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공연 리뷰 - <해녀의 부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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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제주도 공연 리뷰 - <해녀의 부엌>

by 토마토쥔장 2021.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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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공연 리뷰 - <해녀의 부엌>

"이여도 사나 - 이여도 사 - 

이여도 사나 - 이물에랑 - 이사공아 -

고물에는 - 고사공아 - 물때나 점점 늦어나진다 -

이여도 사나 -"

 

글·사진 양지연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는 올해로 90세를 맞은 권영희 해녀 할머니가 계신다.

권 씨 할머니는 이곳 종달리에서 최고령 해녀라는 타이틀을 소유했다. 요즘 해녀는 편하게 물질한다는 권 씨 할머니, 할머니 말씀에서 ‘요즘 해녀’라는 소리를 듣는 해녀는 놀랍게도 현재 70대다.

학교에 다닐 기회가 없던 시절, 여성들은 물질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권 씨 할머니는 요즘은 아무리 촌에 사는 아이들이라도 전부 대학에 가고 각자 배울 것이 많은 시대니, 해녀 일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다며 앞으로 10년, 15년만 지나면 해녀는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말한다. 현재 종달리에서 가장 어린 막내 해녀 나이는 55세다.


 

유네스코 등재했지만

제주 해녀는 하나의 문화로 인정받아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한국의 19번째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서 세계적인 인정을 받는 제주 해녀 문화는 제주 해녀가 가진 기술까지 총칭하는 말로 바닷속에 들어가 해산물을 채취하는 물질, 물속에 들어갈 때 안전을 기원하는 굿, 물질을 나갈 때 부르는 노동요 등을 포함한다.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정작 해녀 할머니는 본인이 걸어온 해녀의 삶을 자랑스러워하기보다 그저 자신의 당연한 삶이었다고,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할 수밖에 없던 일이라고 여길 뿐이다. 그들에게 물질은 그저 초라하고 부끄러운 생업이었다.

 

한 여성으로서 짊어져야 했던 삶의 무게를 ‘해녀의 부엌’에서 150분 동안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청년 예술인 ‘해녀’를 만나다

‘해녀의 부엌’이라는 작품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청년 예술인과 함께한다. 해녀라는 이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기 전에 생존한 해녀 할머니의 자긍심을 높이고 제주 해녀라는 이름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것인지 평생 해녀의 길을 걸어온 할머니에게 일러드리고자 기획하여 이곳 종달어촌계의 해녀와 함께 준비했다. 제주 방언을 쓰는 할머니 말씀을 알아듣는 것조차 힘들었던 청년 예술인의 노력과 따뜻한 마음으로 이 시간을 만들어준 것에 관객으로서 큰 감사를 보내고 싶었다.

 

‘해녀의 부엌’이 펼쳐지는 공간은 해녀와 어부, 바다가 함께하던 곳으로 20여 년 전 생선을 경매하는 활선어 위판장으로 지었지만, 어촌 인구 감소와 판매 비활성화로 어둡고 인적 드문 창고로 변했다. 청년 예술인이 모여 해녀 극장식 레스토랑으로 재탄생시킨 공간에서 해녀의 실제 삶이 담긴 연극을 공연하고 공연이 끝나면, 해녀가 직접 채취한 해산물과 물질을 안 할 때 가꾸는 텃밭에서 난 농산물로 만든 음식을 대접하며 제주 해녀의 이야기를 관객에게 선사한다.

 

 

“욕심내멍 죽고 사는 건 사람 일이라. 살리는 건 바다 몫이고.”

 

“숨 붙어 있을 때 꼭 나오래이. 명심해라, 야.”

 

10세의 나이에 물질을 배우기 시작하여 89세까지 해녀의 삶을 살아온 권 씨 할머니는 할머니의 어머니께서 누누이 말씀하신 한 문장으로 80여 년의 해녀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년에 한 번, 바다에 나가는 사람은 삼삼오오 모여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해상 안전 및 마을 주민의 복락을 기원하는 해신제다. 수십 년간 물질한 베테랑 해녀라 할지라도 파도와 물살이 센 날은 물질을 나갈 수가 없다. 권 씨 할머니는 다 물때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권 씨 할머니는 10세의 나이에 박 속을 슥슥 긁어낸 빈 박을 물에 띄우고 해먹과 물질을 배워 15세부터는 물질로 돈을 벌기 시작했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했던 해녀에게 제주 지역을 벗어나 원정 물질을 나가는 것은 흔한 일이었는데 통영과 부산 등 남해 지역부터 더 멀게는 강원도, 북한, 홍콩, 일본까지도 원정 물질을 나가고는 했다. 권씨 할머니도 젊은 시절, 6년간 원정 물질을 다녔으며 보통 10년에서 15년 정도 원정 물질을 다녀온다고 설명했다.

