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노래한 힙합전사, 45RPM 故이현배 씨를 기억하며
'희망'을 노래하다 - 45RPM
글 점필정 사진 이용원, 점필정
형이 자동차를 사라고 준 돈으로 클럽을 차렸다. 사람들에게 랩을 들려줄 수만 있다면, 만두가게 앞에서 1시간 넘게 떠드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2만 원짜리 공연을 위해 10만 원을 들여 서울에 다녔다.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익숙한 멜로디. 주저리주저리 내뱉는 이들의 랩에는 만만찮은 삶의 무게가 실려 있다. 그러면서도 희망과 꿈을 놓고 있지 않은 게 이들의 음악이다.
45RPM.
DJ가 사용하는 턴테이블에서 음반이 1분 동안 회전하는 속도 33RPM보다 조금 더 빠른 속도다. 그리고 이들의 팀 이름이기도 하다.
그들만의 아지트 '아폴로'
이현배 씨는 형 이하늘 씨 덕분에 일찌감치(고등학생 시절) 클럽 DJ들과 많이 어울렸다. 당시 이현배 씨의 집은 대전에 있는 DJ들의 숙소나 마찬가지였고, 친하게 지내는 DJ들의 도움으로 클럽 출입을 맘 놓고 할 수 있었다. 클럽 출입이 잦아지면서 음악과 랩을 배울 수 있었다. 게다가 형이 DJ DOC라는 팀을 결성해 많은 인기를 얻고 있던 것도 음악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
그래서 형이 자동차를 사라고 쥐어 준 돈으로 클럽을 차렸다. 대전 중구 대흥동 중구청 근처에 있는 지하였다. '아폴로'라는 이 클럽은 순전히 이현배 씨가 공연을 하고 싶어 만든 클럽이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힙합클럽이라고 할 만한 곳이 서울에 있는 힙합클럽 하나 말고는 없었더란다. 중부권 유일의 힙합클럽은 그렇게 소박하게 시작했다.
공연은 매주 토요일마다 열렸다. 대부분 이현배 씨가 무대에 올라 다른 사람의 곡을 틀어놓고 프리스타일 랩을 구사하는 공연이었다. 처음엔 장사도 잘됐다. 그 덕에 중부권에서 랩좀 할 줄 안다는 젊은 친구들이 모여들었다.
여덟 명이 모였다. 45RPM이라는 팀이 만들어졌다. 음악을 하고 싶다는 열정 하나만으로 결성한 팀이었기에 백화점이나 패션몰 개업식은 물론 만두가게 개업식도 마다하지 않았다. 엠프 하나에 마이크 하나 달랑 있는 거리 공연이라도 1시간 내내 랩을 내뱉을 수 있었다.
문제는 경제적인 부분이었다. 음악을 시작하면서 클럽 일에 소홀하자 손님이 크게 줄었다. 개업식 같은 돈을 받을 수 있는 공연이 많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다섯 명이 그만 두고, 다시 한 명이 더 그만 두면서 이현배, 최경욱, 박재진 세 명이 남아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45RPM의 모태가 된 '아폴로' 클럽에 대한 이야기는 이들의 음악에도 담겼다. 1집 'December'라는 곡에서 이들은 당시 힘들고 춥던 시절을 진솔하게 들려준다.
45RPM 서울 공략
밑바닥에서 쌓인 내공으로 자작곡을 내놓기 시작했다. PC통신을 통해 음악을 선보이고 상당히 좋은 반응을 얻었다. 슬슬 전국에 그들의 이름이 일려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서울에 있는 '힙합의 성지'라고 불리는 마스터플랜 클럽에서 공연의뢰가 들어왔다. 당시 이곳은 무대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래퍼로서 성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는데, 이곳 사장님은 오디션 없이 이들을 무대에 올렸다.
그리고 첫 공연, 열광적인 반응 속에 첫 무대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리고 마스터플랜 사장님은 이들을 바로 메인 공연에 세웠다. 팀을 결성하고 삼았던 첫 목표가 마스터플랜 무대에 오르는 것이었는데, 그 꿈을 이룬 것이다.
그렇다고 가수로서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1회 공연에 2만원을 받았는데, 당시 팀원 네 명이 서울을 한 번 오가는데만 드는 비용이 10만 원이었다. 클럽 재정은 열악해지고, 빚은 불어났다. 다행히 이현배 씨의 형 이하늘 씨가 갚아줘서 탈 없이 음악을 계속 할 수 있었다.
4년 걸린 1집, 그리고 첫 콘서트
전국에서 오라는 곳은 모두 달려가 무대에 섰다. 당시에는 힙합 콘서트가 많았는데, 그 무대에는 늘 45RPM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눈여겨보던 이가 있었으니, YG엔터테인먼트 양현석 대표였다.
바로 계약서에 서명했다. 앨범 발매와 매니지먼트 계약이었다. 세상을 모두 얻은 것 같았다. 이제 음악만 열심히 하면 될 것 같았다. 2001년이었다.
