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을 실었을 때 행복한, 삶의 운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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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르포

짐을 실었을 때 행복한, 삶의 운전사

by 토마토쥔장 2021. 7.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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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톤 트럭 운전하는 안연만 씨

  글 사진 성수진

  

짐차는 짐을 실었을 때 가장 행복하다. 안연만 씨는 종종 이 한 문장을 읊조린다. 지난 10년 그는 1톤 트럭을 몰며 필요한 곳에 짐을 실어다 줬다. 60대 중반 비교적 늦은 나이에 시작한 일,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했다. 자신이 먼저 무거운 짐을 들었고, 쉬라는 말에도 괜찮다 응수하며 더 많이 움직였다. 70대 중반의 지금, 그는 여전히 현역이다. 그를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은 “너 참 대단하다”, “네가 존경스럽다”라는 말을 하곤 한다. ‘잘나가던’ 그가 풍파의 시간에도 꺾이지 않고 새로운 삶을 일구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삶이란, 소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다. 안연만 씨는 날 생(生) 자가 소(牛)가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형상임을 기억하려 노력한다. 언제나 불안하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게 삶이지만, 묵묵하게 외나무다리를 건너야 한다. 그러다 보면 짐차에 짐이 차고, 우거진 꽃나무 사이를 지나며 웃는 날도 온다. 

  

  

출세, 어렴풋했던 꿈 

1946년 논산시 성동면에서 태어나 교육열 높은 가정에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성동면에서 서당을 운영했고 아버지는 야학을 했다. 글을 모르는 이웃의 편지를 읽어 주는 것은 아버지의 몫이었다. 배워야 한다. 아버지는 언제나 강조했다. 8남매 중 맏이인 안연만 씨에게 거는 기대도 컸다. 큰아들을 잘 가르치면 집안을 이끌어 갈 거라는 기대였다. 어린 그 역시 아버지의 바람에 부응하고 싶었고, 그것을 꿈으로 알고 자랐다. 

“언젠가 아버지가 밥상머리에서 ‘우리가 시골에서 자수성가해 농사도 많이 짓고 산다마는, 우리 집안에 선생이 있냐, 면서기가 있냐’ 그런 말씀을 했어요. 면 소재지에 의용소방대라는 게 있었는데 우리 집안 형님이 총무를 했어요. 그때는 의용소방대가 정말 끗발이 셌거든요. 나는 커서 소방대장을 하리라, 벼슬을 하리라,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을 하게 됐지요.”

강경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교에는 진학하지 못했다. 대학교 입학과 동생 두 명의 교육 기회를 맞바꿔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8남매를 똑같이 가르치고 싶어 하셨고 안연만 씨도 아버지 의견에 수긍했다. 그를 필두로 8남매 모두 고등학교까지 마쳤다. 시골 마을에서는 드문 경우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 해병대에 입대했다. 크지 않은 키 때문에 합격하지 못할 줄 알았는데 신체검사에서 아무런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다. 훈련 중 웅변대회가 있었고 학창 시절 웅변을 잘했던 그는 망설이지 않고 참가했다. 좋은 성적으로 1주일 포상 휴가를 받았다. 

그가 속한 청룡부대는 월남 파병이 예정되어 있었다. 걱정하는 부모님에게 그는 ‘죽을 사람은 여기서도 죽고, 살 사람은 월남 가서도 산다’라는 말로 위로를 건넸다. 청룡부대는 전투병으로 참전했는데, 그는 보급반이 되었다. 보급반 인원이 모자라 지원자를 받아 한문 시험을 치렀던 것이다. 어려서부터 한자 공부를 했던 그는 시험에서 만점을 받았다.

“1965년 6월 28일 1진으로 월남에 갔어요. 나이도 어리고 쫄병이니 선발대로 가게 된 거죠. 다른 사람들은 10월에 어마어마하게 큰 연락선을 타고 왔는데, 나는 쪼깐한 배를 타고 15일 걸려 나트랑으로 갔어요. 죽으러 간다는 생각 때문에 무서웠죠.” 

어머니가 막냇동생을 낳았을 즈음이었다. 돌도 되지 않은 아이를 업고 부모님은 절로 향했다. 아들을 위해 몇 번 절할 수 있냐는 물음을 들었을 때, 아버지는 천 번을 하겠다고 답했다. 아흔여덟 번 절하고 아버지는 쓰러졌다. 자식 사랑이 대단하신 분이었다. 