 

 

강인한 해녀의 삶

물질을 80여 년 해온 권 씨 할머니는 해녀의 삶에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해녀복이라고 말했다. 요즘 해녀복은 4시간까지도 물속에서 체온을 유지하며 거뜬히 버틸 수 있게 하지만 권 씨 할머니가 42세까지 물질을 나갈 때 입은 옷은 얇은 천 한 장뿐이었다. 해녀의 작업복이라고 하기에도 무리가 있는 얇은 홑옷은 단지 몸통만 가릴 뿐 팔과 다리가 노출되는 형태로 이를 걸치고 물에 들어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40분이었다. 옷의 색도 검은색 고무인 요즘의 해녀복과 달리 하얀 천으로 만들었다.

 

 

심지어 당시 해녀는 만삭의 배를 하고도 물질을 나가야 했는데 물속에서 진통이 시작되면 양수가 터지기 전에 급히 물 위로 올라와 손을 흔들며 도움을 청하는데 주변에 있던 고기잡이배가 다가와 물 위로 끌어 올려 출산을 도왔다고 한다. 급하면 생선을 써는 칼로 배를 째서 배 속의 아이를 꺼냈고 육지로 노를 저어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산모와 태어난 아기의 생명이 위험한 적도 많았다고 한다. 여기서 끝이 아니라 출산을 하고 난 해녀에게 몸조리를 할 수 있는 시간도 얼마 주어지지 않았다. 단 열흘 만에 또다시 바다로 나가 물질을 했다.

 

 

때로는 같이 바다에 나간 친구를 불의의 사고로 눈앞에서 떠나보내야 했다는 다른 해녀 할머니의 이야기도 관객의 가슴을 뜨겁게 울렸다. 물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도 물로 돌아가야만 하는 삶이었다. 해녀의 부엌에서는 자신이 겪는 고통보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짐의 무게가 더 무거웠던 한 해녀의, 한 여성의, 한 사람의 인생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관객은 한 여성이 살면서 짊어온 책임감에 감동하며 부디 오래 건강하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힘찬 박수를 해녀 할머니에게 보냈다.

 

 

버티는 모습이 해녀와 닮은 제주 뿔소라

‘해녀의 부엌’에서는 뿔소라, 군소, 톳, 우뭇가사리 등 해녀가 직접 채취한 해산물로 만든 요리를 맛볼 수 있는데 특히 뿔소라는 제주 어촌계의 자랑거리다. 껍질에 뿔 모양의 길고 단단한 가시가 많은 뿔소라는 제주 바다에서만 매년 2000t을 생산한다. 육지에서 보는 소라와 달리 특이한 모양을 한 뿔소라는 현무암의 구멍 속에 뾰족한 뿔을 끼워 넣어 제주의 거센 물살과 파도에서 살아남는다고 해녀 할머니는 설명한다.

 

하지만 제주에서 나는 뿔소라의 80%는 일본으로 수출해 수출 의존도가 매우 높아 그 가치가 하락하는 실정이다. 제주 해녀들은 제주 특산품인 뿔소라가 국내 소비시장에서 그리고 나아가 전 세계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기를 바라고 있다.

 

뿔소라에 이어 군소 또한 제주 해녀들이 아끼는 해산물로 꼽힌다. 이름도 생소한 군소는 해녀 사이에서도 귀하기로 유명해서 채집한다고 하더라도 이는 가족과만 나눠 먹는다고 한다. 음식점에서도 잘 볼 수 없는 군소를 맛볼 수 있는 것은 해녀의 부엌을 찾아온 이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권한이다.

 

 

이여도사나

‘해녀의 부엌’ 관객으로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 한 가지 더 있다. 종달리의 최고령 해녀 권영희 할머니의 노래를 직접 들을 수 있다. ‘이여도사나’는 해녀들이 바다로 물질을 나갈 때나 다시 뭍으로 돌아올 때, 노를 저으며 부르던 대표적인 노동요다. 이토록 한 직업의 애환을 담아낸 소리가 있을까. 권 씨 할머니는 요즘 해녀의 부엌에서 관객과 소통하는 시간을 가지며 많이 행복하다. 공연 말미에는 마지막 피날레로 해녀의 노래 두어 곡을 관객에게 더 들려주었다.

 

150분 동안 해녀 할머니의 삶을 들여다본 관객으로서 할머니의 가락에 박수로 장단을 맞추며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시기를 바랐다.

 


 

<해녀의 부엌>

위치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477-16

공연 시간 : 금~일 1일 2회(오후 2시 / 오후 5시 30분)

haenyeokitchen.com/

 

해녀의부엌

국내 최초 해녀 극장식 레스토랑. 해녀가 차려주는 식사와 공연

haenyeokitch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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