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을 매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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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르포

밭을 매는 사람들

by 토마토쥔장 2021.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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밭을 매는 사람들

  

정덕재(시인, 르포작가)

 

지난해 내가 시골에 마련한 작은 농막의 주변에는 모두 다섯 가구가 산다. 세 집은 평소에도 살림을 하고 나머지 두 집은 일주일에 한 번이나 한 달에 한 번가량 집 상태만 살피는 형태다. 

농막을 중심으로 산 아래 윗집은 양봉을 하고 50m가량 거리가 있는 아랫집은 수박 농사를 짓는다. 둘 다 타지에서 들어와 정착을 했다. 내가 살고 있는 농막 뒤편에는 작은 텃밭들이 있는데 이 밭은 아랫마을 사람들이 가꾸고 있다. 평상시 농막 앞에서 인사를 건넬 수 있는 사람들은 앞길을 다니는 예닐곱 명 남짓이다. 그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이는 팔십 중반의 유모차 할머니다. 

이 할머니는 거의 매일 밭을 오르내린다. 유모차에 호미나 괭이를 싣고 오는데, 가꾸는 것은 깨나 콩 같은 작물들이다. 주변에 밤나무가 여러 그루 있기는 하지만 수시로 손을 볼 대상은 아니다. 한 번은 매일같이 찾는 텃밭이 궁금해 가봤더니 풀 한포기 볼 수 없을 만큼 단정했다. 가끔은 자식들이 밭에 와 한숨 반 탄식 반을 하며 팔순의 어머니를 걱정하곤 한다.

“이놈의 밭을 공구리를 치던지, 살 수가 없네.”

“왜 그러는데요?”

“아니, 엄니가 날마다 밭에 오면서 허리 아프다 무릎 아프다 하시잖아유.”

“그래도 걸어 다니실 정도면 다행이라고 생각하셔요?”

“그거야 그렇지만 어느 정도래야 말을 안하쥬.”

 

오십대 중반의 자식이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하소연을 했다.

내가 보기에도 할머니의 텃밭 가꾸기가 올림픽 종목에 있다면 금메달은 떼놓은 당상이다. 아침에 한 번은 거의 규칙적이다. 어느 날은 하루에 두 번 저녁에도 밭에 온다. 굽은 허리를 세우지 못하고 유모차를 밀고 비탈길을 올라오는 할머니를 보면 나는 냉장고에 접대용으로 넣어 놓은 박카스 한 병을 꺼내 온다.

“뭘 이런 걸 매번 챙겨 준대유.”

“쉬엄쉬엄하셔요. 날도 더운데.”

“일하러 온 게 아니라 호미를 두고 와서, 그거 찾으러 왔슈.”


풀 뽑으러 온 게 분명해 보이지만 할머니는 일하러 오지 않았다는 말을 몇 차례 강조했다. 아마도 얼마 전 둘째 아들이 나한테 걱정을 털어놓은 걸 들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할머니가 혼자 살면서 밭일을 하는 줄 알았는데, 할아버지가 살아 계시다는 걸 동네 사람한테 우연찮게 들었다.

“그 양반 지금까지 빗자루 한 번 안 잡어 봤을겨.”

“그게 무슨 말이에요?”

“한량이라는 얘기지, 마누라가 매일같이 밭 매러 오면 한 번은 따라와서 시늉이라도 할 거 아닌감?”

 

팔순이 넘은 부부의 관계를 짐작해 예단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할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읍내 장날에 나가 백구두 신고 다니는 모습을 확인하는 게 더 빠를지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유모차 할머니의 텃밭에서 불과 10여m쯤 되는 밭의 주인은 일주일에 한두 번 서울에서 내려오는 노부부다. 칠순은 훌쩍 넘어 보이는 이들은 이 마을에서 생활을 하다가 젊은 시절에 상경해 갖은 고생을 하며 자식들을 키웠다고 한다. 장성한 자식들이 결혼을 하자, 이제는 마지막 숙제를 끝냈다는 듯 다시 시골에 거처를 마련했다. 10여 년 전쯤에 예전에 살던 집터에 컨테이너를 가져다 놓고 개량해 생활을 하는 중이다. 이들 부부는 내가 농막을 지을 때 칭찬을 많이 해 주었다. 

