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슬어 없어지기보다 닳아 없어지는 삶 - 강래설 씨
글·사진 이주연
대부분이 그러하듯 삶이란 게 뜻하는 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그럼에도 강래설(65세) 씨는 제법 운이 좋은 인생을 살았다고 자부한다. 돌이켜 보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도, 꿈꾸던 일을 하지도 못했지만 좋은 영향과 경험, 사람들 속에서 성장했고, 살아왔으며, 살고 있다.
대전을 벗어난 적 없는 강래설 씨는 책임감 강한 부모님을 만나 건강하게 자랐다. 흐름 따라 선택한 교사라는 직업이 적성에 맞았다. 대학 졸업 후 열정적으로 학생을 가르쳐 온 그는 지난 2018년 정년퇴임을 했다. 이후 그의 삶은 더욱 풍요로워졌다. 배움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강래설 씨는 다양한 취미를 즐겼고, 좋아하는 여행을 꾸준히 해 왔다. 밝고 높은 목소리가 그의 삶을 증명하듯 경쾌했다. 열심히 걸어 온 그의 삶은 새로운 길에 들어섰고, 기꺼이 받아들이며 즐겁게 살아간다.
많은 것을 하진 못했어도 즐거웠던
6·25전쟁이 일어나고 강래설 씨의 부모님은 고향인 함경도를 떠나 대전 중촌동에 자리를 잡으며 꽤 큰 수건 공장을 운영했다. 함께 남한으로 내려온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일찍 안정적인 생활을 꾸릴 수 있었다. 부모님은 주변 사람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생활이 어렵던 친척들은 이들의 도움을 받으며 집에 머물렀고, 상황이 나아지면 떠났다. 수건 공장 직원들은 강래설 씨가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한 집에서 함께 먹고 생활했다. 남에게 베풀 줄 알았던 부모님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강래설 씨에게 항상 ‘공장 직원들이 있기 때문에 너희가 이렇게 잘 살 수 있는 거다. 직원들에게 잘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그런 부모님 밑에서 자란 그는 공장 직원들과 격 없이 지내고, 공장 일도 도우며 자랐다. 그의 기억 속 집안 풍경에는 늘 직원들이 함께였다. 다섯 살까지 살던 집은 큰 방 하나에 미닫이문이 있어, 식사 때면 문을 터서 직원들과 한자리에 모여 밥을 먹었고, 밤이면 문을 닫아 한쪽 방에서는 직원들이, 다른 방에서는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잠을 잤다.
“아버지는 신념이 강한 분이셨어요. 특히나 교육에 대한 신념은 독특하셨죠. ‘어디 하나에 미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늘 말하셨어요.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이제 막 흑백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시작했는데, 아버지는 절대 사주지 않았어요. 텔레비전에서는 배울 게 없다는 당신의 굳은 신념이었죠. 제가 스무 살이 되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에야 어머니가 컬러텔레비전을 사 주셔서 텔레비전을 볼 수 있었어요. 그래서 어릴 때는 학교에 가면 조금 외로웠던 것 같아요. 친구들은 다들 텔레비전에서 본 얘기를 하는데 저는 만화 주인공이고 뭐고 아는 게 없으니 대화에 낄 수가 없었거든요(웃음).”
그의 아버지는 텔레비전 대신 전축을 사 줬다. 아버지의 굳건한 신념 탓에 학교에서는 종종 외로웠지만 그 덕에 강래설 씨는 원 없이 음악을 들었고, 책을 가까이했다.
그의 어머니는 정이 많은 따듯한 사람이었다. 강래설 씨가 친구들과 놀 때면 항상 그의 집이 아지트가 되었는데, 그가 없는 날에도 친구들이 찾아오면 어머니는 친구들을 집으로 들여 놀아 주었다. 특히나 손이 컸던 어머니는 음식을 만들면 매번 주변 사람들과 나누어 먹었다.
“우리 어머니가 손이 크셨어요. 두 분 다 이북 분들이셔서 만두를 자주 빚어 먹었는데, 한번 만두를 만들면 만두소만 큰 통으로 두세 통은 나왔어요. 그런데 그 많은 만두를 다 빚어도 남는 게 없었어요. 만드는 족족 사람들에게 다 나눠줬죠. 한날은 공장 잘되라고 고사를 지냈는데, 시루떡을 엄청 많이 준비했어요. 워낙 양이 많아서 내일도 남아있겠거니 생각해 적당히 먹고 잠들었는데, 다음날 일어나서 시루떡 좀 달라고 했더니 없다고 하더라고요. 분명 어제만 해도 잔뜩 있었는데 말이에요(웃음). 알고 봤더니 고사 지내고 나서 이곳저곳 나눠주느라 남은 게 없었던 거예요. 어린 나이에 그게 서운해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나요.”
