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추구해야 할 완벽한 자유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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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편지

우리가 추구해야 할 완벽한 자유에 관하여

by 토마토쥔장 2021.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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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추구해야 할 완벽한 자유에 관하여

 

 

아이는 내달리고 있었다. 무거운 몸을 제법 재게 놀리며 겅중겅중 달렸다. 

점심을 먹은 후 걷기 시작했을 때는 대전천 좌안을 따라 걸었다. 투덜투덜, 왜 걸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는 빈약한 논리를 들이대며 터벅터벅 걸었다. 걸어야 하는 이유 역시 고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는 시야 밖으로 벗어나 탕출을 시도할 만한 용기는 없었다. 처음은 아니더라도 대전천 주변이 아이에게 익숙한 풍경은 아니었다. 유치원에 다닐 때 나들이 나왔다가 징검다리에서 물에 빠졌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은 낯선 곳을 향한 호기심보다 두려움이 훨씬 큰 모양이다. 걸으며 티격태격하던 중에 할아버지가 식당에 마스크를 놓고 온 사실을 알아챘다. 아이는 어쩔 줄 몰라했다.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 아이들에게 마스크 없이 외부에 나가는 건 잠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본인 뿐만 아니라 누가 보아도 일행이라고 여길 만한 사람이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는 사실 역시 함께하기 부끄러운 일이었다. 설득할 방법은 없었다. 아이는 이제 양말을 신는 것만큼이나 마스크를 챙겨 쓰는 일이 익숙하고 자연스럽다. 공자도 예상하지 못했을 인간으로 갖춰야 할 기본 예의다.

 

 

할 수 없이 대전천 둔치에서 벗어나 약국이나 편의점을 찾아 큰길로 나섰다. 짧지 않은 길을 빠른 걸음으로 걷는 동안 원하는 가게를 찾지 못했다. 대전에서 제일 싸게 판다는 배터리 전문점과 조명 가게 등 평소에 알아채지 못한 수많은 가게가 있었지만, 마스크를 살 만한 곳은 없었다. 파출소 앞에 세워 놓은 경찰차 뒤에서는 트렁크에 올려 둔 서류에 열두서넛으로 보이는 사내 녀석 둘이서 볼펜을 쥐고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궁금증이 발동해 멈추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다행히 표정이 그리 심각해 보이지는 않았다. 마스크를 빨리 구매해야 했다.

 

 

돌다리 네거리에 도착할 때까지 맥없이 걸었다. 길 건너 계수약국은 문을 닫았어도 주변에 유마트와 편의점이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신호도 바뀐 터라 건널 것인가 건너지 않을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고민하는 사이에 신호등은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깜빡거림은 결정을 도왔다. 길을 건너지 않기로 했다. 대신 대전천 둔치로 가는 길에 만날 수 있는 이츠마트에 가기로 마음 먹었다. 짧은 시간, 선택해야 할 수많은 지점이 있었다. 처음부터 이츠마트에 마스크가 있을거라는 확신이 있었다면 고민은 필요 없었다. 확신이 없었을 뿐이다.

 

 

이츠마트 옆에는 이츠빌라가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무엇이 먼저 생겼는지 정확하지 않아도 '빌라'라 이름 붙인 다세대 주택이 나중에 생긴 듯하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잇츠대전'이 이츠마트 작명에 영향을 끼쳤는지도 궁금했다. 이츠마트 계산대 근처에 마스크를 진열해 두었다. 편의점이나 약국처럼 종류가 많지는 않았어도 필요한 마스크는 있었다. 전체 매장 크기에 비하면 정말 손바닥만 한 공간을 마스크에 내주었을 뿐이었다. 숨쉬기 편하다는 설명이 붙은 마스크를 골라 계산대로 향하다가 생각을 바꿔 물도 한 병 집어 들었다.

 

 

대전천을 가로질러 중구와 동구를 연결하는 다리 옆에 서서 하천 둔치를 내려다보았다. 기대한 것처럼 아이가 보였다. 대전천 우안을 달리고 있었다. 제법 많은 사람이 주말 대전천 둔치에 나와 걷고 뛰고 자전거를 탔다. 그 틈에서 아이를 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손을 머리 위로 뻗어 흔들었다. 어떻게 보였는지 아이도 마주 손을 흔든다. 그리곤 보란 듯이 더 빨리 달린다. 막 태어난 고라니 새끼마냥 겅중거리고 뛰는 모양새가 어딘지 모르게 어중띠다. 계단으로 내려가 대전천을 건너지 않고 반대편에서 아이를 따라갔다. 아이는 잠깐 멈춰서 점퍼를 벗어 허리에 질끈 동여매더니 다시 달린다.