“시골에 집짓기를 잘했네, 마당에 심은 장미색깔이 곱네, 페인트칠도 잘하네, 조용하고 좋지”

한마디를 하더라도 듣기 좋은 말로 초보 농막생활에 격려를 했던 분들이다. 마당가에 풀이 돋아나면 풀을 뽑으라면 말 대신에 “풀꽃도 보기가 좋아” 이런 말로 마음을 헤아려 준다. 노구를 이끌고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내려오는 게 힘들지 않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시간이야 많이 걸리지, 전철타고 터미널 가서 고속버스 타고 내려와서 또 동네 들어오는 버스 타야니까 서너 시간 이상은 걸리지 그래도 여기 와야 마음이 편햐.”

“자식들 있는 서울에서 지내셔도 되잖아요?”

“그래도 여기가 좋아, 앞이 탁 트여서 산도 보이지, 바람 시원하지, 콩 심을 밭도 있지.” 

 

부부는 젊은 시절에 상경해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일손이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 달려갔다. 그렇게 자식들을 키운 뒤, 고개를 들어보니 멀리 고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을 스쳤던 모양이었다. 

무엇인가를 두고 왔다는 느낌이 들었을까, 아니면 고단한 생애를 고향에서 위로받고 싶었던 것일까. 이제는 발걸음 떼기에도 벅차 보이지만 여전히 그들은 삽 하나 호미 하나 들고 밭으로 향한다.

농막의 앞집에도 부부가 산다. 오십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이들은 중국에서 오랫동안 생활하다가 이 마을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 사람들 마음 씀씀이가 괜찮더라구, 마을 잔치할 때 보니까 시키지도 않았는디 의자도 척척 갖다 놓고, 한잔 마시라고 술도 따라 주더라구.”

“청년회비도 얼마 내놓았고 하던디.”

“그려!, 사람이 됐구먼.”

 

동네에 정착하는 사람들에 대한 평가는 대개는 일상적인 행동에서 근거를 한다. 차를 타고 가다가 유리창만 내리고 인사를 한 경우와 차를 세운 뒤 내려서 인사를 하는 경우는 평가의 차이가 크다. 굳이 술을 따라 주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어르신 한잔 받으세요”라는 말 한마디는 금세 마음 씀씀이에 대한 평가로 이어진다.

귀농냥으로 듣기는 했지만 맘씨 좋은 이들이 앞집에 산다는 건 다행이다. 이들 부부와는 멀리서 인사를 하는 정도지 서로 왕래 상황까지 발전하지는 않았다. 내가 이웃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면서 담을 허물고 싶은 생각이 아직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전의 시골 생활을 되살려 보면, 이웃집에 가는 것을 마치 자기 집 방문을 열고 닫듯 했던 어른들의 모습이 그리 유쾌하지 만은 않았다. 밥을 먹는 도중에 헛기침 한번 하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건 다반사였다, 잠이 깨지도 않은 이른 새벽에 찾아와 자고 있는 잠자리를 발로 쓰윽 밀며 공간을 마련해 앉던 모습도 그리 반가운 풍경은 아니었다. 

앞집과 나는 한두 마디 인사를 건네는 정도에 그쳤고 서로의 마당에 들어서지 않았다. 그러던 지난 6월 중순 무렵, 마당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앞집 50대 아저씨였다. 양손에는 수박 두 개가 들려 있었다.

“맛이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아니, 뭘 두 개씩이나….”

“맛이나 보시라고요”

 

수박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아침마다 트럭을 타고 나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어디서 어떻게 농사를 짓는지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수박을 두통이나 얻어먹은 답례로 무엇을 할까 궁리를 하다가 얼마 전에 만든 화덕에서 삼겹살을 구워먹자고 화답을 했다. 그는 날 더운데 시원할 때 하자는 말로 응답을 했지만, 처서 즈음에는 화덕에 언제 불 피울 것이냐고 물어오지 않을까 싶다.

낯선 마을에 정착한 이들은 이전의 사연을 이곳에 묻고 싶은지 모른다. 낯선 곳에 살다가 다시 고향에 정착한 이들 역시 도시의 사연을 묻고 싶은지 모른다. 귀농과 귀촌의 과정에서 주목할 부분이 그 사연이 아닐까. 거기에는 크고 작은 상처가 있어 때로는 바람으로 치유가 되기도 하지만, 바람이 상처를 건드릴 수도 있을 것이다. 바람의 상처를 생각하는 동안 멀리서 유모차 할머니가 비탈길을 걸어오고 있다. 호미 찾으러 왔냐고 인사를 건네자 들릴 듯 말 듯 대답한다.

“호미는 찾았는디 괭이를 놓고 갔네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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