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짓다'라는 동사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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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편지

다시, '짓다'라는 동사를 생각하다

by 토마토쥔장 2021.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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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짓다'라는 동사를 생각하다

 

 

나이를 먹으며 복잡하고 번다한 도시를 떠나고 싶다는 욕망은 점점 커진다. 모든 욕망을 실현하며 살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 정도 지혜는 가진다는 걸 의미한다. 알아도 여전히 욕망하는 이는 많다. 많은 사람이 방송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와 유사 프로그램을 넋 놓고 시청하는 것도 이런 욕구에 기반하지 않을까? 

 

귀농과 귀촌, 귀어 등은 이제 정부나 지방자치 단체가 정책으로 고민하며 다양한 지원 기관을 설립하고 관련 지원 프로그램을 만들어 낼 정도다. 도시를 떠나고 싶다는 생각은 단순하게 공간을 이동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직접 집을 짓거나 농사를 짓고 싶은 욕망도 함께 포함한다.

 

이런 현상은 현대 도시가 '나'를 끊임없이 소비한 잔혹한 현실에 기반한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소진한 몸과 마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닌 듯하다. 사회 규모가 커지면서 효율성과 합리성을 따져 다양한 영역에서 분업이 이루어졌지만, 그전까지 우리 삶의 방식을 상상해 보면 자기 삶은 자기가 책임지는 것이 옳았다. 모르긴 몰라도 기간으로 보나 깊이로 보나 이런 방식이 우리 인류 삶의 원형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말 '짓다'라는 동사가 특별하게 다가왔다. 집을 지으며 평생을 살아온 사람과 인터뷰를 정리하면서다. 우리는 집을 짓고 옷을 짓고 농사를 짓는다. 몸이 아프면 약도 짓고 때로는 글도 짓는다. 사람이 사람답게 존엄을 지키며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일에 '짓다'라는 말을 쓰는 듯하다. 어쩌면 '죄'조차도 크든 작든,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짓다'라는 동사를 붙인 것이 아닌가 싶다. 죄를 짓는 행위가 절대 가볍지 않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짓다'라는 말은 우리 삶을 잘 설명한다.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자기 힘으로 살 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옷을 지어 입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와중에 때로는 시를 짓고 글도 짓고 말이다. 고 신영복 선생님이 얘기했던 '일, 학습, 놀이'가 일치한 삶의 철학은 '짓다'라는 두 글자 동사에 오롯이 담긴 듯하다.

 

'짓다'라는 낱말에 관해 생각하며 몇 년 전 취재를 하러 갔던 히로시마 게이호쿠가 떠올랐다. 그곳에서 나무꾼과 사냥꾼, 과학자, 기획자를 만났다. 이렇게 쓰니 마치 오즈의 마법시 주인공 도로시가 된 기분이다. 나무꾼과 사냥꾼은 그곳에 본래 살던 주민이고 기획자는 고향을 떠난 지 20여 년 만에 귀향한 주민이었다. 과학자는 새롭게 들어온 이주민이었다. 당시, 이들은 사라질 상황에 직면한 산촌에서 다양한 실험을 펼쳤다. 산에서 먹을 수 있는 나물을 채취해 맛있는 요리법을 개발하고 최소 장작으로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로켓 원리를 적용한 난로를 개발했다. 기획자와 이주민은 나무꾼과 사냥꾼에게 나무 베기와 다루기, 사냥하기와 정육하기 등을 진지하게 배웠다. 당시 일행은 과학자가 자랑스럽게 원리를 설명하는 난로 위에 산에서 직접 사냥하고 정육한 멧돼지 고기를 구워 먹었다. 반찬으로는 새로운 방식으로 요리한 산채가 나왔다. 이 자리에는 귀촌한 청년 몇 명도 함께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프로젝트 중심에 있던 기획자 히사시 우에다와 과학자 토모히코가 게이호쿠에 들어온 결정적 계기는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였다. 거대한 재해 앞에서 '삶'을 다시 고민했다. 그리고 선택한 삶이 생활 부분의 '자립'이다. 당시 우에다는 멀지 않은 바다에 배도 한 척 마련해 두었다고 말했다. 바다에 나가 물고기도 잡을 계획이었다. 이들은 앞에서 말한 '짓다'라는 동사를 다시 자기 삶 곁에 두려고 노력했다. 이는 제법 멀리 벗어난 '삶의 원형'에 다가가는 행위였고 지구 위에서 건강한 삶을 회복하려는 나름의 실천 활동이었던 셈이다.

 

코로나19 상황을 맞은 지금, '짓다'라는 동사를 다시 생각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자기가 먹을 닭을 잡는데 다른 사람 손을 빌린 때부터 우리 삶은 정상 궤도에서 벗어나 왜곡되기 시작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도로를 닦고 이동 수단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며 우리 삶의 단위는 광범위하게 넓어졌다. 이 와중에 효율을 내세우며 다양한 영역에서 분업을 진행했지만, 이는 집단의 체질을 허약하게 만들었다. 철옹성이라 여겼던 사회 시스템은 전염성 강한 바이러스 앞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웃자란 벼는 비바람에 맥을 못추지만 짧고 강단 있는 벼는 버텨 낸다. 우리가 삶의 단위를 더 작게 쪼개야 하는 이유다. 지금보다 작은 삶의 범위 안에서 개인이 감당해야 마땅한 행위는 직접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와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진정한 주민 자치는 '짓다'라는 말을 개인 삶에 적용하려는 노력이다. 영화 <마션>에서 화성에 홀로 남은 주인공 마크 와트니가 식물학자이면서 엔지니어가 아니었다면, 생존은 불가능했다. 하필이면 그랬다. 핵폭발이나 기후 변화, 거대 자연재해 등으로 멸망한 지구를 상상하지 않더라도 인류가 더는 소비자로 존재하지 않고 올곧이 인간으로서 살기 위해 이제 '짓다'라는 동사를 개인 삶 가까이 가져오는 것에 관한 진지한 사유가 필요하다. 

 

 

 

2021년 5월 20일 

 - 월간토마토 편집장 이용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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