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엣지 있는 도장 가게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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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르포

우리 동네 엣지 있는 도장 가게 아저씨

by 토마토쥔장 2021.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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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일당인장포 한진희 씨                                                                                                                                                              글・사진 이용원

 

 

우리 동네 엣지 있는 도장 가게 아저씨

 

한진희 씨가 들어가 앉은 그 좁은 공간을 바라보며 전투기 조종석이 떠올랐다. 빨간색 중절모와 감각적인 분홍색 와이셔츠에 넥타이, 체크무늬 신사복 바지에 낡은 구두를 꺽어 산른 한진희 씨 모습은 빨간 머플러를 두르고 전투기 조종석에 오르는 조종사와 흡사했다.

* 이 원고 마무리는 남인수 노래와 함께 했음

1.

한진희 씨는 KT&G에서 생산하는 담배 중 제법 긴 축에 속하는 ‘한라산’을 입에 물었다.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이지 않고 대부분은 그냥 물고 있었다. 제때 빨지 않은 담배는 불이 꺼지기 십상이었다. 그때마다 라이터를 찾아 타다 만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필터 가까이 담배가 타들어가면 금방 새로운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또 불을 붙였다.

“담배를 많이 피우시네요?”

“일할 때는 담배를 펴야 돼, 긴장 하니까. 일 안 할 때는 안 펴.”

“60년 동안 하신 일인데, 아직도 긴장을 하세요?”

“…”

담배를 바꿔 물 때도, 묻는 말에 짧게 답하거나 아예 답을 하지 않을 때도, 시선은 늘 45도 아래로 고정한 채였다. 머리엔 새빨간색 중절모를 썼다. 한진희 씨는 한 법인 관계자가 맡긴, 열 자도 넘는 문구를 지름 1cm 남짓한 도장 둥근 면에 새겨넣는 중이었다. 도장 가장자리까지 빼곡히 글자를 앉힌다. 조금도 공간을 허투로 쓰지 않는다. 글자의 각 획이 만들어낸 경계가 다치지 않도록 필요에 따라 수시로 조각도를 바꿔쥐며 손을 재게 놀린다. 한 번에 조금씩 조금씩 파낸다. 성질 급하게 욕심을 부리다가는 경계를 뭉갤 수 있다.

멀뚱히 서서 이것저것 묻는 손님을 한 번 쳐다보고는 한 손을 오른 편 선반 위로 쭉 뻗어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볼펜과 함께 건넨다.

“거기 뒷면에 써 놓고 일 보고 와,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괜찮아요. 기다려도 되어요.”

집중하는데 방해되고 조금 귀찮은 눈치였지만, 명함 뒷면에 글자 몇 자를 적어 건네곤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입을 다물었다. 한진희 씨는 다시 받은 명함에 적힌 글자를 훑어보고는 무심하게 한쪽에 툭 던져둔다. 별다른 말 없이 다시 동그란 도장에 조각도 꽂아 넣는 작업을 계속 한다.

한진희 씨가 작업하는 공간은 전체가 가로 2m, 세로 1m 남짓이었다. 반 평도 안 되는 공간이다. 건물 한쪽 외벽, 기둥과 기둥 사이에 오목하게 들어간 부분을 이용해 문만 만들어 달아둔 것처럼 보였다. 아니면, 건물을 지을 때 작은 창고로 계획한 공간을 개조한 건지도 모르겠다. 문을 활짝 열어두면 한데인지 건물 내부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래도 ‘동일당 도장명함’이라는 번듯한 간판이 걸렸다. 도장면에 글자를 채워넣은 것처럼 점포 상단에 허투로 쓴 공간없이 꽉 맞춰 달아 둔 간판이다. 그 좁은 공간에 온갖 물건이 쌓였다. 출입문 쪽으로 붙여 만든 작업대 위에는 조각도와 조각대를 비롯해 도장을 파는데 직접 필요한 물건이 가득하다. 한쪽 벽에 각목으로 얼기설기 만든 선반 위에는 감각적인 중절모 몇 개가 포개 놓였다. 출근할 때 입고 왔을 양복 상의를 한쪽 벽에 걸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사진 몇 장도 벽면에 붙였다. 덕분에 상업공간인 인장포는 개인 작업실 느낌을 강하게 주는 공간으로 변모했다. 도장을 파는 일은 두 손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면 충분했다. 반 평도 안 되는 그 좁은 공간이 넉넉해 보이는 이유다.