“당시 월남전에 일진으로 간 사람들은 전부 경찰서, 시청 이런 데하고 자매결연을 했어요. 우리 아버지는 경찰서하고 연을 맺었는데, 경찰서에서 아버지께 송아지와 돼지 한 마리 중 어떤 걸 가지겠냐 물어봤어요. 아버지는 돼지를 갖겠다고 하셨죠. 당신이 욕심을 부리면 아들이 잘못될까 봐 행동을 조심하신 거예요. 우리 아버지 참 훌륭하신 분이었죠.”

14개월을 보급반에서 근무했다. 1진으로 파병됐지만, 귀국할 때는 6진으로 왔다. 파병 경험이 있는 병장은 소대장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제대까지 많은 시간을 휴가로 보냈고 6개월 후 안연만 씨는 다시 고향 집으로 돌아왔다. 무엇을 해 먹고살지가 고민으로 남아 있었다. 

 

  

사업 그리고 인연, 출발선에 서다

“스물세 살에 내가 뭔 장사를 할까. 그때만 해도 어린 마음에 고물 장사를 하면 돈을 벌 것 같았어요. 엿장사들 자문을 받았는데, 그 사람들이 저를 보고 나이도 어리고 경험도 없다고 못 한다고 그래요. 엿장사들을 다룰 수 없을 거라는 뜻이었죠. 다시 고민한 결과 중고품 옷 장사를 하면 되겠다 싶었어요.”

쌀 한 가마니가 2천5백 원이던 시절, 양복 한 벌은 5만 원 돈이었다. 기성복이 없었고 양복은 맞춰 입어야 했는데,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서울 동대문, 남대문 시장에는 중고 신사복 장사가 성행했다. 안연만 씨는 시대와 필요를 읽었고, 장사 수완이 있었다. 

중고 신사복 가게를 운영하던 중 아내를 만났다. 1968년 6월이었다. 담배를 입에 대지 않았던 그는, 서울을 오가며 버스 안에서 담배 냄새를 맡는 게 고역이었다. 자연스레 담배를 태울 것 같지 않은 사람 옆자리를 찾게 됐다. 

“저 아가씨는 담배 안 피겄지, 하는 생각이었어요. 둘이 타고 가다가 얘기를 한 거죠. 내가 스물세 살이라고 하니, 아가씨는 스물네 살이라 하대요. 나중에 알고 보니 열아홉 살이었어요. 우리 아버지가 개띠, 우리 어머니가 호랑이띠 서로 네 살 차이인데, 저하고 아내도 개띠, 호랑이띠, 딱 네 살 차이였던 거죠.” 

버스 옆자리에 앉은 것을 계기로 장차 아내가 될 사람과의 인연을 이어 갔다. 당시 가수가 꿈이었던 아내는 부안에서 서울로 음악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두 사람은 종종 서울에서 만나 시간을 보냈다. 

“나중에 우리 식구에게 이야기를 들어 보니, 서울 길거리에서 점치는 할머니한테 언제 가수가 될지 점을 봤다고 해요. 그런데 할머니가 만나는 총각이 있구먼, 운을 떼더래요. 우리 식구가 저는 생각지 못하고 만나는 사람이 없다고만 말했는데, 할머니가 그 사람을 잘 붙들라고, 널 출세 시켜 줄 사람이라고 했대요.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당시 만나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고, 또 제가 잘 산다고 풍 좀 쳐 놓은 게 있어서 기대를 걸었나 봐요.”

가수가 꿈인, 노래를 잘 부르던 열아홉 살 아내는 안연만 씨를 믿고 마음을 열었다. 그의 부모님은 아들의 짝을 환영했지만, 장인어른 될 분의 입장에서는 걱정이 많았다. 

“가을이 돼서 우리 식구가 장인어른한테 내 얘기를 했나 봐요. 장인어른이 쫓아 왔죠. 해병대 제대 했다는데 큰일 났다는 거였죠. 그 동네에 고약한 놈이 있었는데 해병대를 나왔나 봐요. 혹시 딸이 그런 놈을 만났을까 봐 쫓아오신 거였죠. 그때 저는 효도하는 얘기만 했어요. 잘 보이고 싶었으니까요. 장인어른을 우리 집에 모시고 갔는데 마당에 벼 해 놓은 게 많은 걸 보시고 마음이 놓이셨는지 딸을 두고 가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같이 살았죠. 이듬해 1월 8일 결혼했어요.”

