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위에 쓰여진 일기, 어쩌면 같은 마음
밴드 피난
글 사진 이주연
딱 요즘 같은 날이다. 밴드 피난의 노래를 듣기 좋은 날 말이다. 늦은 밤까지 일을 한 뒤, 쌀쌀한 날씨 탓에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듣는다. 적당히 밝은 멜로디를 까 보면 적당한 우울감이 남아 있다. 차분해지는 마음과 함께 오늘의 피로를 조금은 보상받는 기분이다. 오롯이 나 혼자만의 것이라 생각했지만, 우리 모두가 가진 고민과 우울이었다.
또다시 난 어디로든 가야 하지 살아가기 위해선 끊임없이 움직여야지 나 길을 잃어버렸지만
나를 잃을 순 없네 오 날 따듯한 숨이 흐르는 세상에서 나를 좀 쉬게 해 주세요 나를 당신의 가슴에 숨겨줘요 숨 쉬게 해 줘요
<피난> 중에서
노래 속으로 피난하다
“살면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혼자 생각할 수 있을 만한 우울을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피난 보컬 유동욱 씨의 이야기다. 일상 속에서 누구나 느끼는 우울과 외로움을 노래에 담았다. 동욱 씨는 평소 자신이 느꼈던 생각을 일기장에 적어 두었다가, 문장 몇 부분을 이야기를 가져와 노랫말로 만든다. 동욱 씨의 이야기이지만, 어쩐지 내 이야기만 같은 느낌이 든다. 종종 우리는 외로움과 우울을 느끼고, 이겨내며 살아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피난은 보컬 유동욱, 기타 송민우, 베이스 김은범, 드럼 김선구로 이루어져 있다. 선구 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밴드가 처음이다. 선구 씨는 이전에 다른 밴드에서 활동하다 피난에 합류했지만, ‘좋아서 하는 밴드는 처음’이라고 말한다. 어찌 보면 모두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이다.
밴드가 결성되기까지의 과정을 들어 보면, 알음알음 아는 사람들 모아 놓고 시작한 것만 같다. 피난은 동욱 씨와 은범 씨의 프로젝트 팀에서 시작했다. 동욱 씨는 “그때 공연을 하고 싶었는데, 마침 추진력은 좋은데 책임감은 부족한 친구 한 명이 이리저리 전화를 돌려 사람을 모았어요. (웃음) 거기서 은범이를 만났고, 같이 밴드 해 보자고 이야기했죠”라며 둘의 인연을 들려줬다. 동욱 씨가 말한 ‘추진력은 좋으나 책임감이 부족한’ 친구는 사람을 모아 놓고 갑자기 빠져 버렸다. 공연을 이끌어갈 친구가 빠지는 바람에 남은 이들이 공연을 준비해야 했다. 어찌어찌 공연은 했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흑역사로 남았다고 한다. 공연을 끝내고 한동안 안 봤다고 하니, 꽤나 마음에 들지 않은 공연이었던 것 같다. 이야기를 듣던 은범 씨도 “그래서 얘가 자기 자작곡 들려준다고 연락했을 때 깜짝 놀랐어요. (웃음) 원래는 음악을 접으려고 했는데, 노래 들어 보니까 좋아서 같이 하기로 했죠”라며 당시를 떠올렸다.
흑역사를 공유한 두 사람이 밴드 이야기를 나누고, 은범 씨의 소개로 이전 드러머와 민우 씨를 만났다. 동갑내기들이 모여 밴드를 만들기 위해 이름을 정하는 과정도 독특했다. 우선 각자 몇 가지 이름을 제안한 뒤 가위바위보로 정하고 의미는 후에 붙였다. 멤버들은 피난의 뜻을 ‘비상구 같은 밴드’라고 설명했다.
“이름을 어떤 거로 지을지 몰라서 각자 여러 가지를 말해 보고 가위바위보를 해서 정하자 했죠. 두 시간 동안 얘기해서 나온 게 ‘스브르밥’, ‘하얀 단무지’ 이런 거였고, 가위바위보를 했는데 민우가 이겨서 피난이 된 거예요. 피난으로 결정 났을 때 진짜 다행이다 싶었죠.”_은범
“(웃음) 하얀 단무지 될 뻔했네? 하얀 단무지였으면 절대 안 들어왔다.”_선구
꼭 우울할 필요는 없다
2016년에 밴드를 결성했지만,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건 기존에 있던 드러머가 비운 자리를 선구 씨가 채우면서부터다. 버스킹도 많이 하고, 공연도 닥치는 대로 공연장을 찾아다니며 했다. 처음엔 그저 공연 한번 해 보는 것을 목표로 시작했지만, 어느새 음반도 내며 조금씩 이름을 알리고 있는 피난이다.
