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빙자 인생만화 - 웹툰작가 '소만'
글·사진 김예인
친구들과 만화책을 서로 돌려가며 보고, 다음 권 누구한테 있냐며 행방을 찾던 시절을 기억한다. 시간이 지나며 인터넷으로 들어온 만화는 웹툰이 되었고 나는 고등학생 때 처음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재미있어서 보게 되었지만, 지금은 다른 이유가 생겼다. 웹툰 속 인물의 대사가 힘과 위로를 줬고 이해되지 않던 다른 이가 이해되는 경험도 했다. 사람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진 것이다. 로맨스 웹툰일 경우 약간의 대리 만족도 함께. 웹툰을 챙겨보는 사람으로서 웹툰 작가의 삶이 궁금했고 작품을 통해 무얼 말하고 싶은지 듣고 싶었다.
지난 4월 대전웹툰캠퍼스 입주 작가 천정연 작가를 만났다. 천정연 작가의 필명은 ‘소만’으로 삶이 소소하고 충만하기를 바란다는 마음으로 지었다. 현재 육아 웹툰 <봄이와> 시즌 3을 네이버 베스트 도전에서 연재 중이고 여성신문에서는 연재 완료하였다. <봄이와>는 1-탄생편, 2 –정글편, 3-독박 말고 독립까지 총 세 시리즈가 나왔다.
<봄이와>의 시작
서울 마포구에 있는 성미산학교(대안 학교)에서 교사로, 바보들꽃(NGO)에서 네팔 어린이를 위한 교재 만드는 일을 했던 그녀는 결혼하며 남편을 따라 대전으로 왔다. 아이를 낳으니 일을 할 수 없었고 독박 육아를 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냈다. 낙서하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해서 아이를 관찰하며 그리기도 하고 재밌는 일이 있으면 메모하며 지내다가 난다 작가의 ‘어쿠스틱 라이프’라는 웹툰을 소개받았다. 그전까지는 웹툰에 관심이 없었지만 ‘어쿠스틱 라이프’를 보고 틀에 박히지 않은 그림체와 톡톡 터지는 위트에 신선함과 재미를 느꼈다. 자연스럽게 ‘나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다.
“봄이가 뒤집기를 할 때였어요. 그저 젖만 먹였을 뿐인데, 누가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혼자 돌아누워 있는 게 너무 신기했어요. 한 생명이 성장하는 순간을 목격한 거죠. 생명이 이렇게 성장을 하는 구나를 깨달았는데, 이게 잊히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봄이가 빨대 물컵을 처음 사용할 때, 컵을 좋아하던 순간 모두 소중해서 그 순간을 기억하고 싶고 붙잡아놓고 싶었거든요. 사람들도 그래서 사진을 찍잖아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그림이니까 저는 그림을 그린 거죠.”
처음에는 페이스북과 블로그에 웹툰을 올렸다. 그걸 본 남동생은 네이버 웹툰을 추천했고 네이버 도전 만화에 연재를 시작했다. 반응이 좋아 베스트 도전으로 올라갔고 지금까지 시즌 3을 연재 중이다. 베스트 도전에서 연재하려면 도전 만화에 올라온 웹툰을 네이버 운영자가 베스트 도전으로 승격시켜주어야 가능하다. 시즌 1, 2를 베스트 도전에 연재한 뒤 손에 잡히는 책으로 만들고 싶어 직접 책 샘플을 만들었다. 그때 지인을 통해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주최하는 ‘2018년 기술혁신형 창업기업 지원사업’ 소식을 들었다. 이틀 뒤 마감인 창업지원금을 신청했고 직접 만든 책을 낼 출판사를 만들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 결과 선정되었고 4,000만 원을 지원받아 1인 출판사를 창업했다. 그림, 글, 그리고 책 편집 디자인까지 직접 하여 2019년에 「봄이와」 단행본 1, 2권을 출간했다. ‘나도 한 번 해볼까’라는 가벼운 시작은 웹툰과 단행본이 되었다.
놓을 수 없는
책을 낸 무렵 대전웹툰캠퍼스에서 입주 작가를 모집했다. 소만 작가는 출판한 작가로 해당되어 웹툰캠퍼스 입주 작가가 되었고 생애 최초로 작업실이 생겼다. 작업실이 생기기 전에는 아이를 보며, 아이를 재워놓고 작업했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텐데 작업은 어떻게 진행된 걸까?
