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단골 세탁소는
싱긋 웃으며 인사하면 충분하다
미진세탁소 윤종수 씨
글•사진 이용원
월간토마토 vol. 151.
세탁소 다리미판은 골목을 향했다. 그 앞에 윤종수 씨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다리미질을 한다. 수십 년간 이어왔을 그 움직임에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오랜 골목에서 만나는 정겨운 풍경 중 하나다. 충청도에 온 지 50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경기도 말씨는 여전히 남았다.
미진세탁소 주인 윤종수 씨는 1965년 4월 30일에 충청도 보은땅을 밟았다. 스물다섯 살 때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산지와 나대지 등을 농지로 만드는 사업을 펼쳤다. 이 사업에 참여하면서 오래 살았던 경기도 양평을 떠났다. 보은에서 농지 만드는 일을 6개월 남짓했을 때였다. 새벽 2시쯤에 하숙집으로 돌아가는데, 평소에 옷을 맡기던 세탁소 주인이 불을 환하게 밝히고 일을 했다. 인상적이었다.
“다음 날, 그 세탁소에 맡긴 바지를 찾으러 갔어요. 그리고 물어봤죠. ‘새벽까지 일하시던데, 그렇게 일을 하면 한 달에 얼마나 버느냐’라고요. 한 3만 원 정도 번다더라고요. 당시 도청에서 일하는 공무원 한 달 봉급이 2천 5백 원이었어요. 놀랄 수밖에 없지요.”
농지 조성사업이 별 볼 일 없어질 때여서 다른 길을 찾던 중이었다. 높은 수입을 올리는 세탁소 일이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다짜고짜 세탁소 할 곳이 없는지를 물었다. 세탁소 주인은 기술자를 두고 세탁소를 할 수도 있지만, 그 기술자가 심통을 부리고 말썽을 피우면 힘드니 직접 세탁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조언했다. 옳게 들리는 말이었다. 세탁소 기술이라야 다리미질이 전부일 줄 알았다. 그깟 다리미질 배우는 데 얼마나 걸리겠나 싶어 무심히 물었다.
“한 3~4년 정도는 배워야지요.”
생각보다 긴 수련 기간에 깜짝 놀랐다. 윤종수 씨는 곧바로 기존 일을 정리하고 기술을 배운다. 햇수로 3년을 여러 세탁소에 직원으로 일했다. 1967년 11월 1일, 유성에 다른 사람이 운영하던 세탁소를 3만 원에 산다. 일종의 권리금이었다. 근데, 생각처럼 장사가 잘 안되었다. 석 달도 못 채우고 8천 원을 받고 팔았다. 가게를 팔기 얼마 전에 손으로 돌려서 쓰는 짤순이라 부르는 기계를 염색 가게 하는 사람에게 1만 5천 원에 넘겨 그나마 손실을 줄였다. 짤순이를 새 주인에게 넘기고도 한참 동안 돈을 못 받아 소개했던 사람을 대동하고 가게까지 쳐들어가 받아내는 고생을 했지만 말이다.
다시 세탁소에 직원으로 들어가 일을 하다가, 도마동에 사는 친구와 함께 선화동에 세탁소를 얻었다. 1968년 7월 1일이었다. 지금 윤종수 씨는 그때 인수한 세탁소 이름 ‘미진세탁소’를 여전히 사용한다.
“왜, 미진세탁소인지는 나도 모르지요.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 갔던 사람이 한국에 돌아와서 문을 연 세탁소였어요. 선화동 398-2번지요. 바로 요 앞집 너머에 있었지요. 확실하진 않지만, 그 미진세탁소 가 대전에서 처음 생긴 세탁소라고 들었어요.”
