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는 굴레, 시인은 행복할 수 없는 사람 - 나태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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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는 굴레, 시인은 행복할 수 없는 사람 - 나태주 시인

by 토마토쥔장 2021. 5.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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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는 굴레, 시인은 행복할 수 없는 사람

- 나태주 시인 -

 

글·사진 박숙현

나태주 시인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풀꽃>



전통 서정시를 대표하는 나태주 시인과의 만남은 의외의 연속이었다. 그의 시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울 거로 생각했던 인터뷰는 탁구 같았다. 

 

인터뷰는 짧게 전투적으로 한다.”라는 그의 말마따나 나 시인은 기자의 질문에 빠르고 정확하게 대답했다. 

 

치고받고 해야 속에 있는 것이 탁 나오면서 해결이 돼요. 짧게 결판 보죠. 근데 오늘은 좀 길게 하네.”라고 웃음기 없이 말한다. 

 

그러면서 “기사를 전투적으로 써 달라.”라고 덧붙인다. 

 

진지하게 말하는 나 시인을 유심히 바라보니 입가에 살짝 미소가 서려있다. 그 모습에 친근한 느낌이 들 쯤 

가능하면 시인이 안 되는 게 좋아요.”라는 말로 또 한 번 놀라게 한다. 

 

시인은 불행하다는 나태주 시인. 그는 왜 시인이 행복할 수 없다고 했을까. 

 




시인은 외톨이, 아웃사이더


어릴 적 그는 외톨이었다. 주변과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 소위 말하는 ‘왕따’였다. 고독한 문학소년을 생각했지만, 왕따일 줄이야. “왕따요?”라고 조심스럽게 되묻자 “왕따가 지금만 있는 게 아니에요. 옛날부터 있었죠.”라며 웃는다. 그러면서 시인들의 남다른 성장 과정에 대해 말한다. 

 


“시인들을 보면 어렸을 때 색다른 성장 과정이 있어요. 대게는 외롭고 쓸쓸한 환경 속에서 성장해요. 

주변 환경, 사람, 자연에 어울리지 못하죠. 그런 어울림에 서툴러서 늘 고민하고 힘들어하죠.”

 


그때 찾는 게 문학이다. 필연적으로 문학을 찾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시인에게 있단다. 그리고 아웃사이더야만 하는 게 시인이다.

 


“시인의 본분이 아웃사이더에요. 역사와 사회의 아웃사이더야 하죠. 

남이 보는 걸 보는 게 아니라 그 바깥을 빗겨서 봐야 하죠.”


이번에 발표하는 <골목길>이란 시가 그렇다. 대구중학생 자살 사건을 보며 쓴 시는 그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그것의 변두리에 변두리를 쓰고 싶었다는 그의 말처럼 시는 사건을 전혀 다루지 않았다.

 


“시인은 마치 맹금류처럼 먼 하늘에 떠서 봐야 해요. 

맹금류가 하늘에서 지켜보다가 먹이를 낚는 것처럼 핵심을 줌으로 당겨서 자세히 보죠. 

근데 요즘 시인들은 매크로와 마이크로를 몰라요. 그저 현실 문제를 지나치게 가깝게 그리려고 해요.”

 


시에서 시인은 주역이 돼서는 안 된다. 시선(詩仙)이라 불리는 이태백과 시성(詩聖)이라 불리는 두보도 주역이 아니었다. 랭보가 말했듯 시인은 그저 견자, 보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슬프다.

 


“연애 시를 쓸 때도 마찬가지예요. 

시인은 자기 연애조차도 구경해야 해요. 

그래야 연애 시가 나오죠.”

 

 



시인, 평생 거울을 보는 사람 


처음 그가 시를 쓰게 된 건 실연 때문이다.

 


“실연이라는 시련을 당해서 시를 썼죠. 

감정의 시련, 인간의 시련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과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 시에요. 

그리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도구가 자연이에요. 

사람으로 해서 생긴 상처(실연)는 사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택한 방법이 자연이죠.” 

 


흔히들 그의 시가 사랑과 자연을 얘기한다고 하지만 그는 ‘실패한 사랑’을 노래한다. 그 사전에 ‘실패하지 않는 사랑’은 없다. “사랑이 이루어지는 일도 있지 않나요?”라는 반문에도 사랑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고집한다.

 


“사랑은 두 존재가 하나가 되는 것이에요. 영혼의 합일이죠. 

이게 인간세계에서는 불가능해요. 내가 좋아하는 걸 그도 좋아하기가 쉽지 않죠.”