“진짜 무식하게 돌아다니면서 공연했어요. 그냥 드럼 보이면 들어가서 ‘여기서 공연할 수 있어요?’ 하고 물어보고, 되면 공연하고 그랬죠. 요즘도 기회만 되면 궁동에 있는 하울앳더문에서 한 달에 한 번꼴로 공연하고 있어요.”_민우
피난의 첫 번째 EP <별을 쫓는 개>는 지난해 12월부터 준비해 올해 8월에 나왔다. 그간 동욱 씨가 차곡차곡 모아두었던 곡 중 의미가 맞는 것들로 추려 작업한 노래 여섯 곡을 담았다. 동욱 씨는 자신에게 있어 노래는 그저 탈출구라 말한다.
“처음 노래를 쓴 건 ‘남한테 위로를 주고 싶다’라는 생각보다는 노래를 못해서 차라리 내 노래를 만들면 되지 않겠나, 싶어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어요. 만들다 보니까 남들에게 공개하지 않은 일기장 같은 게 됐죠. 그런 말들을 가사에 담다 보니까 스스로도 위로가 되었고요. 그런 이유로 계속 노래를 쓰고 있는 것 같아요. 하루 중에 잠들기 전, 야근하고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들으며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음악이었으면 해요.”_동욱
동욱 씨의 말처럼, 수록곡 가사 안에는 어두움, 쓸쓸함과 같은 분위기가 묻어난다. 그럼에도 노래는 절망을 향해 걷지는 않는다. 상대적으로 밝은 멜로디 때문인 듯하다. 우울하지만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의 깊이는 아닌, 종종 갑작스레 찾아오는 어두움을 피난은 노래를 통해 이야기한다.
“가사는 우울하지만, 멜로디나 리듬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게 곡 작업을 했어요. 우울할 때 굳이 우울한 영화를 볼 필요는 없잖아요. 우울한 생각이 들더라도 리듬에 맞게 몸을 흔들면 기분이 조금 더 나아지지 않나 싶은 생각에 만들었죠.”_동욱
“피난 노래를 듣고 우울로부터 피난하라고….”_은범
많은 사람이 찾아 준 앨범 발매 공연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피난은 또다시 새로운 앨범을 작업하려 준비 중이다. 이번 작업은 시간이 얼마가 걸릴지는 모르지만, 일단 해 볼 생각이라고 한다. 앨범 작업과 함께 더 큰 무대에도 서보고 싶은 게 이들의 내년 계획이자 희망이다. 다양한 공간에서 피난의 노래를 들을 수 있길 기대해 본다. 개인적으로 동욱 씨가 은범 씨에게 밴드를 제안하며 들려줬다는 <Love is Selfish>를 앨범으로 들어 보고 싶은 마음도 크다. 기타 연주가 아주 매력적인 곡이다. <Love is Selfish>는 유튜브에 업로드한 버스킹 영상을 통해 들을 수 있다.
피난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지하 합주실을 빠져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단풍이 다 떨어지기도 전에 찬 겨울이 왔다. 돌아가는 길에 이어폰에서는 피난의 <아름다운 나의 도시>가 반복해 흘러나왔다.
아름다운 나의 도시는/불이 꺼질 생각을 않네/또다시 끝없는 축제가 시작돼/밤이 깊어 갈수록/외로움은 커져만 가고 또다시/난 잠 못 이룬 채/난 포근한 엄마의 품 다음으로/날 가장 사랑해주는 침대에 담겨/흐릿하게 창에 손 내민 풍경들과/날 찌르는 시선을 뒤로한 채/지친 나를 내가 꼭 안아줘/졸린 내 눈에 가려진 하루가 너무/피곤했을까/모든 걸 내려놓고 그저 잠이 들고 싶어
월간토마토 vol.152
밴드 피난 인스타그램 https://www.instagram.com/band.pi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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