몇 년 동안 같이 세탁소를 운영하다가 세탁소는 친구에게 맡기고 왔다 갔다 하면서 다른 일을 시작했다. 처음 시작한 일이 샴푸 장사였다. 아미노 샴푸라고 일본에서 원료를 가져다가 한국에서 제조한 제품이었다. 본사는 서울에 있었고, 충청권 대리점을 맡아 운영했다. 충청권 첫 대리점이었다. 당시 대전 중앙극장에 자주 광고도 집어넣고 고군분투했는데 사업은 망했다. 그 뒤로 누가 꼬드겨 술잔에 술이 차면 여인네 모습이 생기고 술잔이 비면 사라지는 요상한 잔도 팔아 보았다. 술집 주인들이 신기하니까 너도, 나도 들여놔서 잘되는 줄 알았는데, 수금이 안 되었다. 돈 받으러 가면, ‘잔이 다 깨졌다’라며 돈을 안 주기 일쑤였다.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대전과 서울을 오가며 달력 제작 영업도 했다. 그 일도 잘 풀리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1976년 1월, 선화동 미진세탁소를 맡아 운영하던 친구가 다른 곳으로 나갔다. 세탁소 건물 주인이 자기 큰딸에게 세탁소를 주겠다며 내보낸 것이다. 덜커덕 세탁소를 받았지만 운영할 엄두가 안 났던 모양이다. 세탁소 주인 큰딸은 공간을 대고 윤종수 씨는 기술을 대는 형태의 동업을 시작했다. 잠깐 놓았던 다리미를 다시 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집 큰딸이 손을 떼고 온전히 윤종수 씨가 세탁소를 운영했다. 그때 미진세탁소 손님으로 오가던, 나중에 처남댁이 된 손님이 자기 시누이를 윤종수 씨에게 소개해준다. 당시에는 많이 늦은 나이였던 서른여섯 살에 결혼할 상황이었다. 번번이 사업에 실패하고 가게를 막 인수한 터라 가진 돈이 없었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데 패물을 해 줘야 하니까, 빚을 냈죠. 70만 원. 이자도 5부 이자였어요. 그 돈으로 다이아반지, 금반지, 목걸이, 정장 두 벌, 모피 코트까지 패물을 해 줬어요. 근데 참 사람 일이라 는게 이상해요. 그즈음 길에서 어떤 사람을 우연히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 나누다가 빚이 이만큼 있다고 하니까, 그 사람이 ‘아저씨 하는 일이 뭐냐’고 묻더라고요. 세탁소 한다니까 ‘이불을 만들 수 있겠느냐’고 물어요. 당연히 할 수 있다고 했죠. 그 사람이 일을 줘서 이불 납품하고 그 빚 한 번에 갚았잖아요.”
1976년 11월 21일에 결혼식을 올리고 세탁소 사업은 승승장구한다. 세탁소를 공원 쪽으로 한 번 옮겼다가 지금 자리로 온 것은 1985년 10월 30일이다. 현금 4천 5백만 원을 주고. 샀다. 방이 네 칸에 아담한 마당도 있던 집이다. 골목에 면한 마당을 막아 세탁소를 들였다. 공공기관 일을 하면서 돈을 많이 벌었다. 지금은 하지 않지만, 예전에는 충남도청과 교육청, 체신청 등 일을 도맡았다. 방석과 등 커버, 커튼, 식탁보 등 정기적으로 들어오는 일감이 제법 많았다.
“지금 자리에 한 3년 살다가 건물을 올리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어쩌다 보니 30년이 지나도 건물을 못 지었어요. 이리로 와서 세탁소 10년 하면서 이런 집 두 채를 더 샀는데, 돈은 안 모이더라고요. 이렇게 저렇게 다 까먹었죠.”
1941년생인 윤종수 씨 고향은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면 금남이다. 그곳에서 집안이 400년 이상 터를 잡고 살았다. 일제강점기 때 아버지는 일본군에 징용으로 끌려갔다. 1945년 아버지가 광복을 맞은 곳은 머나먼 타국 인도네시아였다. 그곳에서 미국으로 갔다. 포로 신분이었을 것이다.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광복을 맞이하고도 6개월이나 지난 뒤였다.
“아버지가 오시면서 제 옷을 한 짐 싸 오셨어요. 그걸 입고 밖에 나가면 동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들었어요. 그때 시골에서 아이들 옷이 어땠겠어요? 나중에 커서 만난 친구들이 그때 얘기를 하더라니까 요. ‘네 옷이 하도 좋아 보여서 구경했던 게 생각난다’고요. 커서도 기억날 만큼 인상 깊었던 것이지요.”
광복 한참 뒤에 그리워하던 가족을 만난 아버지는 강원도 춘천에 자리를 잡는다. 윤종수 씨가 여덟 살 때인 1948년이다. 그때 살았던 집이 남춘천 퇴계동 8통 2반이다. 아버지는 춘천제일방적이라는 회사에 일자리를 구했다. 젖먹이 동생도 생기고 단란한 생활을 했다. 어쩌면 윤종수 씨 유년기에 가장 행복했던 몇 년을 보낸 곳이다. 어느 날부터 아버지는 퇴근해서 돌아와 저녁을 먹고 나면 늘 밖에 나갔다. 한 달 이상을 그리했던 듯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보초를 서러 나가는 것이었다. 북쪽과 상대적으로 가까웠던 춘천은 당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고 주민이 돌아가며 자발적으로 경비를 서던 상황이었다. 결국,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한다.
집에서 뛰쳐나온 윤종수 씨 가족은 부산으로 피난 가려는 마음을 먹고 기차에 올라탄다.