아내를 만나고 사업은 순풍에 돛 단 배처럼 순조롭게 흘러갔다. 아내는 세탁소를 운영하기 시작했고 안연만 씨가 받아온 중고 신사복을 수선했다. 1년 후 큰딸이 태어났다. 아내가 스무 살, 그가 스물네 살 때였다. 

사업을 시작한 지 3년 만에 큰 가게를 살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다. 중고 신사복 가게는 그가 스물아홉 살이 될 때까지 운영했다. 기성복 센터가 등장하고 중고 신사복을 찾는 사람들이 서서히 줄어들 무렵, 그와 아내는 다시 한번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자루에 돈 담던 시절, 서서히 드리운 그림자

논산에 농사짓는 인구가 많다는 점에 주목했다. 통일벼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고, 보온 못자리를 만들기 시작하던 때였다. 안연만 씨는 보온 못자리나 비닐하우스 등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자재를 구해 팔기 시작했다. 대만에서 대나무를 들여오는 수입업자를 알게 돼 인천 연안부두에서 대나무를 구했고, 대구에서 천막을 끊어 왔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필요한 재료를 사 갔다. 

“못 파는 날 천만 원어치를 팔았죠. 장사를 하다 보니 부여 사람들이 논산에 물건을 사러 온다는 걸 알게 됐고, 우리 식구랑 나랑 부여장까지 가서 장사를 하기 시작했어요. 보통 한 천삼백만 원, 천오백만 원어치를 팔았어요. 전대에 돈을 넣는 거로는 부족해서 돈을 자루에다 담아 왔어요. 저녁에 집에 오면 우리 새끼들이 돈을 세었어요. 넌 만 원짜리, 넌 오천 원짜리, 넌 천 원짜리 세어라 시켜도 한 시간 내에 천오백만 원을 정리하지 못했어요. 그렇게 돈을 많이 보니까 간이 커졌지요.”

사업은 날이 갈수록 융성했고 아이들이 태어났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들이었다. 지역사회에서 안연만 씨를 찾는 일도 늘었다. 논산여자고등학교와 강경상업고등학교의 육성회장을 오래 맡았다. 모교인 강경상고에서는 후배들 앞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안연만 씨는 지역의 인사였고, 학생들은 성공한 선배의 강의에 집중했다. 때론 우스갯소리도 하며 그는 좌중을 압도했다. 

“너네들 왜 머리를 내리고 다니냐, 이마를 까라, 이마는 하늘이다, 하늘을 가려 구름이 끼면 출세를 하겠냐. 교장 선생님을 봐라. 이마가 벗겨졌지 않느냐. 제가 이런 소리를 하면 교장 선생님이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손으로 머리를 가리키는 동작을 하고 그랬죠.”

안연만 씨는 어려서 막연히 꿈꿨던 출세의 길을 차분히 밟아나가고 있었다. 성동면 의용소방대장이 되었고, 여러 단체의 임원으로 활동했다. 배움의 열망도 채워 나갔다. 충남대학교 행정대학원 관리자과정에서 공부했고 미국 하버드 법과대학원 고위정책과정을 수료했다. 그리고 시의원에 출마했을 때, 그의 호적상 만 나이는 47세였다. 안연만 씨가 제2대 논산시의원이 되고 머지않아 아내 한영숙 씨가 보궐 선거로 당선됐다.

“아마 전국에서 지금까지도 내외간 시의원 한 사람은 우리밖에 없을 거예요. 당시 충남에서 여성 의원은 단 한 명 당선됐는데, 그게 우리 식구였죠. 우리 식구가 정견 발표를 참 잘했어요. 사람들이 저 여자가 얼마나 잘하나 보자, 하다가도 감탄했으니까요.”

변화가 많았던 시기였다. 딸을 일곱 낳아 기른 부부는 아들을 바랐고, 드디어 아들을 낳게 되었을 때 아내는 의원 활동보다 육아를 택했다.