2.

조각대에 꽂아 둔 쐐기목 몇 개를 풀어 동그란 도장을 꺼내고는 입으로 호호 불어 부스러기를 제거한다. 손가락에 침을 발라 주먹(붉은 빛깔을 내는 먹)을 묻힌 후 도장 표면에 바른다. 구석에서 사포 한 장을 꺼내 글자를 새긴 도장 표면을 슥슥 문지른다. 인주를 발라 종이에 찍어본 후 조각대에 꽂아 아쉬운 부분을 다듬고는 다시 꺼내 빈 종이에 꾹 눌러 찍는다. 원형 도장에 힘이 골고루 실리도록 신중하게 누른다. 손님 눈앞에 도장이 찍힌 종이를 내밀어 확인을 받고는 도장 지갑에 도장을 넣어 건네는 것으로 짧지 않았던 작업을 마무리한다. 대략 한 시간 가까이 걸린 듯싶다.

앞선 손님 작업을 마치고 조그만 가게 밖으로 나온 한진희 씨는 펫트병에 담아둔 물에 손과 입을 헹구고 허리를 한 번 편다. “아침에 먹었어야 할 약을 빼먹었다.”라며 이것 저것 꺼내 입에 털어 넣는다. 약 먹는 것도 그에겐 익숙한 일상이다.

그렇게 작업 하나를 끝내고 밖에 나와 숨을 돌리는 시간은 1분도 채 안 되었다. 가게 문 한쪽을 손으로 잡고 빙그르르 돌며 작업 의자에 ‘척’ 앉는 모습이 무척 날렵하고 익숙하다. 도대체 몇 번을 반복했을지 모를 반복적인 행동의 유려함은 아름답기까지 하다. 한진희 씨가 들어가 앉은 그 좁은 공간을 바라보며 전투기 조종석이 떠올랐다. 빨간색 중절모와 감각적인 분홍색 와이셔츠에 넥타이, 체크무늬 신사복 바지에 낡은 구두를 꺾어신은 한진희 씨 모습은 빨간 머플러를 두르고 전투기 조종석에 오르는 조종사와 흡사했다.

“옛날 문인들 보면 글을 쓰고 끝에 낙관을 찍잖아요. 그런 도장을 파고 싶어요. 한자가 아닌 한글인데 정자로 쓰면 좀 이상하겠죠?”

“이런 건 해서로 쓰면 안 돼, 전서로 써야지.”

내가 맡긴 글자는 여섯 자였다. 도장에 새길 내용이, 한눈에 확 알아보면 부끄러운 내용이었다. 이런 마음을 알았는지, 아니면 도장이라는 것이 본래 그런 것인지, 한진희 씨는 모음 획을 심하게 구부리고 연장하며 변형해 글자를 만들었다. 전서체란다. 손으로 파는 도장이 고유성을 가지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같은 문구를 같은 사람이 새기더라도 기계가 아닌 사람이 새기면 완전히 똑같은 결과물은 나오지 않는다. 인간이라서 그렇다. 인간은 본래 그런 것이라는 걸, 자꾸 망각한다.

한진희 씨는 사각 모양 도장을 골라 조각대 가운데 끼우고 쐐기목을 채워 움직이지 않도록 단단하게 고정했다. 여지없이 담배 한 개피를 뽑아 물었다. 작업의 시작이다. 다양한 조각도 중 하나를 골라서 들고는 네 귀퉁이 끝에서 조금 안으로 들여 선을 파기 시작했다. 가이드는 왼손 검지손가락이다. 조각도에 갈 길을 알려주는 손가락은 긴 세월에 제 구실을 하며 적절하게 손에 딱 맞는 도구로 변했다.

 

3.

한진희 씨 고향은 중국 만주다. 1936년 만주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까지 살았다. 전북 진안이 고향이었던 아버지 한상갑 씨는 당시 중학교를 졸업했다. 무척 똘똘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아버지는 일본 사람이 운영하는 회사에서 급사 일을 하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돌연 만주로 떠났다. 그곳에서 포마드 공장을 설립하고 운영했다. 머리에 바르는 그 포마드 기름 맞다.

