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물 아래 또 다른 강물이 흐르듯이 - 김채운 시인
글·사진 황훈주
공심채 볶음은 베트남에서 배웠다. 그들은 모닝글로리라고 했다. 베트남을 다녀와서도 한동안 공심채 볶음을 해 먹었다. 26살때 일이다. 지금도 공심채 볶음을 해 먹을 때면 나는 베트남을 생각한다. 엄마와 처음 간 해외여행이었다. 엄마는 나팔꽃을 키웠다. 엄마는 아파트 작은 베란다에 나팔꽃을 키웠다. 내가 아직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이었을 거다. 엄마는 아마 나에게 꽃을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잊고 있던 기억인데 시를 읽다 문득 선명히 그날 기억이 떠올랐다. 시는 다섯 줄밖에 안 됐다. ‘아침이 저물었습니다’로 시작하는 이 시의 부제는 ‘나팔꽃에게’다. 시가 마음에 들어 나팔꽃에 대해 찾아보다 나팔꽃이 영어로 모닝글로리란 걸, 공심채와 나팔꽃이 학명이 비슷하단 걸 알게 되면서 어릴 적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팔꽃이란 단어는 어릴 때 알았지만 그 뜻은 29년이 지나 이제야 좀 더 선명해졌다. 시집을 읽으며 인터뷰를 준비하다 마음이 먹먹해졌다.
1. 타인에게 다가가는 것
시인 인터뷰를 준비하는 건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과 같다. 시인의 시집을 몇 번이고 뒤적였다.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이토록 노력한 적이 있었나. 시는 내게 익숙한 단어를 낯설게 만들곤 했다. 그 시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떤 경계에 선 느낌이다. 김채운 시인의 시집 《너머》는 그렇다. 내가 알았던 익숙한 풍경이 다시 새롭게 다가온다.
"시를 읽다 보면 어디를 지나며 시를 썼을지 상상하곤 했어요. <경계에서>를 읽으면서는 은행동 지하상가 내려가는 계단이 떠올랐어요."
“맞아요. 우리가 쉽게 만나고 지나칠 수 있는 풍경들이죠. <경계에서>는 지하도를 내려가는 길에 쓴 시에요. 우리가 흔히 지하도를 내려가면서 마주친 동냥 바구니를 가지고 계신 분들을 보며 쓴 시죠.”
<경계에서>는 이렇게 끝난다.
일상이 스미지 못하는
지하와 지상 그 틈바구니에서
나 여전히 서성이고
나 또한 지하상가 지하도를 내려가며 몇 번이고 지나친 풍경이다. 시인은 그 풍경 속에 서성인다. 순간을 그냥 지나치거나 혹은 멈추거나. 일상에서 어떤 시선을 가졌는지에 따라 일상은 작품이 되기도 한다.
《너머》 시집은 첫 시집 《활어》가 나온 후 9년이 지나 출간했다.
“시는 살을 채워가는 작업이에요. 시 중엔 6개월이 지나도 완성하지 못하는 것도 있죠. 가끔은 내가 죽으면 미 발표한 시가 남아 부끄러워질까 봐 걱정되기도 해요. 적당한 시어를 찾기 위해 계속 고치죠. 시집이 늦게 나왔으니 게으른 시인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그래도 변명하자면 바빴어요. 아이도 키우고 박사 학위도 준비하고 있었고요.”
시는 빠르게 써지지 않는다. 김채운 시인은 <큰시> 동인으로 활동한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쓴 시를 서로 합평한다. 시인에게 가장 치열하고 무서운 순간이기도 하다. 가끔은 완전한 시를 쓰지 못해 합평 때 시를 꺼내지 않을 때도 있다. 개인적 감정을 담을 적절한 시어를 찾아야 하고 또 개인의 경험이 보편성을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런 고민을 하며 삶이 녹아든 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김채운 시인이다.
“전 시집보다 더 나은 시집을 만들어야죠. 과거와 비슷한 시를 쓰는 건 자기 표절 같다 느껴요. 내 중심을 가지고 계속 변화하는 시를 써야겠죠.”
자기 표절이란 말이 마음에 남았다. 시인은 결국 자기가 만든 세계를 계속 부수고 재창조해야 하는 일인가 보다. 매번 새로운 시각은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저는 예전엔 글을 쓸 땐 새로운 말들이 떠올랐는데 요즘은 계속 썼던 표현을 반복하는 느낌이 들어요. 내 안을 채우던 말들을 다 쓴 느낌인데 매일 같은 일상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찾기가 어렵더라고요.”
“예민한 감각을 가지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청각이 예민한 사람은 남들은 똑같이 듣는 소리 속에서 다른 것을 찾고, 시각이 예민한 사람은 같은 풍경 속에서 다른 걸 찾듯이 말이에요. 또 같은 모습을 본다고 해도 3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경험한 것도 주변 환경도 달라져 있잖아요. 그런 것처럼 계속 발전하는 글을 쓰기 위해선 나 자신도 계속 성장해야 하겠죠.”