문제는 형 이하늘이었다. 이현배 씨가 팀을 꾸리고 공연 다니며 인지도를 높이는 동안에도 관심을 두지 않던 이하늘 씨가 계약서를 찢으며 자신이 운영하는 '부다사운드'와 계약할 것을 요구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집 앨범 발매도 무산됐다. '부다사운드'가 재정 악화 때문에 앨범을 내주지 못한 것이다. 앨범에 들어갈 열다섯 곡을 비롯해 모든 준비가 끝났는데 말이다. 이현배 씨는 형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처음엔 아무런 관심도 없다가 앞으로 나가려 하니 발목을 잡은 꼴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4년이 지났다. 이하늘 씨는 미안했는지 45RPM이 YG엔터테인먼트와 계약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YG엔터테인먼트는 45RPM을 전담하는 것은 물론, 이들과 같은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을 발굴하기 위해 'YG언더그라운드'라는 별도 레이블을 세웠다. 그리고 부다사운드도 45RPM을 전폭 지원하기로 했다. 자칫 사이가 멀어질 수 있었지만, 45RPM을 위해 손을 잡은 것이었다.
1집 'OLD ROOKIE'에는 귀에 익은 곡이 많이 실려 있다. 영화 <품행제로> 삽입곡 '즐거운 생활'을 비롯해 '리기동', '즐거운 힙합' 등 어디선가 한 번은 들어봤을 곡이 많다.
올해 초 45RPM은 3년 만에 두 번째 정규앨범 'HIT POP'을 냈다. 1집은 어렵고 힘든 시절을 거쳐 만들어낸 앨범이었기에 조금 어두운 면이 많았지만, 2집은 조금 더 밝게 살고 싶다는 45RPM의 희망이 담겼다. 물론 음악적으로도 더 성숙해졌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타이틀곡 '살짝쿵'은 1970년대를 풍미했던 가수 정훈희의 '그 사람 바보야'를 샘플링했다. 외국곡을 따오는 한국 대중음악계에 어떤 화두를 던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작업을 하다 보니 우연하게 '그 사람 바보야'를 듣고 좋아서 곡 작업을 했단다.
지난 5월에는 첫 단독 콘서트도 열었다. 늘 남의 콘서트에 게스트로 오르다가 첫 단독 콘서트를 연 것이었는데, 분위기는 아주 뜨거웠다고 한다.
대중적 인지도를 넓히고, 단독 콘서트에 방송출연도 많이 하지만 이들은 여전히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이다. 한 사람 연봉이 500만 원 정도 된다고 하니, 아르바이트라도 해야 할 상황이다. 다행히 기획사에서 제공한 숙소에서 끼니까지 해결할 수 있어 간신히 버티며 음악을 계속 할 수 있단다.
오랜만에 대전에 서다
45RPM을 만난 건 6월 28일이었다. 가수 이승환 씨의 대전 콘서트 둘째 날 공연 오프닝 무대를 앞두고, 공연장 앞에 있는 카페에서 이들을 만났다.
가장 나이가 많은 형이자 리더인 이현배 씨가 먼저 도착했다. 형 이하늘 씨와 달리 큰 키에 수더분한 외모를 갖고 있어 닮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지만, 목소리가 참 비슷했다.
이어서 고등학교 동창이자 친구인 최경욱, 박재진 씨가 도착했다. 최경욱 씨는 샤프한 느낌이고, 박재진 씨는 영락없는 악동 콘셉트다. 어찌 보면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세 사람이지만, 무대에서는 어떤 팀보다 잘 짜인 팀워크를 발휘한다.
이현배 : "무대에 서면서 떨어본 적이 없는데, 어제는 많이 떨렸어요"
최경욱 : "형 혼자 떨었어요. 우린 괜찮았는데."
전날 공연에서 2집 타이틀로 밀었던 '살짝쿵'의 후속곡으로 정한 '새침떼기'라는 곡을 불렀는데, 지금까지 45RPM의 곡과 달리 가볍고 밝은 분위기였기에 조금은 적응이 안 됐던 모양이다. '새침떼기'에서 이현배 씨는 랩이 아닌 노래를 부른다.
이현배 : "앞으로도 신나고 밝은, 듣기 쉬운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그리고 사람들이 재미있어 하고, 우리가 하는 랩을 잘 알아들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조만간 45RPM은 다음 음반 작업을 진행할 예정이란다. 현재는 밝은 음악을 생각하고 있지만, 처한 상황에 따라 분위기가 결정되기 때문에 어떤 음악이 나올지는 장담할 수 없단다.
인터뷰가 끝나고 이들은 이승환 콘서트 오프닝 무대에 올랐다. 객석을 가득 채우고 앉아 있던 관객들이 모두 일어나 이들의 노래, 랩, 손짓에 몸을 흔들었다. 환호는 그치지 않았다. 첫 곡 '새침떼기'로 살짝 공연장을 달구더니, '살짝쿵'으로 분위기를 한껏 띄워놓았다.
싫어할 수 없는 재치있고 신나는 음악, 이게 45RPM의 음악이다.
[2008년 8월 월간 토마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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