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이 읽는 동화 -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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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

어른들이 읽는 동화 - [독서]

by 토마토쥔장 2021. 5.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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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이 읽는 동화 - 독서

글 이선희

 

“날 버려!”

 

책이 울부짖었다. 읽히지 않는 책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며 읽지 않을 바에야 자신을 버려달라는 것이다. 

 

“그래, 아예 불태워 버려! 깨끗이 없애버리란 말이야!”

 

책의 절규는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대체 내가 무어라고 다른 물건을 이다지도 비참하게 만든단 말인가? 인간으로서 도리가 아니다. 나는 책을 펼쳐 들었다. 

 

“어때? 재밌지?”

 

‘추천의 글’ 첫 문장을 채 읽기도 전에 책이 물었다.  

 

“시작이 흥미롭네.”

 

나는 에둘러 말했다. 책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나 때문에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테니. ‘추천의 글’과 ‘여는 글’을 지나 ‘차례’를 넘어 가까스로 1장에 도달했다. 그런데 눈꺼풀이 무거웠다. 눈꺼풀을 내리누르는 잠의 요정 몸무게는 1,376kg보다 더 나갈 것이 분명했다. 1,376kg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사람의 몸무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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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자는 거야?”

 

책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다. 

 

“자다니 무슨 소리야? 눈이 아파서 잠깐 감고 있었을 뿐인데.”

 

너무 빤한 말이었다. 

 

“이렇게 재밌는 책을 보는데 눈이 왜 아파? 

어서, 어서 다음 장으로 넘기라구!”

 

책은 자신의 얘기에 홀딱 빠져있는 듯했다. 

 

“여기 이 부분, 놀랍지 않아?”

 

책에게 발이 달렸다면 방방 뛰어 천장에 머리가 닿았겠지. 

 

“그렇군. 믿을 수 없는 전개군.”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그렇지 않은가? 교양 수준의 물리학 책이라고는 하나 새벽 1시 57분에 물질의 구성 요소니 자연현상의 역학적 기술이니 하는 것들에 진심을 다하기란 어려운 일이니까. 그렇다고 물리학 책의 존재 가치를 떨어뜨릴 수는 없는 일이니 나는 최선을 다해 읽는 척이라도 하려는 것이다. 

 

텍스트는 좌에서 우로, 위에서 아래로 읽어야 한다. 그것이 과거에서 미래로 흐르는 시간의 방향이다.

그런데 그만,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를 페이지를 다 읽은 척 넘기는 시늉을 하다가 잠이 들었고 블랙홀과 같이 걷잡을 수 없는 잠의 소용돌이에 머리끝까지 빠지려는 찰나 종이를 잡고 있던 손이 미끄러지며 북— 책을 찢고야 만 것이다.

 

빛보다도 빠른 속도로 정신이 돌아왔다. 27쪽은 2/3정도가 찢어져 있었다. 엄연한 사실이었다. 책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어설픈 사과 따위로 모면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균열은 너무도 선명하였다. 투명한 테이프를 가져와 찢어진 2/3을 꼼꼼히 이어 붙였다. 그것은 레고로 만든 뱀처럼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더 이상 침묵을 지켜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책이 먼저 침묵을 깨뜨리게 해서도 안 될 것이었다. 

 

“더 이상 읽지 않겠어.”

 

책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어쩌면 할 말을 고르는 중일지도 모르기 때문에 나는 책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책은 말이 없었다. 할 말이 없는 것인지, 할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인지, 할 말을 할 수 없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책이 말이 없었으므로 나는 책장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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