시의원 활동은 농자재 사업을 그만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사람들이 값을 적게 치르거나 외상을 하더라도 그것을 엄격히 통제할 수 없었다. 장사를 지속할 수 없겠다는 판단이 섰고, 가게를 동생에게 넘겼다. 대신 안연만 씨 부부는 시청 앞에 목욕탕, 다방 등이 입점할 건물 건축을 계획했다. 하지만 공사는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어찌어찌 부평에서 직영으로 목욕탕을 운영하기 시작했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오래 속을 썩었던 아내는 위암에 걸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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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해진 믿음으로 다시 시작하다

“사람들마다 아내가 얼마 못 산다고 했지요. 먹을 걸 제대로 못 먹어서 몸무게가 38키로 나갈 정도였으니까요. 제일 마음 아팠던 것은 우리 식구가 노래를 못했던 거였어요. 식구가 시의원 하면서 회갑 자리 같은 곳에 가면 한 곡 하는데 얼마나 잘했는지 몰라요. 저 노래를 어찌 들어볼꼬. 그게 제일 가슴이 아팠어요.”

열 일 제쳐두고 아내의 간병에 힘썼다. 2년의 시간이었다. 아내가 포도만 먹고 싶어 했던 때가 있었다. 11월, 포도를 구하기 어려운 계절이었고 안연만 씨는 아내를 위해 전국을 다녔다. 

“내가 얼마나 기도를 했겠어요. 내 재산을 다 가져가도 좋으니 우리 식구만 살려달라고 했죠. 우리 식구가 산다면 하나님 일을 하겠습니다……”

아내는 조금씩 몸 상태를 회복했다. 그가 했던 기도대로 아내는 신학대학에 진학했고 대학원 공부까지 마쳤다. 아내는 부흥회를 다니며 간증을 하기도 했는데, 중국에 다녀온 것이 계기가 되어 안연만 씨와 함께 중국 여러 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했다. 신학교를 세웠지만 계속 운영하기엔 어려움이 따랐다. 

함께 중국에 간 딸이 중학교에 다니고 아들은 초등학교에 다녔는데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들이 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중국인 학생들과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인이라는 것이 때로 놀림과 멸시의 이유가 되었다. 

부부는 고민 끝에 한국행을 택했다. 두 사람의 신앙은 여전히 견고했고, 목표했던 전도는 우리나라에서 계속 이어갈 생각이었다. 대전에 자리를 잡았다. 전과 달리 손에 쥔 게 없었다. 60대 중반 나이에 새롭게 도전할 만한 일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학교 선생님이 아버지 뭐 하시는 분이냐 물었을 때 아들이, 우리 아버지 논다고 답을 했다네요. 그때 안 되겠다 싶었어요. 근면성실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었죠. 목회 활동 하는 큰딸에게 상의했죠. 마침 기계 제작을 하는 교인이 1톤 트럭이 있으면 일을 줄 수 있다고 해서 중고로 트럭을 샀어요.”

하지만 일은 잘 풀리지 않았다. 먼저 일하고 있던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들어갈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의 일을 뺏는다는 생각 때문에, 정작 일은 일주일도 하지 못하고 트럭은 주차장에 두었다. 트럭을 다시 팔려 했지만 400만 원 주고 샀던 트럭 값이 190만 원으로 떨어져 있었다.

“정보지에서 보니 1톤차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더라고요. 신사 양복을 딱 입고 면접을 보러 갔죠. 제 나이를 알고 사장이 ‘일 하시겄슈?’ 하고 묻더니 집에서 기다리면 연락을 준다고 했죠. 그사이에 젊은 사람이 왔으면 그이한테 일을 줬을 텐데 제게 기회가 생겼어요.”

열심히,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열심히 일하며 업계에서 입지를 다져 갔다. 그의 근면성실함을 눈여겨본 한 사람이 천안의 납품처를 소개해줬고, 안연만 씨는 회사에서 나와 혼자 일하기 시작했다. 노은 농수산물 시장의 야채, 과일 등을 천안의 마트 대여섯 군데에 납품하는 일이었다.

마트 운영이 어려워져 폐업할 때까지 5년간 그는 한결같이 천안을 왔다 갔다 했다. 일이 끊기자, 여기저기서 도움의 손길을 뻗어 줬다. 처음 들어갔던 회사에서 함께 일한 동료들이 자신의 사무실을 따로 차린 경우가 많았고, 그들이 이곳저곳에 안연만 씨를 소개했다. ‘안 씨 아저씨라고, 좋은 사람이 있다’라는 소갯말을 듣고 안연만 씨에게 일을 맡긴 사람들은 다음에도 그를 찾았다. 사람들이 믿고 일을 맡겼다. 