그녀의 말을 들으면서 무엇을 보는 것보다 내가 무엇이 되었는지가 중요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2. 강물 아래 또 다른 강물이 흐른다
“대전은 서울에 비하면 평온해 보여요. 하지만 이 안에서도 티는 안 날진 몰라도 여러 활동이 이뤄지고 있죠. 정태춘 씨의 ‘강물 속에 또 다른 강물이 흐른다’는 말처럼요. 참 시같은 가사죠.”
김채운 시인은 더는 서정시를 쓸 수 없는 시대인 것 같다는 말한다. 작가 개인의 작품 활동을 계속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엔 지금의 시대를 못 본 척할 순 없다고 한다.
“현실을 도외시한 채 자신만의 작품 세계에 주의를 기울이고 파고드는 건 비겁한 것이 아닌가 생각을 지속해 왔어요.”
그녀는 삶의 현장에서 현장 시를 쓰며 함께한다. 현장 시. 여러가지로 뜻을 말할 수 있겠지만 그녀의 말을 빌리면 ‘문학의 현실 참여 방식 중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행동을 끌어 내는 살아있는 목소리'라고 한다. 시위 현장 무대 중심에 서서 시를 낭독하며 대중의 마음을 움직이는 모습을 티브이에서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이 내가 바라봤던 현장 시였다. 그럼에도 사회 참여 현장에 시인이 있다는 생각해보지 못했다. 시인은 그저 현장을 바라보며 가슴을 앓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펜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위치에서 자신의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최근 3월 7일, 대전역에서 미얀마 민주화 운동 지지 행사에 함께 참여하기도 했다.
“시인으로서 책임 의식을 느껴요. 시인으로 대접받는 데, 시인으로 더 예민하게 느끼는 부당함과 잘못된 것이 있다면 시인의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생각해요.”
현장시를 쓰며 주변 지인으로부터 ‘거리의 촛불시인’이라는 소리도 들었다. 대전작가회의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선배 시인의 적극 추천에 용기 있게 나선 것이 시작이었다. 촛불집회가 있을 때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 가결이 발표되었을 땐 3-4시간 밖에 없는 짧은 시간에 떠오르는 시를 써 낭독하기도 했다. 2019년엔 민족문화연구회에 참여하여 친일문학 청산을 위한 활동도 이어간다. 높은 권위를 가지고 있는 미당문학상, 동인문학상. 그러나 굳이 친일을 한 작가의 이름으로 권위 있는 문학상을 주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문학상 폐지를 외친다. 현재 미당문학상은 폐지되었으나 아직 동인문학상은 운영 중이다.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물론 서울에서 볼 땐 그저 지방에서 일어나는 작은 소란처럼 별 신경 쓰지 않을진 몰라요. 또 유명하지 않은 시인이 하는 비주류 집단으로 볼 수도 있어요. 지방에 있으면서 소외감을 느끼기도 하죠..”
문학도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보니 문학 환경이 열악한 지방에서 목소리를 높여도 소외된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작가 개개인이 주체적으로 자생력을 키워가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 말했다. 강물 속에도 강물은 흐른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움직임이 있기에 물이 고이지 않듯 김채운 시인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꾸준히 발로 뛰며 열심히 활동 중이다.
“지금 내가 선 곳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
3. 낮은 곳에서 오래된 미래를 바라보기
나른한 봄, 오후 두 시. 버스에서 급히 내리는 모녀를 우연히 봤다. 소변이 급했던 꼬마 아이를 어찌하지 못하고 급히 산수유나무 아래로 데려가는 모습. 그리고 급히 사라지는 모녀. 그 순간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녀는 시를 썼다. 김채운 작가 《활어》 시집에 있는 시 중 <오후 2시>에 대한 이야기다.
“저도 두 아이를 키웠잖아요. 여자아이를 데리고 장거리 여행을 가려면 그 난감함을 알거든요. 그 순간의 모습을 보면서 저도 공감했던 거죠.”
결국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타인을 관심 있게 바라볼 줄 아는 것. 그것이 시를 쓰는 시작이다. 그녀의 시에는 하나하나 모두 사연이 담겨 있다. 마주치는 상황 속 어떤 시선을 가지고 어떤 마음으로 타인에게 다가갈 것인가. 그 태도에 따라 시인의 시가 탄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 시는 낮은 곳, 취약한 곳에 시선이 머물러요. 저는 서정이 오래된 미래 같아요.”
시의 본질은 인간의 감정을 그리고 정서를 담아내는 서정성에 있다고 믿는다.
서정을 노래하는 시야 말로 가장 오래되었지만 가장 나중까지 남을 미덕일 것이기에 김채운 시인은 ‘서정은 오래된 미래’라고 말한다. 브레히트는 서정시를 쓰기엔 세상에 너무 많은 아픔이 있기에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라 했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삶의 태도에 따른 삶의 행복을 말하며 ‘오래된 미래’를 말했다. 김채운 시인은 구호에 가까운 현장 시에서도 일정 부분 서정성이 담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녀는 이 힘든 시대에 시를 노래하며 더 나은 삶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낮은 자의 편에 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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