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책들은 본래 다 종이였다
세대지업 · 세대특수지
글·사진 양다휘
책을 만드는 데에 필요한 원재료 중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단연 종이다. 어떤 모양, 어떤 내용을 담은 책이든지 제작은 어떤 종이를 쓸 것인지 결정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래서 지업사는 바쁘다. 전화기에 불이 날 듯 쉴 틈 없이 주문이 들어오는 데다가 직접 견본지를 둘러보러 오는 사람, 재단된 종이를 가지러 오는 사람, 인쇄를 마친 작업물을 가지고 상담하러 오는 사람까지…. 그렇게 바삐 흩어진 종이들이 다 책이 된다. 인쇄거리에서 책을 만드는 일은 결국 종이라는 물질의 대사(代謝) 과정이다.
종이는 자를 뿐
아버지로부터 이어 온 지류 회사를 운영하는 ㈜세대지업 윤석주 대표는 바로 옆 건물에 위치한 세대특수지와 함께 대전 동구 삼성동의 한밭중네거리에 자리를 잡았다. 대전인쇄거리가 확장하면서 세대지업도 규모가 커졌고, 비좁아진 중동 사업장에서 나와 사거리로 자리를 옮긴 지도 벌써 16년이 넘었다. 같은 상호로 중동에서 종이를 팔던 때부터 햇수를 세어 보면 세대지업의 업력은 자그마치 49년, 내년에는 50주년을 맞이한다. 이제는 2대를 넘어 3대에 걸친 가업이 될 수도 있다.
윤 대표는 지업사에서의 업무나 일과 자체는 아주 단순하다고 말하며 웃었다. 지업사는 수없이 많은 종류의 지류를 고객이 원하는 크기와 결로 잘라 판매하는 일을 한다. 오전 아홉 시부터 주문을 받아 종이를 자르고 나르는 일로 시작해 매일 저녁 마지막 주문 건의 납품으로 하루 업무가 끝난다.
종이를 만드는 제지사에서는 커다란 롤 형태로 생산해 전지 단위로 상품을 팔고 지업사에서는 다시 그 종이를 다양한 규격과 결로 재단해서 관련 업체에 납품한다. 지업사의 역할은 인쇄소에 필요한 종이를 적재적소에 공급하는 일이다. 대전인쇄거리가 바삐 돌아가는 데에 차질이 없도록 원자재를 공급하는 것이다. 종이 위에 잉크가 찍히고, 접히고 붙어 책이 된다. 취재를 하는 와중에 마침 제지사로부터 종이가 트럭째로 들어온다.
제지 회사에서 전지 크기로 들어온 종이는 창고에 분류해 적재했다가 인쇄소 주문에 따라 필요한 수량과 크기대로 재단하고 납품한다. 안쪽 창고에는 차곡차곡 쌓아 올린 종이 묶음이 천장까지 빼곡하게 닿아 있고, 커다란 재단기 두 대와 다 자른 종이를 싸서 끈으로 묶는 포장 기계가 있다. 주문받은 종이마다 도서, 홍보물, 명함 등 다양한 쓰임이 있겠지만 지업사에서는 그런 걸 알 겨를이 없다. 주문 전화는 “네, 백색 모조, 120그램, 국전 횡목, 몇 매?” 하는 식으로 사양과 수량을 간단히 확인하면 끝나고, 높이 쌓인 종이 산은 각자의 사명을 가지고 주문한 인쇄소로 흩어진다. 인쇄거리에서 종이로 책을 만드는 대사 과정은 명확하다. 각기 주어진 역할을 다할 뿐이다. 지업사는 자르고 묶어서 전달한다.
규격은 결국 숫자일 뿐이다
인쇄용지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일반적으로 문구류나 사무용지로 두루 사용하는 ‘일반지’와 해외 제지사에서 만든 ‘수입지’ 그리고 수입지를 대체하는 상위 품질의 종이를 ‘특수지’라고 한다. 수입지는 국내에서 생산 가능한 종이의 한계를 벗어나 선택지가 많고 질이 좋지만 수입품이다 보니 비쌀 수밖에 없다. 특수지는 수입지와 비슷한 질감과 색상을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쓸 수 있기 때문에 출판과 인쇄업계에서는 일반지만큼이나 다양한 작업물에 쓰인다.
세대지업이 취급하는 지류가 일반지, 세대특수지에서 취급하는 지류가 특수지와 수입지다. 세대특수지는 세대지업과 상호는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종류의 종이를 취급하는 별개의 사업체인 것이다. 세대특수지 조영배 대표가 지업사를 운영한 지는 18년, 일을 하다 보니 종이 종류와 규격, 결 등에 대해 빠삭하게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관련 작업자나 기획자도 어느 정도 실무 경험이 있어야 종이 사양을 잘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같은 종이라도 두께와 평량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종이의 두께감을 이야기할 때 평량이라는 무게 단위를 사용하는데 g/㎡, 즉 종이 면적 1㎡당 무게가 몇 g인지를 나타낸다. 종이를 사는 데 무게를 이야기하는 게 뜬금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종이의 두께나 밀도보다 무게가 더 일정하게 측정되기 때문에 중량을 기준으로 삼는다. 일반적으로 내지에 70-100g/㎡ 내외, 표지에 130-150g/㎡ 이상의 종이를 사용한다. 표지와 내지의 두께를 적절히 조정해야 책장을 편하게 넘길 수 있다.