 


그러면서 하는 말이 또 놀랍다. “우리 마누라는 내가 좋아하는 여자를 미워하지 않아요.”란다. 살짝 놀라 “기사에 써도 되느냐.”라고 확인하는 기자에게 나 시인은 “우리 마누라가 나보다 더 높은 사랑을 하는 거.”라며 꼭 써 달란다. 그 이유에 대해 물으니 여자라서 그렇단다.

 


“나를 불쌍히 여기는 거죠. 

여자는 정서적으로, 영혼적으로 남자보다 진화한 인간이에요. 

여자의 사랑에는 모성적인 사랑과 이성적인 사랑이 합쳐져 있죠.

든 여자는 이성으로만 사랑하지 않아요. 모성적으로 사랑하죠.”

 


그래서 그는 여자의 마음으로 시를 쓴다. 시를 쓸 때 영감은 사람, 자연, 일 등 주변 모든 것에서 받는다. 자다가도 시상이 떠오르는데 그럴 땐 침대에서 일어나 써야지 직성이 풀린다. 시인은 ‘기록하는 자, 소리를 듣는 자’이기 때문이다. 

사물에서도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그건 사물의 소리가 아니다.

 

 


“시인 내면의 소리에요. 

그래서 시인은 자기를 둘로 나누는 연습이 필요해요. 

듣는 자와 말하는 자, 보는 자, 보이는 자. 시인은 자기한테 묻고 답하는 거예요.”

 


그래서 시인은 평생 거울을 보는 사람이다. 끝까지 자신의 내면을 보고 말하기 때문이다. 

 


“시인은 같은 얘기를 계속합니다. 동의어 반복이죠. 

이모를 엄마의 언니, 외삼촌의 여동생 같이 말하듯이 하고 싶은 얘기를 다르게 표현하죠. 

래서 끊임없이 자기가 자기를 관찰해야 해요. 

 

그래서 시인은 예민하고, 신경질적이고, 변덕이 심하고, 간사하죠. 

그래야 시인이에요. 

작은 것에 지배당하고 반응해요.” 

 




시라는 굴레, 시인이라는 숙명


시인의 삶은 운명이 아닌 숙명이었다. 운명이 태어난 다음에 피치 못할 거라면 숙명은 태어나기 전부터 피치 못한 규제이며, 굴레다.

 


“평생 글을 쓰는 사람은 써야 할 까닭이 있어서 써요. 

시켜서 쓰는 게 아니라 공의적인 목적이죠. 

돈이나 현실적인 필요가 아니라 내면의 욕구에 의해서 써요. 

그래서 시를 쓰는 건 숙명이에요.”

 


그것이 아니면 안 되는 것, 다른 것으로 해결이 안 되는 그게 바로 ‘시’다. 그래서 그는 죽을 때에도 시를 쓸 거란다. 

이번에 내는 시집이 벌써 33권 째일 만큼 다작하며, 이미 널리 알려진 나태주 시인이지만 그는 스스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시인도 스스로 유명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소외됐다고 생각하고 평가가 덜 됐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섭섭하다고 느끼죠. 

 

그래서 시인은 행복할 수 없어요.”

 

 

계속해서 행복하지 않다는 소리를 들으니 그가 생각하는 행복이 궁금해지기 마련. 도대체 행복이 뭐란 말이냐. 나태주 시인은 “행복은 작은 것에도 만족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헌데 시인은 그럴 수가 없어서 불행하다.

시인이 행복하려면 시를 쓰고 나서 행복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다. 

 


“시를 쓰고 나면 복잡해요. 

행복이라기보다는 나타내고 싶어 했던 욕구, 감정, 영혼을 시로써 비교적 근접하게 표현했다는 약간의 만족이죠. 

시로 표현해야 한다는 구속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 그리고 정서를 표현했다는 성취감이죠.”

 


행복하지 않은, 심지어는 불행한 시인,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버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시는 암적인 존재에요. 

나하고 다른 독립된 생명체죠. 

하지만 ‘불행해서 안 해야지.’가 아니에요. 

암환자가 암과 함께 살 듯 시인은 시를 데리고 살죠. 

그게 시인의 숙명이죠.”

 



비록 시인이 삶은 행복하지 않지만, 자연인 나태주는 젊은 시절 꿈을 다 이뤘다. 그의 꿈 세 가지는 시인이 되는 것, 여자한테 장가가는 것, 공주에 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젊은이에게 “꿈을 꾸라.”라고 말한다. 꿈은 꾸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꿈을 남한테서 찾지 말고 나한테서 찾으면 돼요. 

 

성공 개념이 아니라 완성 개념으로 보면 돼요. 

 

성공 개념은 너와 나를 비교하지만, 완성은 나 혼자도 할 수 있어요. 

 

땅을 200평 가지고 있다면 400평 가진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내가 생각한 200평을 만들어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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