”

 

<편도-한 방향으로> 45.5×37.9 Oil on canvas 2019

 

<야간 산책> 162.2×130.3 Oil on canvas 2018

 

<부둥켜안고 위로하는 일>

‘저항’, ‘생존방식’이라는 무겁고 버거운 생각에서 시작한 작업이지만, 작품 속 대상들은 <편도-한 방향으로>처럼 차분하거나 <야간 산책>처럼 게임 속 캐릭터의 모습을 하고 귀엽게 나타난다. 노형규 작가는 단순히 저항이나 생존방식에서 나아가, 작품을 통해 다른 이들을 향한 위로의 메시지를 함께 전달하고 싶었다. 그 자신을 위한 일이자, 자신과 다르지 않을 이들을 위한 작업인 셈이다.

 

“스스로를 태우고 누르는 고통과 괴로움을 사람들이 봤을 때 진지하기보다는 재밌게 느꼈으면 했어요. 그리고 외적 변화보다 내적 변화, 나 자신의 변화를 위한 작업을 시작한 건, 다른 사람들에게도 위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 움직이는 분들이 많잖아요. 그분들에게도 위로가 필요하다고도 생각했죠. 나만의 저항 방식과 작품은 누군가를 위한 시작, 위로 정도로 생각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우울한 그림을 그리기보다는 조금 더 재밌게 보여 주려고 하는 거죠.”

 

그만의 저항은 오랜 고민 끝에 필요와 갈증을 인식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위로하며 시작한 일인 듯하다. 노형규 작가는 계속해서 그림을 그려 왔지만, 정작 앞으로 어떻게 그려 나가야 할지 몰라 헤맸다고 한다. 주변에서 고맙게도 다양한 조언을 해 줬지만 와 닿지는 않았다. 그러다 <부둥켜안고 눈물을 닦았다>를 그렸고, 이 작품을 통해 위로 받았다. 그는 이 작품을 “스스로에게 하는 위로”라고 이야기한다. 어쩌면 이 작품이 그의 숨통을 조금이나마 틔워 준 것일지도 모른다.

<부둥켜안고 눈물을 닦았다> 116.8×91 Oil on canvas 2019

 

스스로에게 하는 위로는 어느 샌가 비슷한 상황 속에 놓인 사람들에게 닿았다. 그가 던진 위로와 시작의 불꽃은 작은 불씨에서 탄생했다. 긴 고민의 시간 끝에 피워 낸 불씨는 다른 이의 숨결이 닿아 조금씩 몸을 부풀린다. 처음 가진 순수함을 되찾기 위해 치열한 몸부림으로 시작했지만, 타인에게 도달한 이미지는 또 다른 영역의 이야기로 변화했다. 결국 노형규 작가의 작품은 그가 바라는 ‘순수하게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주고자 한다.

 

<프로메테우스> 37.9X45.5 Oil on canvas 2018

 

<green ambush> 53X45.5 Oil on canvas 2019

 

“남들이 바라는 모습이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자기가 진짜 행복할 수 있는 길을 찾았으면 해요. 특정한 상황에서 일정한 사회의 틀에 얽매이지 않고, 그 틀에서 떠나 내가 진짜 해 보고 싶었던 것은 무엇인지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잃어버린 꿈을 찾는 것과 같은 거죠. 이상적인 생각이겠지만 아직 젊으니까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 생각해요. 교수님들도 50 넘어서 하면 주책인데, 지금 하기에 딱 맞는 생각이라고 이야기해요. (웃음)”

 

<어쩌면 너도 마음속에 불꽃 하나쯤은 타오를지도 몰라> 45.5X53 Oil on canvas 2018

 

<너는 소리없이 다가와 내게 말했어 나는 너의 그 말에 그만, 불타 버렸어> 37.9X45.5 Oil on canvas 2019

 

인터뷰가 끝나고 그는 다시 실기실로 돌아갔다. 마치 그에게 있어 실기실이 인고의 방처럼 느껴진다. 하루 중 잠시라도 작업을 하지 않으면 마음이 편치 않다며, 다시 본래의 것을 꺼내기 위해 덮인 껍질을 태우러 갔다.

 

“우리는 모두 각자에게 주어진 무언가를 짊어지고 살아가고 있다. 이것들은 우리를 위협하지 않는다고 말하겠지만 때때로 우리는 그것으로 하여금 무너지고 낙심하게 된다. 안전하게만 보이던 길은 이내 우리를 위협하는 길이 되고 만다.

떠나온 곳으로부터 돌아가지 않아야 한다. 태워 버린 것들이 아쉬워 뒤돌아본다면 어쩌면 우리는 소금기둥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다시 또 다른 것에 지배되고 만다. 하지만 우리는 지나온 역사만큼 우리에게 씌워진 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다시 지배되는 일은 없을 것이며, 태우는 행위를 통해 다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_석사 학위 청구전 <다시, 태우다> 도록 중에서

 

[2020년 153호 월간 토마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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