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대전 (2)
본문 바로가기
토마토 칼럼

나의 살던 고향은 대전 (2)

by 토마토쥔장 2021. 7. 15.
728x90
반응형

  나의 살던 고향은 대전

글 사진 조성남<대전역사연구원장전중도일보주필>



2. 유년 시절의 기억과 추억

  1954년생인 필자가 태어나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자란 공간은 대전시 중구 목동(지금은 중구 선화로43번길77)에 있는 충남여자고등학교와 맞닿아 있는 대전학생교육문화원(전 학생도서관)과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아래쪽에 자리하고 있는 용두동 언덕에 있는 동네다이곳은 피난민촌으로 불리던 곳으로 지금도 5,60년대의 가옥구조가 일부분 남아 있는대전의 몇 안 되는 영세한 지역이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대전에는 갑자기 수많은 피난민이 몰려들어 살 집이 모자라자 곳곳에 판자와 푸대자루종이박스 등으로 집 모양을 갖추고 사람들이 살았는데 대전 천변을 비롯한 옛 KBS대전방송국이 있던 목동용두동대동 등지에 판자촌이 많았다이후 시가지가 정비되고 개발붐이 일면서 대부분의 판자촌이 철거되었는데 서대전초등학교와 충남여고 아래쪽의 필자가 유년 시절을 보낸 피난민촌은 아직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곳에 어느 날 화재가 나면서 다섯 살 무렵 15m쯤 떨어진 아랫동네의 단독주택으로 이사해 필자가 결혼해서 분가하기 전까지 살았는데이사를 한 이후에도 예전에 살던 이웃들과의 왕래는 필자의 초등학교 시절에도 계속돼 명절 때면 서로 음식을 나누어 먹고 했던 기억이 남아 있다. 1950년대는 한국전쟁 직후여서 먹고 입는 것 등 모든 물자가 귀하던 시절이었지만동네 사람들끼리의 인정만은 넘쳤다추석이나 설날 등 명절 무렵 어머니께서 필자를 통해 전에 살던 옆집에 쌀을 들러 보냈고 식구가 많았던 그 집에 자주 놀러 가 밥을 먹고 오면 필자를 혼내주던 기억도 떠오른다그때의 동네 모습은 좁은 골목길이 이어져 있고그 가운데로 나무판자 구조물과 지붕은 시커먼 콜타르가 칠해진 무언가가 얹혀져 있는 판자집이 연이어 있었다집안은 늘 어두웠다아마도 전기가 잘 들어오지 않았거나 전기를 아끼러 집안에서 전깃불을 켜지 않았던 것 같다대문 대신 나무로 얼기설기 집 입구 표시가 설치되어 있었고집 입구에는 장독대가 놓여 있었는데 겨울철에 장독대 위에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곤 했다그 당시의 기억에 아직도 남아 있는 풍경 중 하나는 그곳에 있었던 공중화장실 즉 공동변소다족히 수십 명이 살던 그곳의   주민에게 화장실은 이 공동변소가 유일했다아침마다 줄을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과 아주 어렸을 때지만그곳에 가는 일이 무슨 큰일 치르는 것처럼 여겨졌던 기억이 남아있다조금 심하게 말하면 이 공중변소를 이용하는 것은 거의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그때 어른들의 생활은 곤궁했지만철모르는 유년 시절의 필자는 이 일대가 더없는 놀이터였다무엇보다 봄철의 충남여고와 지금의 대성고등학교와 을지대학교 및 목양마을 아파트가 들어선 지역은 이곳저곳에 묘가 있는 야산이었다나중에 이사 간 단독주택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유성으로 가는 국도가 나 있을 뿐 큰 도로도 없고 주로 골목길이 많아 그 자체가 놀이 공간이었다또 1950년대 필자가 자란 지금의 삼성아파트 건너편 일대는 대부분 논과 밭이었고시골집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집도 많았다마당이 넓었고돼지와 거위를 키우는 집도 있었다어떤 점에서 선화동과 대흥동의 도심과 떨어진 이곳은 도심과 접한 농촌 마을과도 같았다유성으로 가는 국도도 포장이 되지 않아 어쩌다 차가 지나가면 뽀얗게 먼지가 일어나곤 했다(아마 군용차였거나 버스가 아니었을까 한다)가 지나가는 것을 기다렸다가 차 꽁무니를 따라가는 일은 아이들에게는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유년 시절 동네 골목에서 호랑이 모형에 올라 타 찍은 사진

