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다 자유로운 여행
글 윤대진
1.
수많은 시인이 인생을 길에 비유한 것처럼, 길을 걷는 것은 마치 인생을 사는 것과 비슷하다. 우리는 길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한다. 마음 따뜻한 친구를 만나 위로를 받기도 하고, 때론 어떤 친구에게 배신을 당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렇게 인생을 배운다. 누군가 내게, 교육에서 가장 완벽한 커리큘럼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고민도 하지 않고 “여행”이라고 말할 것이다. 여행길에서 만나는 사람과 다양한 경험은 인생에 대한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값진 순간이기 때문이다.
다윈(Charles Darwin), 마르크스(Karl Marx)와 함께 20세기 인류정신문명의 3대 혁신가로 꼽히는 지그문트 프로이드(Sigmund Freud)는 인간이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것은 자아에 대한 무의식적 억압 때문이라고 보았다. 우리나라 학생의 학업스트레스가 세계 최고 수준인 것은 학교의 사회문화적 특성에 의한 과도한 억압감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 본성대로 살 때 행복감을 느낀다. 본성은 억압보다는 자유로운 환경에서 잘 발현된다. 즉 학생의 행복은 자유로운 학교 분위기 속에서 본성을 발현할 때 찾아오는 것이다.
대개 일반학교에서는 교사들이 여행(수학여행, 소풍, 졸업여행 등)을 계획한다. 어떤 학교에서는 학생에게 선택의 자유를 주기도 하지만 이는 극소수이다. 사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많은 학교에서 해병대 캠프나 국토대장정에 학생들을 보내고 극기를 목표로 군기를 잡기도 했다.
학교의 여행에 자유로움을 추가하면 어떻게 될까? 이미 짜인 일정보다는 학생이 결정할 수 있는 여백이 많고, 결정된 계획에 종속되기보다는 언제나 바꿀 수 있는 융통성이 있는 여행. 반드시 무엇을 해야 하는 것보다는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여행 말이다.
2.
여름 여행을 한 달여 앞둔 자치회의 시간, 한 학생이 손을 들고 말했다.
“제가 제안하는 여행의 제목은 ‘라이킹’입니다. 자전거의 ‘라이딩’과 음악의 ‘버스킹’에 합성어에요. 더불어 ‘라이크+ing’로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많은 학생들이 의견을 제안했다. 좋은 아이디어가 넘친 탓에 예선, 본선, 결선 투표를 거쳤고, 최종적으로 이번 여행의 제목을 ‘라이킹’이라 부르기로 했다. 우리 학교는 학생들이 결정한 여행 제목을 검열과정 없이 거의 그대로 사용한다. 2016년, 교육청에 ‘병신년 중딩여행’이라는 제목의 공문을 보낸 것이 단적인 예화이다. 다소 무리되어도 이를 지키는 이유는 여행에 대한 학생들의 자치권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자치권의 존중은 창조적 사고를 촉진시키고 억압 너머의 본성에 다다를 수 있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여행 시기가 가까워질수록 자치회의를 통해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간다. ‘가고 싶은 장소’, ‘먹고 싶은 음식’, ‘하고 싶은 활동’ 이라는 주제로 회의를 하고, 선택과정을 통해 합의된 계획서를 만든다. 그 결과 이번 “라이킹”에서는 경기도 가평의 남이섬 일대에서 버스킹과 라이딩으로 조를 나눠 2박 3일간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그리고 나는 버스킹 조의 멘토가 되었다.
3.
“저는 음악을 정말 좋아해요. 그런데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은 두려워요. 그들이 제 노래에 대해 평가할 것과 나를 바라보는 것이 너무 불안해요. 아마 실용음악학원을 다니며 학원 선생님께 지적을 많이 받다 보니 불안이 심해진 것 같아요.”
다혜는 버스킹 조에 함께하게 된 음악을 좋아하는 학생이다. 고등학교에 입학 후 3년 가까이 실용음악 학원을 다녔고 곧 입시를 앞두고 있지만, 자기 음악에 대한 확신은 고사하고 수개월째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다.
억압을 넘어 자유를 지향한다는 것은 ‘저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실수하면 어쩌지?’, ‘사람들 앞에 서기가 두렵다’, 이런 불안 따위를 집어던지는 일이다. ‘저 사람의 판단은 결코 내 인생에 중요하지 않다’, ‘누구나 실수를 한다’, ‘너무 떨리면 까짓것 떨면서 부르면 된다’라고 바꾸어 생각해야 한다. 물론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오랫동안 몸에 밴 불안과 두려움은 단지 생각만으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불안이 몸에 배기까지 걸린 시간만큼 불안과 맞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4.
어느덧 여행 이틀차가 되었다. 남이섬 버스킹이 있는 날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평화롭던 다혜의 얼굴에 초조함이 묻어난다. 그리고 주변 환경에 대해 불평과 불만을 내뱉는다. 이런 반응이 낯설지 않다. 이는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의 공통된 반응이다. 단순한 짜증이기보다는 두려움과 맞서기 위해 온몸의 세포가 준비하고 있는 것이라 보는 게 교사에게 이롭다. 오랫동안 두려움을 느끼던 무엇과 맞선다고 생각해 보라. 심장은 몇 배나 더 빨리 뛸 것이고, 아드레날린은 과 분비되며, 각 세포들은 불수의적인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우리를 불안과 긴장상태에 빠뜨릴 것이다.
남이섬의 자유무대라는 곳에 도착했다. 버스킹 조의 공연이 시작되었고, 이제 마지막 순서이다. 다혜가 천천히 무대 중앙에 올라선다. 얼굴표정이 다소 부자연스러운 것을 보니 아직 불안과의 싸움이 한창인 것 같다. 잠시 후, 흐르는 리듬 속에 노래의 첫음절을 뗀다.
난 교사로서 이 순간을 사랑한다. 두려움에 맞서는 학생의 용기를 보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학생의 용기는 내게 새로운 힘을 준다. 그 힘이 청중에게 전해졌는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환호했다. 어느새 다혜의 얼굴에 묻어난 긴장이 사라졌다. 불과 몇 분 만에 이전과 다른 에너지의 사람이 된 것이다. 버스킹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는 다혜가 보인다.
5.
‘그래 중요한 것은 자기 본성을 발현하는 것이다. 내면의 목소리를 세상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
우리는 길에서 마치 여행하듯이 인생을 배운다. 인생은 미지의 길이기에 어떤 여행에서도 배움을 통해 지혜를 얻기 마련이지만, 본성을 지향하는 자유로운 여행은 우리를 행복의 길로 인도한다. 그것은 억압이라는 산 너머의 더 큰 자아를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기를 억압하는 것이 무엇인지, 자기의 본성을 발현하는 것은 무엇인지, 숙고하고 또 숙고해야 할 이유이다. 학생에게, 교사에게, 나아가 현대사회를 사는 모든 이에게 보다 자유로운 여행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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