  

  

듬직한 짐차를 끌고

그야말로 ‘잘살던’ 시절에 유년 시절을 보낸 딸들과는 달리 막내아들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비빌 언덕을 만들어주지 못한 게 마음이 쓰인다. 하지만 잃어버린 부가 아쉽지는 않다. 아내의 목숨과 바꾼 것이었고, 재산이 담보해 주는 것은 없다는 걸 오랜 시간에 걸쳐 깨달았기 때문이다. 가진 게 많았던 시절엔 그만큼 보이는 것도 적었다. 돌아보면, 많이 가졌을 때 베풀며 살지 못한 게 후회스럽다. 

“너무 쥐면 손이 아프고 너무 짊어지면 등이 아프다는 말이 있잖아요. 이렇게 없어지고 보니까 그 시절 더 베풀지 못한 게 제일 후회돼요. 지금은 전보다 가진 것은 적지만 베풀며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일할 때도 내가 더 무거운 걸 들고 싶어요. 그래야 복 받죠. 내 역할은 실어다 주는 것만이고 올려다 주는 건 아니다, 하면서 팔짱 끼고 있지는 않아요. 도와주면 좋은 거죠. 사람들이 그런 모습을 보고 일을 주는 거예요.”

막내아들에게 물려줄 것은 근면성실밖에 없다는 생각에 더 열심히, 즐거운 마음으로 일한다. 아침에 일어나 1톤 트럭이 필요하다는 전화를 받으면 그만큼 기쁜 일이 또 없다. 

최근 안연만 씨는 어쩔 수 없이 일을 쉴 수밖에 없었다. 몸이 피곤했는지 어느 날 자고 일어났더니 사물이 두 개로 보였다. 병원에서는 눈을 지나는 신경에 문제가 생겼다며, 한동안 쉬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했다. 눈이 나으면 그는 다시 일을 시작할 것이다. 건강이 허락하는 날까지 계속 일할 생각이다. 

아들에 대해 생각하면 아버지를 떠올리게 된다. 돌이켜보니 아버지가 물려 준 가장 견고한 유산은 삶을 대하는 태도였다. 마을에 교회가 생겼을 때, 아버지는 교회가 유지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추운 날엔 직접 땔감을 짊어지고 교회로 향했고, 목사님이 배를 곯지는 않는지 알뜰살뜰 챙겼다. 오랜 시간 손자를 바랐을 테지만 내색하지 않으셨고, 아들보다는 며느리 마음을 헤아리려 하셨다.

“여섯째 딸을 낳을 무렵, 제 남동생이 장가가지 않은 때였어요. 우리 아버지가 얼마나 손자를 보고 싶어 하셨겠어요. 며느리가 딸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고, 밖에 계시던 아버지가 집에 가려 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어디 가냐고 물어봤다는 거예요. 우리 며느리가 딸을 낳았다고 해서 간다고, 아들 낳았으면 안 갈 텐데 딸 낳았다고 해서 간다고 하셨대요. 미역하고 고기를 사 오신 아버지가 제 아내에게 ‘딸 낳았다고 서운히 생각 마라, 소중히 예쁘게 키워라’ 이 말씀을 하시고 가셨다고 해요. 저는 모르는 얘기였어요. 우리 식구는 아버지 같은 분이 또 없을 거라고, 당신은 아버지만 하려면 어림도 없다고 말하곤 해요.”

아버지처럼 안연만 씨 역시 8남매의 아버지가 되었다. 8남매 모두 잘 커 주었고 사회에서 자신의 몫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딸 세 명이 목회자가 되어 하나님 일을 하고 있으니, 예전의 약속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셈이다.

모든 게 비워지고 많은 것을 잃어버린 후, 안연만 씨의 짐차에는 새로운 짐이 가득 찼다. 물질보다는 마음을,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 짐칸을 든든하게 받쳐 준다. 지나온 시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 인생에 어떠한 일이 생길지 모르지만, 날 생(生) 자가 뜻하는 바를 가슴에 새기며 묵묵하게 걸어갈 것이다.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소처럼 우직하게, 뒤돌아보지 않으며 지금의 기쁨에 대해 생각할 것이다. 그렇기에 두렵지 않다. 

 

월간토마토 vol.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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