그에게 어머니는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 아픈 사람이다. 그가 어렸을 때부터 건강이 좋지 못했던 아버지를 병간호하고, 자식들을 먹이고 입혔고, 아버지와 함께 공장을 운영하며 온 시간을 쏟았다. 강래설 씨가 스물이 되었을 때 병상에 누워 계시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아버지를 대신해 공장을 운영하며 굳건히 가정을 지켰다. 그의 어머니는 젊었을 때 많은 걸 해 봐야 한다며 항상 강래설 씨 뒤에서 많은 응원을 보냈다. 어머니가 젊었을 적에는 살아가기 바빠 하고 싶은 것들 하지 못했던 아쉬움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가 하고 싶은 것들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강래설 씨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을 때는 직장을 다니는 그를 대신해 손주들을 돌보며 그에게 힘을 북돋아 줬다.
그의 어린 시절, 부모님은 바쁘고, 건강이 좋지 않았던 탓에 가족과의 추억이나 기억이 많지는 않다. 그래도 매주 일요일이면 가족 모두가 유성온천으로 나들이를 떠났다. 버스를 타고 유성온천에 도착해 놀다가 돌아오는 길에 시내에 있던 풍미당이라는 빵집에 들러 빵을 사 먹는 게 고정 코스였다. 여름이면 영동 심천으로 물놀이를 가기도 했다. 또 그의 어머니는 자신의 자녀가 많은 것을 보고 경험할 수 있길 바랐다. 어려서부터 어머니 손을 잡고 영화를 보러 가는 날도 많았다. 새로운 영화가 나오면 항상 어머니와 함께 영화관으로 향했다. 바쁜 와중에도 부모님은 어린 자녀들에게 추억을 심어 주었다.
“부모님 따라 여행을 다녔던 기억 때문인지 지금도 여행 가는 걸 좋아해요. 특히 아이들이 태어났을 때는 온 가족이 함께 이곳저곳을 다녔죠. 여름에는 배낭 하나 들쳐 메고 곳곳을 다니기도 했고,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들고 다니며 책에 나오는 문화유산을 따라다니기도 했어요.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계속 여행을 다녔던 탓인지 큰딸이 한 번은 사회과부도 교과서를 들여다보며 ‘우리가 안 가 본 곳이 거의 없네?’라고 말할 정도였죠. 제가 부모님 영향을 받은 게 가장 컸던 것 같아요.”
어쩌다 보니 교사가 되었다
집 근처에 있던 성남초등학교를 졸업한 강래설 씨는 대전 중구에 성모여자중학교와 고등학교에 다녔다. 지금처럼 놀 거리가 풍성하지 못했던 시절이기에 방과 후면 그와 친구들은 학교 앞에 있는 만둣집에서 만두를 먹고, 서로의 집에서 돌아가며 놀았다. 개교기념일인 5월 31일만 되면 당시 딸기밭이었던 한남대학교 근처에 가서 딸기를 따며 놀기도 했다. 그만큼 순수하던 때다.
“그때는 매일 교복만 입으니까 심부름 갈 때도 교복을 입어야 하나 고민할 정도로 순수했어요. 특별한 놀이도 없었을뿐더러 학생인 우리가 밖에서 오래도록 머무르기에 무서운 시대였기 때문에 학교 끝나고 들르는 곳이라고는 학교 앞 만둣집밖에 없었죠. 고등학교 때는 아이스크림 가게가 막 생겨서 종종 들르기도 했어요. 비싸니까 자주는 못 갔고요. 특별할 것도 없었고, 저 역시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죠.”
별날 일도 없는 평범한 생활을 이어온 그였지만 강래설 씨가 품었던 꿈만은 더없이 특별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와 함께 영화를 보러 다니며 촬영기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꿨다. 커다란 카메라를 들춰 메고 평범한 것들을 멋지게 담아내는 이들이 멋있어 보였다.
측량사도 되고 싶었다. 종종 길에서 이상한 기계를 가지고 거리를 측정하는 이들 역시 강래설 씨의 눈에는 특별해 보였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장비를 가지고 다니는 일이 특별해 보였던 걸 수도 있고, 남다른 직업이라는 생각에 더욱 매력적으로 느껴졌을 수도 있다. 물론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여성이 꿈꾸지 않던, 어쩌면 꿈꿀 수 없던 직업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그 역시 막연한 꿈으로만 품었을 뿐, 장래를 선택할 때에는 쉽게 그 꿈들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조금 더 안정적이고,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생각하는 직업을 선택했다. 충남대학교에 진학한 강래설 씨는 시간이 흘러 졸업을 앞뒀을 무렵, 선생님이 되고자 마음먹었다. 어릴 적 꿈은 그대로 가슴 속에 품은 채, 꿈보다는 안정적인 쪽을 택했다.