“돈을 정말 많이 벌었다고 하시더라고, 허리에는 칼을 차고 인력거를 타고 다닐 정도로 말이야. 나하고 어머니는 내가 여섯 살 때 먼저 한국으로 들어왔어. 지금은 물에 잠겼는데, 진안군 정천면이라는 곳이었지. 외가가 그곳이었거든. 거기가 내 제 2의 고향이지. 지금은 용담댐 만들면서 물에 잠겼잖아.”

만주에서 아버지 사업은 잘 되었다. 집을 몇 채 살 정도였다. 고향에 있던 처남들을 데리고 만주에 갈 생각으로 귀국했을 때, 갑자기 남북 통행이 힘들어지면서 다시 만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재산을 모두 잃었다. 만주에서 아버지가 고향에 올 때 들고온 우황청심환 몇 개가 전부였다. 만일 역사가 달랐다면 한진희 씨는 일가 친척 몇몇과 다시 만주에 가서 지금껏 살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거대한 세상의 흐름 속에 놓인 한 개인의 삶은 급류에 휩쓸린 것처럼 속수무책일 때가 있는 모양이다. 태평성대는 세상이 개인 운명에 어떤 개입도 하지 않을 때일지도 모른다.

한진희 씨가 만주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 인장포 벽에 걸렸다. 83년 전, 그의 나이 두 살 때 찍은 사진이다. 아버지 친구 내외와 함께 찍은 흑백 사진이다. 아버지 사진은 따로 한 장을 벽에 붙였다. 아버지 한상갑 씨가 스물일곱 살 때 사진이란다. 흡사 배우처럼 인물이 참 좋다. 일본말은 물론이고 중국말도 무척 잘했던 아버지다. 모든 것을 잃은 아버지는 부산에 내려가 인쇄 일을 하다가 대전에서 ‘활문사’라는 인쇄소를 지인과 함께 운영했다. 겨울에는 달력, 여름에는 부채를 주로 생산하던 인쇄소로 기억한다.

부산에 살 때 아미동 동신국민학교에 3학년까지 다니던 한진희 씨는 다시 외가가 있는 진안군 정천면에 돌아온다.

“외가 동네에 돌아와서는 모정국민학교에 다녔지. 엄마랑 산에 고사리 꺾으러 다니던 것도 생각나고 논에 자운영이 나면 꽃 피기 전에 따다가 삶아서 나물 무쳐 먹었던 기억도 나. 한국전쟁 때는 딘 소장이 산속으로 도망가고 부하들 50여 명이 우리 마을 앞으로 지나가는 것도 보았어. 아마 전주로 가는 길이었을 거야. 대부분 열여섯이나 열일곱 살 정도 먹어 뵈던데, 앳되었어. 난 열네 살 쯤이었고. 감자 삶아서 가져다주고 그랬지. 근데 빨갱이 사상 가진 놈들이 고자질해서 다 몰살 당했지. 불쌍혀.”

진안군 정천면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한진희 씨는 냇가에서 수영하고 고기 잡으며 놀다가 귀에 물이 들어가 귀를 심하게 앓았다. 중학교 입학 시험에 합격을 했지만 군에도 입대할 수 없을 만큼 청력을 잃었다. 당시 대전에 있었던 충남도청 앞에 강신호 이비인후과에서 수술하고 보청기를 달았다. 아버지는 진학보다 기술 배울 것을 권했다. 그때 선택한 기술이 ‘도장’이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인쇄소도 있고 배울 수 있는 기술이야 그것 말고도 많았지만 듣는 데 어려움이 있으니 혼자 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4.

당시 대전 중앙시장에 도장 기술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있었다. 전국에서 유명한 이도흥이라는 사람이었다. 북한 출신인 그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에게서 기술을 배웠다. 그 사람 밑에 머물며 도장 파는 기술을 배웠다. 당시 기술을 배우는 과정은 거의 비숫했던 모양이다. 처음부터 가르쳐주지 않고 맨 허드렛일만 시켰다. 도망치지 않고 견디면 조금씩 기술을 가르치고 일도 시켰다. 그래도 월급 같은 건 없었다. 명절에 고향에 간다고 하면 차비를 조금 쥐어줄 뿐이었다. 한국전쟁 직후, 한진희 씨 나이 열일곱 살 무렵이었다.

