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하니, 마음 편한 게 좋아 욕심부려봐야 아무 쓸모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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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인터뷰

한가하니, 마음 편한 게 좋아 욕심부려봐야 아무 쓸모없어

by 토마토쥔장 2021.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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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하니, 마음 편한 게 좋아 욕심부려봐야 아무 쓸모없어

서정구 씨

글 사진 이용원

 

많이 들어올 때는 옆에 창고에 못 쓰는 모터가 가득 쌓였는데, 지금은 고물상에 연락해도 몇 개 못구한다. 그렇다고 별 걱정은 없다. 요즘에는 바다낚시에 빠졌다. 일이 없으면 낚시를 가면 된다.

1.

집 옆으로 달아낸 창고 틈으로 개 한 마리가 고개를 내밀었다. 상단이 뚫린 벽체에 얼굴을 턱 올린 채 쉬는 눈치였다. 비갠 후 고요한 골목길에 갑자기 나타난 낯선 이를 보는 눈길이 심드렁하다. 고개는 그대로 둔 채 눈알만 데구루루 굴리며 흘깃 쳐다본다. 풀 죽은 듯 꺾여 아래로 축 처진 귀 때문인지 한없이 순해 보인다. 사진을 찍으며 한 발짝 한 발짝 다가서는 순간, 상체를 뚫린 틈으로 밀어내며 격하게 짖어댄다. 갑자기 달려들 듯 짖어대는 통에 화들짝 놀라 물러섰다. 순둥이로 생각했던 터라 더 놀랬다. 녀석이 허용한 거리를 넘어섰던 모양이다.

작업장은 주택 1층 차고에 있었다. 2층은 서정구 씨 가족이 생활하는 집이다. 산비탈에 들어선 건물은 평지에 지은 건물과는 확연히 다른 실루엣이다. 평지 주택이 그냥 땅 위에 앉았다면 산동네에 지은 집은 비탈에 단단하게 박힌 느낌이다. 전원주택 정원수와 산속에서 바위틈을 뚫고 자라는 나무 사이에서 느낄 수 있는 차이 정도다. 마을 안길에 접한 차고에서는 막힘없이 대전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 정도 차고라면 스티브 잡스가 사용했던 캘리포니아 차고보다 훨씬 더 창의적인 상상력을 자극할만하겠다.

1층 차고 섀시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큰 목소리가 새어 나온다.

“어제 간 팀은 수십 마리를 잡았다는데, 누구는 백오십 마리를 잡았대. 우리는 허탕 쳤어. 나도 한 네 마리밖에 못 잡았어.”

서정구 씨는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목요일과 금요일 1박 2일로 떠난 바다낚시 결과를 친구에게 이야기하는 모양이었다. 통영에 한치를 낚으러 다녀온다는 이야기는 약속을 잡으며 이미 들었다. 통화 마치기를 기다리며 둘러본 작업장에는 생전 처음 보는 기계와 각목으로 만든 선반, 나무 서랍장, 철제 책상 등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작업장 제일 안쪽 선반 위에 올려둔 텔레비전에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하는 예능 프로그램 진행자들이 꼬약꼬약 소리를 내지르고 있었다. 누구도 귀 기울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아는 모양이었다.

서정구 씨는 다른 손으로 전화기를 바꿔 쥐고는 가까이에 있는 의자를 손으로 가리킨다. 의자는 보기보다 편했다. 의자에 앉는 것만으로도 시커먼 작업장 공간 안에 녹아드는 기분이었다. 몇 년 전부터 그곳에 그렇게 앉아있던 것처럼 세상 편하다. 도시 풍광이 시원하게 들어온다. 며칠 동안 내린 비 때문에 대기는 한없이 맑다. 거칠고 힘들었던 사냥을 막 마치고 동굴에 들어와 사냥터를 바라보는 것처럼 여유가 있다. 편안한 굴속 같은 그의 작업장이 마음에 들었다. 

 

2.

서정구 씨 고향은 충북 문의면 도원리다. 1952년 그곳에서 육 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정미소를 두 개나 운영할 정도로 집안 형편은 넉넉했다. 장손이었으니, 집안에 전폭적인 지지와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모두 책보에 책을 싸서 학교에 다닐 때도 서정구 씨는 책가방을 메고 시계를 차고 다녔다. 체육 선생님이 그의 시계를 빌려 기록을 잴 정도였다.

“아버지는 정미소를 두 개 하시고 작은아버지는 대전에서 극장 사업을 했어. 옛날 서대전에 은포극장이라고 있었지. 그거랑, 조치원에 왕성극장이라고, 두 개를 운영했어. ‘총천연색영화사’라는 작은아버지가 운영하는 영화사 사무실은 신도극장 옆에 있었고. 극장도 운영했지만, 유랑극단처럼 농악대 데리고 씨름도 주최하면서 전국을 돌아다녔어. 그분이 가방이랑 시계랑 사다 주었지.”    