“어쩌다 보니 교사가 된 것 같아요. 특별한 이유 없이 흐름에 따라 살다 보니까 교사를 선택하게 됐고, 어느새 중학교에서 아이들에게 과학을 가르치고 있었죠. 그래도 저는 운이 좋았어요. 어쩌다 선택한 길이 생각보다 제 적성에 맞았거든요. 어쨌든 과학이라는 제 흥미에 맞춘 길이었기 때문이었던 거 같아요. 물론 아이들과 생활하는 것도 즐거웠고요.”
졸업 후 그가 첫 교직 생활을 시작한 곳은 논산에 있던 계명중학교다. 임용고시를 준비하며 그저 손 놓고 공부만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계약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아이들과도 친구처럼 가까이 지내며 겉도는 친구들이 있으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살피고 도우며 아이들이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의 진심 어린 마음이 통했는지 철마다 자신이 딴 첫 과일을 가져와 그의 손에 꼭 쥐여 주는 학생도 있었다. 첫 학교였고 처음 가르치는 학생들이었기에 열정도 의욕도 넘치던 시절이었다.
꼬박 5년을 근무하다가 학교가 있던 곳에 군부대가 들어서면서 학교가 없어졌다. 그 덕에 강래설 씨는 계약직에서 정규 교사로 전환되며 금산에 있던 남일중학교로 전근을 갔다. 새로 부임한 곳에서도 그는 특유의 밝은 성격으로 아이들과 친밀하게 지냈다. 교사에게 필요한 것은 좋은 수업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 다니며 그가 정한 목표는 교과서에 나오는 실험을 다 해 보는 것이었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아이들 교육에 힘썼다. 아이들 역시 강래설 씨의 노력을 알아주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학생 중 그의 수업을 듣고 싶다며 전화해 어리광을 부리는 학생들도 있었고, 스승의 날이면 매번 그에게 연락해 감사 인사를 전하는 학생도 여럿이다.
“스승의 날이면 연락해 오는 친구들이 많아요. 졸업한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저를 찾아주는 친구들이 있죠. 우리 집으로 방문해 스승의 날이라며 선물을 주는 친구들도 있고, 동창회에 참석해 줬으면 한다는 연락도 와요. 한 친구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빠짐없이 감사하다는 연락을 하는 친구도 있어요. 그럴 때면 정말 교사로서 뿌듯하죠. 아이들이 저를 잊지 않고 찾아주는 것이 고맙고 기분 좋아요.”
강래설 씨는 매번 새로 부임한 학교에서 5년이라는 근무 기간을 꽉꽉 채우고는 다른 학교로 옮기며 교사 생활 동안 총 10곳의 학교를 거쳤다. 24살에 시작한 교사 일은 그가 63살, 정년퇴임을 하는 날까지 이어졌다. 40년 가까운 시간을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했다. 마지막까지도 좋은 교사로서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 그는, 마지막 교사 생활을 보낸 금산여자중학교에서 아이들과 동료 선생님들로부터 잊지 못할 아주 특별한 퇴임 선물을 받았다. 한 동료 선생님의 주도로 비밀스럽게 진행한 영상 선물이었다.
“학교에 반이 총 10반인데, 10반 모두에게 작별 인사를 받아 제작한 영상이었어요. 이미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고 눈물이 났어요. 그런데 화면이 바뀌더니 제가 아는 얼굴이 보였죠. 알고 보니 동료 선생님이 제 딸과 아들에게도 영상을 받아 함께 넣었더라고요. 남편 역시 영상을 통해 그동안 수고했다는 이야기를 전했어요. 더 놀란 건 학교에 데려다줬던 남편이 강당에 사람들과 어울려 앉아 있더라고요. 너무 고맙고 감격스러워 계속해서 눈물이 났어요. 옆에 있던 남편도 함께 울었죠. 참 긴 시간을 학교에서 보냈어요. 그래서인지 사실 퇴임식 날에는 무슨 기분인지 모르겠더라고요. 아무런 느낌이 없었어요. 금요일에 퇴임식을 했던 터라, 다음 날이 주말이라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그런데 월요일이 되니까 ‘아 나 정말 이제 학교 안 가는구나’ 싶으면서 퇴직한 기분이 생생하더라고요. 시원섭섭했어요. 물론 이걸로 모든 감정을 표현할 순 없지만, 가장 먼저 들었던 기분이었죠. 그동안 정말 열심히 했구나 싶었어요.”
또 다른 시작, 좋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시간
끝은 또 다른 시작이라는 말처럼 인생에서 절반이 넘는 시간을 학교에서 보낸 강래설 씨는 퇴직과 함께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다. 좋아하는 여행도 많이 하고 그동안 못했던 것들, 해 보지 못한 것들을 하나씩 해 나가며 더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다.