햇수로 3년 정도 기술을 배우고는 곧바로 서울에 갔다. 대전에서 기차 타면 열다섯 시간은 걸리는 먼 곳이었다. 후암동에 묵을 방을 구하고 효자동 미국 대사관 앞에서 노점상을 시작했다. 당시 목도장 하나 새기는데 30원 할 때다. 적은 돈이 아니었다. 쌀 한 납데기 가격이 30원이었던 시절이다. 쌀 한 납데기는 쌀 두 되란다. 도장 한 개에 쌀 두 되면 싸지 않다. 게다가 성인이라면 도장 하나를 모두 가지고 있어야 하던 시절이니 벌이가 괜찮았다.

“그때 장사가 정말 잘 되었지. 지금은 안 그래도 당시에는 도장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할 때잖아.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서울 생활을 접고 내려온 건,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났을 때다. 세상이 뒤숭숭했다. 길에 돌아다니는 청년만 보면 막 총을 쏴대니 견딜 수가 없었다. 

대전에 와서도 도장 파는 일을 조금 하다가 기타 학원을 차렸다. 중동에 있던 중도극장 옆에 가게를 얻었다. ‘부원기타학원’이었다. 그무렵 결혼도 했다. 스물다섯 살이었다. 서울 생활을 접고 내려온 대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듯했지만 사업은 실패로 돌아갔고, 결혼 2년여 만에 첫 번째 아내와도 헤어졌다. 27살 무렵이었다. 대전에 있기가 싫었다. 한진희 씨는 전라남도 고흥으로 내려간다. 기술이 있으니 먹고 사는 건 별 문제는 아니었다.

“고흥에서도 도장 파서 돈 많이 벌었어. 7년 정도 살았는데, 딴따라 하느라고 번 돈은 다 날렸지. 음악하려면 돈이 많이 들어. 친구들하고 같이 밴드를 했거든 아코디언, 드럼, 트럼펫 하는 친구들하고. 갸들 담뱃값 점심값 챙겨주는데 돈을 많이 썼지. 고흥에 박정희 대통령 온다고 해서 친구들하고 일주일간 밤 새워 ‘고향의 봄’을 연습했던 기억도 나네. 연주하려고. 그때 국회의원 선거 운동 기간이었고 고흥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한 신형식 씨 지원하려고 박 대통령이 내려왔거든. 그 사람 당선 되어서 건설부 장관도 했지. 그때 세탁소에 박 대통령 양복 맡긴 것도 보았어. 그냥 까만 양복이더라고. 세탁소 주인이 박 대통령 친구였어. 유상천이라고. 연주는 결국 못했어. 경호 문제때문에 할 수가 없다고 하더라고.”

기억을 이리저리 맞춰보면 1963년 치른 6대 국회의원 선거다. 한진희 씨가 고흥에 내려간 다음해 정도로 추정한다.

고흥에서 도장을 파며 돈을 벌고 동료들과 음악 활동을 하며 7년 정도 시간을 보냈다. 다시 대전에 돌아온 건 서른네 살 무렵이었다. 음악하는데 돈을 많이 써서 가지고 있는 건 별로 없었다.

 

5.

“지금 이 자리에서 인장포를 한 건 이제 40년이 좀 넘었네. 이 건물은 본래 요 옆에서 양복점 하던 사람 것이었지. 원래 건물 주인 동생이 카메라인가, 시계를 팔았고. 그 가게 내가 얻은 거지. 가게 열었을 때는 이 근방에 사람들이 꽉 차서 어깨가 걸려 못 다닐 정도였어. 역전에는 깡패들도 있고 꽃제비도 많았지.”

동일당인장포는 대전역에서 옛 충남도청 쪽을 바라볼 때 오른쪽에 있다. 대전역 사거리를 지나 첫 번째와 두 번째 블록을 나누는 골목길 초입이다. 나름 역세권이다. 사람들끼리 어깨가 부딪쳐 걸어다니기도 힘들었던 곳은 지금 하루종일 한산하다. 한진희 씨가 자리를 잠깐 비운 인장포를 기웃거리면 어디선가 아주머니 한 분이 나타나 한진희 씨에게 전화를 걸어준다. 서로서로 가게를 봐주는 따뜻한 정이 한산한 거리를 대신 채워준다.