둘째로, 종이에도 결이 있다. 결은 인쇄와 제본의 품질, 제작 효율성과 생산성, 보관성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다. 직사각형 종이에서 긴 쪽의 결이 가로냐 세로냐에 따라 해당 종이를 횡목과 종목으로 구분한다. 완성된 책을 기준으로 종이의 결은 세로, 즉 종목이어야 보관하기에 좋다. 제작하려는 책의 판형과 인쇄하는 종이의 크기 및 방향에 따라 적절한 결을 선택해야 한다.
사실 지업사 두 곳을 방문하기 전에 먼저 종이의 사양, 특히 규격에 대해 상세하게 알아 두려고 애를 썼다. 우리가 아는 A4, B4가 종이 규격의 전부는 아니며 규격을 제대로 정해야 종이의 낭비를 최소화하고 효율적으로 책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판매하는 종이도 대부분은 국제적인 규격에 따르기 때문에 지업사의 업무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규격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조 대표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얻은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규격은 결국 숫자에 불과하고, 중요한 건 “내 인쇄물이 어떤 사이즈에 들어가느냐”라는 것이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한마디가 인쇄물 제작자로서 그동안 느꼈던 규격과 사이즈에 대한 강박 내지는 막연함을 환기시키는 듯했다. 종이를 파는 사람은 물론이고 사는 사람에게도 중요한 것은 ‘알맞은 크기’다.
“전지 종류 중 A 규격의 제작물에는 국전지를 쓰고 B 규격의 제작물에는 4·6전지를 쓰지요. 굳이 보편적인 규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면, 그것만 알면 돼요.”
지역에서 종이책을 만드는 일
다시 세대지업을 찾았다. 바쁘게 종이를 자르고 나르는 외부 풍경과 달리 사무실 내부는 조용했다. 코로나19의 영향인지 물었으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한다.
“요즘 코로나19로 인한 타격이 크지만 그 전부터도 이미 종이 수요가 많이 줄어들고 있었어요. 소품종 대량 제작이 이뤄지던 과거와 달리 요즘에는 다품종 소량 제작을 하니까, 쓰이는 종이도 전체적으로 훨씬 줄어들었죠.”
윤 대표는 종이 수요가 줄고 인쇄업이 사양 산업이 되어 감에 대한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물론 IT 환경에서는 조금 다르겠지만, 옛날에는 ‘1년에 몇 킬로그램인가’ 하는 종이 수요량이 그 나라 문화 발전의 척도였어요. 사업을 떠나서 그런 면에서도 현재 인쇄업의 상황은 상당히 안타깝죠. 아무쪼록 인쇄와 출판업이 조금씩이라도 지금보다 활성화되고 이 긴 내리막길이 끝나기를 바랍니다.”
지식정보 산업 콘텐츠의 성질이 손에 쥐는 책에서 텍스트 자체로 바뀌면서, 인쇄거리의 생산 방식도 변화했다. 넘치는 텍스트에 비하면 그중 책으로 만들어지는 콘텐츠는 이제 얼마 되지 않기에 과거처럼 잘 나가는 종이를 미리 쌓아 놓고 판매하기보다 주문에 따라 필요한 양만큼 들여와 거래하게 되었다. 코로나19 같은 급작스러운 변수도 거래량에 영향을 미치지만, 대전 동구의 인쇄업 종사자들에게는 더 오래된 고민거리가 있는 셈이다. 출판 산업 자체의 전망에 대한 문제는 인쇄거리 일대에 끈질기게 그늘을 드리운다.
밖으로 나오니 세대지업 외벽 한쪽에 인쇄특화거리의 일방적 재개발·재건축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해당 재건축 계획은 세대지업과 세대특수지가 있는 대동천 북부교-삼성교 부근을 포함한다. 이에 대해 세대특수지 조 대표가 한마디 덧붙였다.
“대전인쇄거리가 인쇄골목이라고 해서 작은 것 같아도 서울, 대구 다음가는 인쇄특화거리예요. 충남·북, 더 멀리 전라도에서도 여기서 인쇄물을 주문 제작합니다. 대전인쇄거리가 축소되거나 사라진다는 건 주변의 타지역에도 영향을 미치는 일이죠. 이에 대해 충분한 보상이 있을지도 확실하지 않고, 이곳에서 인쇄하는 우리들은 지금 심적인 부담이 아주 커요.”
지역에서 종이를 팔고 책을 만드는 이들에게 인쇄업 종사자로서의 고민은 무겁다. 최근 전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전염병에 한술 더 떠서 재건축 계획이라는 큰 어려움을 만났음에도 불구하고 세대지업과 세대특수지는 대전을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한다. 여지껏 해 왔듯이, 들어오는 주문을 받고 묵묵하게 오늘 인쇄거리에 필요한 종이를 자르고 나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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