“처음 넉 달은 계속 집에서만 머물며 온전한 휴식 시간을 보냈어요. 일하느라 정리하지 못했던 것을 정리하고, 집안에 쓸모없는 것을 버리기도 했어요. 무엇보다 밀린 드라마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죠(웃음). 전에 아들, 딸이 수능 끝나고 밀렸던 드라마를 보던 게 생각나더라고요. 그때 아이들 기분이 저랑 똑같았던 거 같아요.”
휴식기를 끝낸 강래설 씨는 지난해부터 다양한 것을 배우기 시작했다. 평소 성격이 필요한 것이 있으면 구입하기보다는 직접 만들어 보는 편이기에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것 역시 어렵지 않았다. 시립미술관에서 도슨트 교육을 받은 뒤 근현대사전시관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자원봉사로 도슨트 활동을 했다. 도슨트 교육을 받고 근현대사전시관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대전에 대해 깊이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대전 역사에 관심을 가지며 평생 가본 적 없던 인동 3.1운동 재연 행사를 가보기도 하고, 대전 근대 역사 투어에도 참여했다. 그가 평생을 살아 온 대전이라는 도시를 천천히 알아가는 일은 즐거웠다.
그는 도슨트 활동 말고도 동화 스토리텔러 교육을 들으며 2급 자격증을 취득했고, 시민대학에서 마술동화 자격증도 땄다. 또 이모작지원센터에서 과학 커뮤니케이터 과정을 들으며 창의과학교육지도사 2급 자격증도 따고 이를 가지고 한 달에 한두 번씩 아동복지센터에서 과학수업 봉사활동을 하기도 했다. 자신이 배운 것을 그저 배움으로만 채우지 않고, 계속해서 활용하고 봉사하며 많은 시간을 들였다. 배움에 대한 열정과 사람을 좋아하는 그의 성격을 한껏 펼칠 수 있었던 한 해였다.
강래설 씨는 ‘지난해 열심히 움직였으니 올해는 좀 쉬어야지 싶었는데, 하필 코로나19로 인해 정말 푹 쉬게 되었다’며 마냥 웃지만은 못할 이야기를 전했다. 원래 예정되어 있던 도슨트 후반기 교육도 코로나19로 인해 미뤄진 상태고, 좋아하는 여행 역시 쉽게 하지 못한다. 워낙 활동적인 그이기에 답답할 만도 한데, 여전히 환한 웃음과 밝은 에너지를 뿜어낸다. 어딜 가기에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 그는 집에서 할 수 있는 취미를 찾으며 지내는 중이다. 요즘에는 목공에 관심이 간다며, 얼마 전 밖에 떨어진 나뭇가지로 만든 수저 받침대를 보여줬다. 나뭇가지가 가진 본연의 모습을 그대로 살려 매끄럽게 사포질만 해낸 받침대다. 각기 다른 모습을 한 받침대는 오밀조밀하니 귀엽다. 투박한 모양새지만, 원래 가진 모습 그대로이기에 그것 나름의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정제되지 않은 아름다움은 오히려 더 눈길이 간다. 어디서 배우지 않더라도 자기 나름대로 계속해서 배움을 추구하고, 새로운 도전을 마다하지 않는 강래설 씨의 모습을 닮았다. 모양이 일정하지 않지만, 자신의 색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당당함이다.
“요새는 누구나 그렇듯이 그저 하루하루,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며 살고 싶어요. 행복하게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그림도 그리고 바느질도 하고, 좋아하는 여행도 다니며, 영화도 보고 책도 읽으면서 그냥 그렇게 살고 싶어요. 종종 도슨트 활동이나 도서관 도우미, 봉사활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열심히 하면서 말이에요. 언젠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녹슬어 없어지기보다 닳아 없어지는 것이 낫다’라는 말이었죠. 그 글을 읽고 난 후로 계속 머릿속에 맴돌면서 제 인생의 좌표가 되었어요. 봉사활동이든 취미생활이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찾아보면서 닳아 없어지는 인생을 살고 싶어요. 그리고 요즘에는 무엇보다 건강하게 사는 게 꿈이기도 해요. 건강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하니까요(웃음).”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도를 만드는 사람 '진DoL' 박진석 대표 (20) | 2021.04.30 |
---|---|
강물 아래 또 다른 강물이 흐르듯이 (13) | 2021.04.30 |
'희망'을 노래하다 - 45RPM 故이현배 씨 (5) | 2021.04.23 |
강인한 육체와 정신을 위해 (19) | 2021.04.19 |
우리 함께 쓰레기를 주워유~ (55) | 2021.04.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