가게를 시작하고 도장계에도 컴퓨터와 소프트웨어라는 신기술이 만나면서 어려움을 맞았다. 그때 한 1년 정도 문을 닫았을 때가 있다. 힘들게 살았다. 경제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이 힘들었다. 1년 여만에 다시 가게에 나오기 시작했다. 공치는 날도 있지만 별 상관 없었다. 

한진희 씨가 어릴 적부터 꾸었던 꿈을 직업으로 가졌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작업대 위에 놓인 CD 플레이어로 남인수 음악을 듣고 간혹 막걸리집에서 청에 의해 노래 한 자락 뽑는 것으로도 행복하다.

“나는 우리나라 최고 가수는 남인수라고 생각해. 정말 미성을 가졌지. 그게 미성이야. 가수들 모창하는 사람이 많지만, 남인수 모창하는 사람은 없다잖아. 그 사람이 본래 고향이 진주여. 진주 강씨지. 마흔 넘어서는 혼자 진주에 있는 묘소에도 찾아간 적이 있어. ”

대화 도중 한진희 씨는 틈만 나면 가수 남인수 이야기를 꺼냈다. 가게 벽면에도 남인수 사진과 함께 ‘가요계의 왕 평생 사랑하는 가수 남인수 선생’이라는 문구를 한자로 정성껏 써 붙여두었다. 요즘 아이들 말로 진정 ‘찐팬’이다. 음악을 듣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작곡가와 가수를 꿈꿨던 사람으로서 갖는 애정은 남달랐다. 서울에서 대전에 돌아왔을 때는 마침 남인수 팬클럽이 있어 가입했다. 한 달에 만 원 남짓한 회비도 냈고 중앙극장에 남인수가 공연하러 온다고 하면 맨 앞자리에 앉아서 보았다.

“어렸을 때 진안군 정천면에서 전체 학교 아이들이 모여서 학예회 같은 걸 했어. 내가 우리 학교 대표로 나가서 5등을 했지. 노래하는 걸 어려서부터 좋아했어. 원래 중학교에 가면 예술대학교에 가서 작곡가가 되는 게 꿈이었지. 서울 효자동 미국대사관 앞에서 도장을 파고 돈을 제법 벌었을 때 기타 학원을 다녔어. 그래서 내가 기타를 조금 쳐. 가수를 하고 싶어서 방송에서 하는 노래자랑에 참 많이도 나갔지. 다 떨어졌지만. 귀가 어두우니까 박자 맞추는 게 정말 힘들어. 그때 ‘빈대떡 신사’ 부른 한복남 씨가 심사 보고 그랬는데. 그즈음 작곡가 박시춘, 이복룡 사무실도 찾아다니고 그랬어. 가수를 하려면 귀도 잘 들려야 하고 치아도 좋아야 한다고 그러더라고. 난 귀가 안 들리니 어렵겠다는 얘기만 들었지.”

어린 시절, 청력을 잃으며 꾸었던 작곡가겸 가수의 꿈은 사라졌다. 한진희 씨는 이 ‘꿈은 사라졌다’라는 말을 하며 문장에 음정을 입혀 말했다. 하도 부드러워 구름이 생각날 정도였다.

청력을 잃었지만 젊은 시절엔 쉽게 포기하지 않고 기타도 배우고 각종 대회에도 나가고 작곡가 사무실도 찾아다니며 끊임없이 도전했다. 직업으로서 가수 활동을 하지는 못했어도 밴드를 결성해 합주도 하며 음악활동을 이어갔다.

이 모든 걸 가능케 한 것은 그가 10대 후반에 배운 도장 파는 기술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도장 파는 기술을 배워둔 것이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단다.

좀 더 이야기를 듣고 싶어 찾아간 날, 한진희 씨는 분홍색 자전거를 타고 가게에 막 들어오는 중이었다. 자전거에서 내리는 모습이 무척 가볍다. 그날은 빨간색 중절모에 맞춰 빨간색 넥타이를 맸다.

“내가 음악하는 사람이라 빨간색을 좋아해~”

한진희 씨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 오랜만에 ‘낭만’이라는 낱말을 떠올렸다. 60년 넘게 도장을 팠지만 여전히 자신을 ‘음악하는 사람’이라고 명쾌하게 정의하는 엣지있는 한진희 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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