 

대전천 우안에는 물이 흐르는 방향을 거스르며 하상 도로가 이어진다. 천동 부근에서는 길 위로 올라가거나 강을 가로질러 반대편으로 갈 수 있도록 높이가 낮은 작은 다리를 설치했다. 차가 건너도록 만든 다리지만 한쪽에 사람도 건널 수 있도록 인도 공간을 확보했다. 그곳을 통해 아이는 다시 반대편으로 돌아왔다. 아이가 자신에게 허용한 혼자만의 시간은 그 즈음에서 멈춘 셈이다. 나의 등장이 그런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도 분명하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건네준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모습은 마치 운동회 달리기에서 1등으로 들어와 손목에 도장이라도 받은 듯 상기했다. 

 

"아빠, 왜 그런지 모르겠어. 그냥 냇물을 건넜는데, 엄마가 안 보이니까 처음에는 이상하다가 괜히 기분이 좋았어. 그러니까 막 달리고 싶더라고. 달려야겠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그냥 달려지더라고. 멈출 수가 없었어. 자유롭다고 해야 할까?"

 

내달리는 아이는 익숙한 것에서 점점 멀어지며 두려움과 함께 비례해 커 가는 '자유'를 느꼈을 터다. 둥지 떠나는 연습을 하는 아기 새처럼 언젠가 맞이할 그 순간을 준비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불편하게 배를 둘러 꽉 묶어 둔 점퍼 팔 부분을 다시 풀어내는 데 제법 긴 시간이 걸렸다. 자꾸 풀리는 점퍼를 꼭 잡아 두기 위해 나름 온 힘을 쏟아 넣었을 터다. 시선은 다시 운동화 끈으로 향했다. 예쁜 나비 모양 대신 여러 번 잡아 묶은 운동화 끈이 보였다. 뛰던 중에 풀렸던 모양이다. 그것도 다시 풀려면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싶었다. 그건 그냥 두기로 했다. 자유를 위해 달리며 맞닥뜨린 걸림돌을 해결하기 위해 혼자 애쓴 흔적이었다.

 

 

아이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비단 열심히 달려 숨이 차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비록 30분 남짓이었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꼈을 '자유'라는 벅찬 감정이 아이 가슴을 뛰게 했다. 아이가 그 순간 느꼈을 그 '자유'가 샘났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지만 내 삶이 얼마나 자유로운지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문득문득 다가오는 갑갑증은 어쩌면 구속과 통제가 원인일 수도 있다. 코로나19 때문에 받는 구속과 통제 정도를 말하는 건 아니다. 그것보다 훨씬 더 근원적이고 강력하며 교묘하다. 비염에 감기가 얹힌 것처럼 구속과 통제에 코로나19가 얹히며 요즘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간다.

 

이제 구속과 통제 방식이 과거처럼 뻔하지 않다. 구속과 통제 주체도 불분명하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강권하던 자기 착취만큼이나 자기 구속과 자기 통제는 일상적이다. 이를 도덕적 기반으로 삼아 타인과 집단을 구속하고 통제하며 자유를 억업한다.

 

이 과정에서 사회에서 합의 보아야 할 자유와 연관한 중요한 낱말, 공정함이나 평등 등에 관한 재정의가 이루어진다. 세대, 계층 등 다양한 군에서 정의에 합의하지 못한 채 각자 내린 정의로 소통을 시도하며 혼란을 가중한다. 

 

대전천을 내달리며 자유를 만끽하고 환희에 찬 아이 표정을 보며 다시 확신했다. 우리 사회는 이제 다시 '자유'와 그에 관련한 다양한 낱말에 관한 정의를 내리며 합의하는 과정을 다시 거쳐야 한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추구해야 하는 정당한 가치로서 '인간다움'은 통제에서 벗어난 완벽한 자유다.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최소한의 통제 범위와 보장해 주어야 할 최대한의 자유에 관한 논의를 펼쳐야 한다. 우리 인류 역사는 이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피를 흘린 역사다. 이 고귀한 희생을 헛되이하지 않으려면, 우리는 자유를 추구하고 감당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에 많은 역량을 쏟아야 한다. 다음 세대 아이들이 이런 역량을 갖출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완벽한 자유'가 도대체 무엇일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2021년 4월 26일 

- 월간 토마토 편집장 이용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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