“그날 모습이 또렷이 기억나요. 남춘천에서 한 정거장 더 가면 신남이라는 역이 있는데 그곳에서 기차가 멈춘 거예요. 석탄을 때서 가는 기차인데 물이 필요하잖아요. 그 물을 못 넣는다는 거예요. 기차 지붕 위까지 피난민으로 꽉꽉 차고, 군인들은 피난민보다 먼저 도망가고 정말 아수라장이었어요. 할 수 없이 기차에서 내려 산길로 몇 날 며칠을 걸어서 양평에 있는 큰고모 집으로 향했죠. 빈집이 보이면 들어가서 쌀을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없고 된장, 고추장만 있더라고요. 그걸 퍼 담았죠. 밭에 보이는 무나 배추를 뽑아서 찍어 먹으며 고모네 집에 도착했어요.”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펼쳐지며 국군은 북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1·4 후퇴 전까지 틈이 벌어진 상황에서 윤종수 씨 아버지와 어머니는 젖 먹이 동생을 데리고 춘천 집에 다녀오겠다며 양평을 떠났다. 급하게 피난을 가느라 미처 챙기지 못한 옷가지며 그릇 같은 것들을 챙겨 올 요량이었다. 젖먹이 동생을 떼놓고 갈 수가 없어 당시 열 살이었던 윤종수 씨만을 남겨둔 채 길을 나섰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저는 엄마 닮아서 작지만, 아버지가 키가 190cm는 되셨어요. 동네 사람들이 ‘녹사쿠’라고 불렀어요. (일본말로 녹쿠사쿠, 6척 장신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생각나는 게 초가지붕에 이엉을 올릴 때 다른 사람들은 지게에 볏단을 올리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데, 아버지는 밑에서 휙휙 던져 올리셨죠.”
윤종수 씨가 스물두 살 때쯤 되었을 때, 어린 시절 추억이 서린 춘천에 간 적이 있다. 전쟁통에도 집은 하나도 상하지 않고 10여 년 전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반가운 마음이 가득했다. 집이 상하지 않았으니 사람도 살고 있었다. 50대 아주머니 한 분이 나왔다. 사정을 들어 보니, 6·25전쟁이 끝난 후 아버지 쪽 외가 친척 되는 사람이 마음대로 팔아먹은 상황이었다.
“집주인이 사실상 난데, 법원에 가서 물어봤지만, 너무 늦게 와서 방법이 없다고 하더라고요. 억울하긴 했지만 어떡해. 법이 그렇다는데, 그 당시에는 그런 일이 많았어요.”
아버지와 어머니, 하나밖에 없는 동생까지 연락이 끊긴 채로 고모네 집에서 살았다. 한순간에 온 가족과 소식이 끊기며 외로움 속에 던져졌지만, 적극적인 태도로 살아 냈다. 농사일을 거들고 박 대통령이 덴마크에서 수입해 온 ‘4H 구락부’ 지역 회장도 맡았다.
윤종수 씨는 스스로 생각해 보면, ‘유별났던 사람’이라고 했다. 50년도 더 된 일과 날짜를 어제 일 이야기하듯 선명하게 기억하는 걸 보면 분명 평범하지는 않다.
“사람들에게 그렇게 얘기해요. ‘난 30년 전에 오늘을 산 사람이다’라고요.”
양평에 살던 시절, 사기그릇 깨진 것과 유리 깨진 것을 논두렁과 하천 등에 함부로 버리는 것이 영 마뜩잖았다. 한자리에 모인 동네 사람들에게 이런 것들은 함부로 버리지 말고 잘 모아 두었다가 깊은 곳에 묻든지 해야 한다고 연설을 한바탕했다. 불과 열여섯 살 때다. 이 일 때문이었는지, 관공서를 상대해야 하는 온갖 민원은 윤종수 씨에게 몰렸다. 이런 일은 대전에 와서 자리를 잡아도 달라지지 않았다.
“옛날에는 행정 공무원이나, 경찰 공무원을 보면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괜히 주눅 들어서 고개 숙이고 쭈뼛거렸단 말이에요. 난 그런 거 없었어요. 그래서 싸우기도 많이 싸웠죠.”
30년 전 오늘을 살았다는 건, 권위주의 정부 시절에도 당시보다 민주화된 지금처럼 허상뿐인 권위 앞에 주눅 들지 않았다는 설명이었다. 윤종수 씨는 요즘 <여인천하>라는 드라마를 즐겨 본다고 말했다.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이야기라 어리둥절했는데 다음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 옛날 ‘임금’하고 ‘양반’이라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백성들은 배곯아서 농사지을 힘도 없는데, 그나마 지은 농사 다 빼앗아 가고, 일제 강점기에 나라 빼앗겨서 힘없는 백성들 끌려가 몽둥이찜질 당한 지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다 잊어버린 거 같아요. 그러면 안 돼요.”
이 강단은 어쩌면 뼛속까지 사무쳤을 외로움을 극복하는 힘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내년이면 여든이지만, 몸을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일을 계속할 생각이다. 슬하에 둔 남매에게 용돈 달라 손을 안 벌려도 되니 행복한 일이다.
가을 햇살 가득한 골목을 총총 걸어 내려오던 젊은 아가씨가 흰색 셔츠 한 개를 건네고 싱긋 웃으며 인사하곤 사라진다. 오랜 골목 단골 세탁소는 여러 말 없이 그냥 그렇게 웃으며 인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글•사진 이용원
월간토마토 vol.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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