“아이 돌보미 선생님이 오셔서 거실에서 아이를 봐주셨어요. 그때 저는 방에서 작업했고 작년 3월부터 웹툰캠퍼스에서 작업하기 시작했어요. 낮에 돌보미 선생님께서 아이를 봐주실 동안 작업실에 나와 작업을 하고 집에 돌아가서는 아이를 봤어요.”
아이를 보며 작업도 하고, 살림도 해야 하니 언제나 시간이 부족했다. 이게 워킹맘의 공통된 어려움이다.
“아이를 키우는 것과 일, 살림 중 그 어느 것으로도 수입이 나지 않으니 책을 내기 전까지 힘들었어요. 남편은 야근이 많았고 칼퇴근 할 수 있는 직장이 아니어서 제가 1인 4역, 5역을 하며 다 감당했죠.
‘그냥 애만 키우면 되잖아?’ 이렇게 물을 수도 있는데 애만 키우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직장 다닐 땐 나의 유용감을 느끼며 일하고 인정도 받았는데 아이만 키울 땐 자기 효능감을 느낄 수 없었어요. 그런데 만화를 구상하고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어서 완성했을 때 희열이 느껴지더라고요. 그때 살아있는 것 같아서 육아와 작업 병행이 힘들어도 만화를 놓을 수 없었죠.”
대전여민회(여성단체)에 취업 후 풀타임으로 일하는 게 어떻냐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아직 만화를 포기할 수 없어서 파트타임으로 일했다. 두 권의 단행본을 둘째 숲이를 낳기 직전까지 만들었고 출간 후 아이를 낳으며 육아 휴직에 들어갔다.
육아빙자인생만화
<봄이와>에는 결혼과 육아에 대한 환상 속 얘기가 아닌 현실에 직면한 문제와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작가는 훈육의 어려움, 가사 분담, 부부 싸움, 둘째 고민 등 힘든 것은 힘든 대로, 사랑스러운 것은 사랑스러운 대로 받아들였다. 시즌 2 육아우울증 편에는 “그 무렵 나는 마치 시한폭탄 같았다. 나는 뭐가 그리도 화가 난 것일까. 이대로 괜찮은 걸까... 나름 고운 성정을 지녔다고 자부했는데. 작년엔 가끔 화난 적은 있어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내가 미쳐가는 건가. 봄이가 잘못되면 어떡하지. 모든 게 엉망진창이야.”라는 글이 있다. 작가의 심경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솔직함이 주는 위로는 크다. 내 힘듦을 저 사람도 안다는 걸 본 독자는 공감과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시즌 1은 봄이의 탄생과 경이로움, 놀라움, 신비로움의 감정이 주를 이루고 있다. 시즌 2는 아이는 계속해서 사랑스럽게 성장하지만, 엄마인 ‘나’의 상황은 왜 이렇게 우울하고 화가 나는 일이 많은지, 이 두 가지 틀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시즌 3에는 남편이 실직한 뒤 소만 작가가 취업하게 되고, 창업까지 한 작가의 이야기와 독박 육아를 극복하려 했던 작가의 노력을 담았다.
“결혼 전 대안 학교 교사와 NGO 활동 같은 제게 의미 있는 일을 했는데 남편이 결혼할 때 ‘너는 하고 싶은 거 해. 돈은 내가 벌게’라는 말을 했어요. 그때 저는 내 삶을 깊이 이해해주는 남편의 크나큰 사랑 고백이라 생각하고 생계에 대한 고민 대신 의미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돌아보면 그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몰랐던 거죠. 상대방이 경제적인 짐과 책임을 질 때 양육, 육아, 가사가 나의 몫이 되는 일종의 암묵적 합의인데 우리 삶에서는 그게 괄호 처져 있거든요. 남편이 돈을 벌어오니 (나머지 일은 내가 하는) 근데 이 노동은 작지도 않고 돈도 받지 못하는데 동시에 나는 의미 있는 것도 해야 하는 거예요.
남편의 말 이면에 있는 의미를 몰랐던 거죠. 남편이 그걸 의도한 건 아니지만, 우리 사회에서 그 말엔 이런 의미가 숨어있었던 거예요. 남편에게 가사 분담을 요구할 때 당당하지 않은 이유는 돈 버는 일을 남편에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어요. 남편의 실직을 직면한 후에 알게 된 거죠.
그래서 남편에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서서 자존을 지킬 수 있을 만큼의 돈은 벌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창업과 취업을 시작했어요.”