 아카시아가 많았던 그때의 충남여고는 아이들에게는 아카시아 꽃이 필 때인 5월에는 일종의 낙원이었다달콤한 꽃 속의 꿀에 취해 높은 가지 위를 오르내렸던 아이들은 위험한 줄도 몰랐다그때는 지금의 충남여고가 대전사범학교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남녀공학이었던 당시의 대전사범학생들은 더러 길 건너편 목동성당이 자리한 야산으로 산보를 나오기도 했는데 남녀학생이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눈에 띄면 조그만 돌을 던지곤 줄행랑을 쳤다그런 게 그때 아이들의 놀이였던 셈이다지금은 대부분 건물이 들어선 목동성당 일대의 야산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또는 그 후에도 아이들의 놀이터였다골목에서 자치기나 구슬치기를 하다 질리면 몇몇이 그곳 야산으로 갔다이곳에는 무덤도 많았지만이런저런 나무와 꽃풀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아주 높지도 않은 동네 야산이어서 아이들에게 봄부터 가을까지 좋은 놀이 공간이었다지금의 목동성당과 수녀원이 있는 정상부근에서 산 아래쪽을 바라보면서 이곳이 세상 전부인 줄 알았다집에서 기르던 토끼에게 줄 풀을 뜯어다 주면 우리 속의 토끼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오물거리던 모습도 기억에 남아 있다

  초등학교 다닐 때는 여름방학 과제물로 곤충채집과 식물채집이 있었는데 방학 내내 놀다 방학이 끝날 무렵 이곳 야산에서 잠자리와 풍뎅이이름도 잘 모르는 풀과 야생화를 캐서 과제물로 내곤 했는데 그 당시의 동네 야산은 전쟁을 치르고도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자연환경이 좋았던 것이다온난화로 인해 지금은 겨울철에도 도시에서는 인공스케이트장에나 가야 두꺼운 얼음을 볼 수 있지만, 5,60년대 필자가 살던 용두동은 일대의 논과 유성 가도 쪽 개울이 썰매장으로 바뀌었다아버지가 만들어준 썰매와 나무막대에 못을 박은 작은 지레 같은 것을 들고 얼음 위를 지치곤 했는데어느 날은 기온이 갑자기 올라 얼음이 녹아 썰매가 물속에 빠져 옷을 모두 버리기도 했다그래도 아이들은 추운 줄 모르고 겨울 내내 바깥에서 보내곤 했다

  겨울철에 떠오르는 일 중 하나는 참새를 잡으러 나섰던 일이다지금의 을지대로 가는 언덕 아래쪽쯤 되는 곳은 논과 밭이었는데 그곳에 초가집이 있었고그 초가집에는 참새가 많았다또 봄철이면 제비가 날아와 제비집을 지어 제비들이 드나들던 집이었는데 겨울이 되면 동네 아이들은 이 집 처마와 초가지붕에 들끓던 참새를 노렸다그러나 참새를 잡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한밤중에 누군가 군인들이 쓰던 랜턴을 가지고 그 불빛을 비추면 참새가 자다가 아래로 떨어진다고 해서 몇몇이 소쿠리를 들고 야밤에 그곳에 갔는데 참새가 떨어지기는커녕 모두 달아나 허탕을 치고 말았다.

  1950년대부터 필자가 국민학교에 입학(1960년도)한 1960년대까지 대전은 한국전쟁의 후유증을 쉽게 극복하지 못했고 살림살이는 어려웠지만사람들 사이의 인정은 살아있었고 삶이 영위되는 자연환경은 지금처럼 개발되기 전이어서 아이들이 놀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