이제는 ‘독박’이 아닌 ‘독립’을 하고 싶다는 작가의 몸부림이 시즌 3에 담겨있다. 아이의 탄생은 축복이고 행복이지만 그것만이 아니라 특별히 여성이 처하는 처지는 달라진다는 것. 우리 사회에서 결혼과 출산, 육아를 거치며 다른 지위로 가게 되는 구조적 문제를 시즌 3에서 본격적으로 다뤘다. 작가는 본인의 만화를 ‘육아빙자인생만화’라고 했다. 육아를 얘기하긴 하지만 사실 인생을 얘기하고 싶은 그녀의 마음이 느껴졌다.
<봄이와> 시리즈는 메인 색과 검은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색이 가진 의미가 있다. 시즌 1은 생명 탄생의 경이로움이 느껴지는 분홍계열, 2는 작가의 우울한 시기를 느낄 수 있도록 파란 계열의 색을 사용했고 시즌 3의 보라색은 페미니즘을 상징하고 있다. 색을 통해 작가 의식의 흐름을 엿볼 수 있다.
부부 사이 갈등, 육아하며 생긴 고민을 불특정 다수에게 나누기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떻게 털어놓게 된 걸까? 소만 작가는 모두가 본인과 같을 것 같았다고 했다. 독박육아를 하며 어디 도움 청할 곳도 없고, 대전에 아는 사람도 없어서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는데 다른 사람도 이렇게 힘들어하고 있을 것 같았다. 누군가도 비슷한 고통과 변화, 놀라움을 경험하고 있을 것 같아서 본인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 그랬고 아이 키우는 엄마, 아빠들이 공감받고 위로받았다는 얘기를 들을 때 만화 그리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내 얘기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내가 하는 일이 좋은 영향을 준다면 너무 기쁘죠. 힘들게 만화 그리는 일을 유지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는 일이니, 책임감과 선한 영향력을 생각하게 돼요.”
마음속 울림
소만 작가는 본인의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위로가 될 줄 알았을까? 만화가 좋아서 조금씩 그린 그녀는 무슨 결과를 만들지 사실 잘 몰랐다. 그렇지만 찾고 있는 무언가가 그곳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늘 할 수 있는 한 걸음을 걸었다. 그 걸음이 모여 에너지를 쏟을 수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게 했다.
되돌아보면 그녀는 늘 생활비, 학비 걱정하며 살았었다. 생계의 무게가 절대 가볍지 않았기에 마음의 소리를 잘 못 들었던 시기가 있었다. 그림을 그리고 싶었는데 돈이 안 되고 안정적인 삶을 살기 어려우니 일반 대학에 진학했고 취직했다. 일이 맞지 않아 죽을 것 같았지만 이대로 그만두면 어디서도 어려움을 견디지 못할 인간인 것 같아 속이 쓰렸다. 어차피 인생이 이렇게 고통이라면 한 번쯤은 해보고 싶은 걸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다니던 직장을 그만뒀고 그녀 나이 27살에 미대로 편입해 미술 공부를 시작했다. 그녀는 그렇게 한 걸음씩 용기 내 앞으로 나아왔고 지금에 다다랐다.
“꼭 전형적인 경로를 따라가야 한다는 부담감을 가지기보다 자기 길을 갔으면 좋겠어요. 불안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쓰지 말고 오늘 내 마음을 울리는 무언가에 집중하길 바라요. 자기를 외면하고 소외시키지 않았으면 해요. 방법은 있으니 쉽게 접지 많고 자기 마음을 두드리는 게 있으면 해봤으면 좋겠어요.”
실패와 실수가 쌓여서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소만 작가. 안정된 기반을 쌓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 중요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지만. 자기를 외면하고 자기를 소외시키지는 않았으면 좋겠는 마음이다. 그녀의 삶 이야기가 나에게 도전이 됐다. 내 마음을 울리는 그 무언가를 외면하지 말고 가만히 들여다보려 한다. 사람들에게 위로가 된 그 첫 시작이 마음속 울림이었으니.
<봄이와> 시즌 1 다크나이트 편에 이런 글이 있다. ‘그러니 봄아, 가끔 엄마가 알 수 없이 슬픈 눈을 하더라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란 걸 기억해 주었으면 해.’ 나를 키우던 엄마의 마음이었을 것 같아 눈물이 났다. 작가는 엄마가 될 분들에게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과 알 수 없는 슬픔, 이 두 가지 마음이 들더라도 스스로를 탓하거나 책망하지 마시라는 말을 전했다.
소만 작가와 나눈 많은 얘기는 언젠가 내가 엄마가 되었을 때 문득문득 생각날 것이다. 먼저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 그녀의 삶을, 그리고 아이 키우는 모든 이들의 삶을 응원하고 존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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