도원국민학교와 문의중학교를 졸업한 서정구 씨는 당연히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게 수순이었다. 하지만, 중학생 서정구 씨는 아무래도 고등학교에 가고 싶지가 않았다. 열여섯 살에 집에서 나왔다. 나름 도망이었다. 당시 유성에 있던 병아리 부화장에 갔다. 병아리가 키우고 싶었다. 이미 집에서 병아리 몇 마리를 키워 본 경험이 있었다. 유성에 형제부화장이라고 당시에 제법 큰 부화장이었다. 대표를 만나 병아리 2천 마리를 주문했다.

“중학생 녀석이 와서 병아리 2천 마리를 달라고 하니, 어이가 없잖아. 안 된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전체 금액에 절반을 계약금을 주겠다고 했지. 한 이십만 원 정도였던 거 같아. 지금으로 치면 대략 200만 원이 넘는 가치일 거야. 주인도 돈을 주겠다는데 마다할 리가 없잖아. 어려서부터 어렵게 살지는 않아서 모아놓은 용돈이 좀 있었지. 부화장 주인이 양계 관련한 책을 여러 권 주더라고. 그렇게 계약을 해놓고는 대동에 왔어. 당시 우리 외삼촌이 여기 살고 있었거든. 집에 안 가고 한 이틀 놀고 있는데, 어머니가 오시더라고.”

단박에 집 나간 아들을 찾아온 어머니는 고향에 돌아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야 한다고 서정구 씨를 설득했다. 그런 어머니에게 고등학교에 갈 생각이 없음을 다시 밝히고 유성에 있는 형제부화장에 병아리도 계약하고 왔다고 이실직고했다. 화들짝 놀란 어머니는 외삼촌을 데리고 부화장에 가서 계약을 취소하고 왔다. 도무지 설득이 힘들 거로 생각했는지, 어려서부터 나무에 조각하고 이것저것 만드는 걸 좋아했던 아들에게 목수 일이라도 배워보라고 권했다. 양계장이 아니라 건축 쪽으로 진로가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냥 병아리 2천 마리를 가지고 문의에 돌아갔다면 그는 축산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수소문해서 자양동에 있던 이복일이라는 목수를 스승으로 삼았다. 그 집에서 육 개월 정도 살면서 일을 배웠다. 일을 배우는 건 재미있었지만 다른 일이 힘들었다. 스승인 이복일 씨는 당시 집에서 돼지를 키웠다. 먹여주고 재워주는 거로 월급 없이 일을 배우기로 약속했지만, 새벽마다 일어나서 지게를 지고 선화동 일대 음식점을 돌며 잔반을 모아야 했다. 돼지 밥을 먹이고 스승을 따라 현장에 나가 종일 일을 하니 고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마침, 대전여고 앞에 살던 이만성이라는 목수로부터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이복일 씨 집을 나와 대동에 하숙방을 구하고 이만성 씨에게 계속 목수 일을 배웠다. 2년 정도 따라다니며 일을 하다가 유천동에 주택 짓는 일을 맡았다. 당시 조폐공사가 유천동에 있을 때인데, 그 앞에 있는 집이었다. 목수로서 첫 번째 단독 수주였다. 스무 살 무렵이었다. 무사히 일을 마쳤다. 데뷔 무대도 잘 마무리하고 스승을 떠나 본격적으로 건축 목수로 삶을 시작했다. 경기가 좋지 않을 때라 대전에서만 일하지는 않았다. 서울 사직공원 앞에 있는 노인정도 하나 짓고 부산 재개발 지역에 가서도 일을 했다.

“부산에는 친구들 데리고 내려가서 일하는데, 한 번은 친구 형이 놀러 왔더라고, 근 일주일을 밥 먹이고 술 사주고 용돈도 주면서 대접했더니, 어느 날 내가 사둔 비싸고 좋은 낚싯대를 훔쳐 갔어. 그 친구 형이 말이야. 열 받아서 그길로 좇아 올라왔지. 충남여고 앞에서 양복점을 차렸더라고. 내가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따라서 낚시를 다녔거든. 마음먹고 산 아주 비싼 낚싯대였어. 찾아가니 물어주겠다고는 하는데, 어디 그게 되느냐고. 그렇게 올라와서 못 내려간 거지. 그때 부산에서 올라가지 말라고 붙잡는 사람이 많았거든. 그 사건이 아니었으면 못 올라올 뻔했어.”

20대 초반에 들어서며 본격적으로 건축 목수 일을 하면서 충북 옥천군 안남면이 고향인 김정자 씨와 선을 보았다. 지금 그의 아내다. 약혼식을 하기로 양가가 약속하고 당사자인 서정구 씨는 입대한다.

3.

당시로는 조금 늦은 25살에 입대했다. 증평에서 훈련소 생활을 마치고 카투사로 파주에 발령을 받았다. 다양한 인맥을 가졌던 작은아버지와 문의면 예비군 중대장으로 근무 중이던 고모부가 힘을 쓴 게 아닌가 싶다.

쉽게 경험하기 어려운 군 생활이었다. 우리나라 국경일과 미국 국경일에 모두 쉬었고 근무 시간 외와 주말에는 나름 자유로웠다. 당시 입대 전에 약혼을 하기로 한 김정자 씨와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한국군 부대라면 그렇게 자주 만나기는 어려웠을 거다.

훈련소를 나와 처음 발령받은 파주에서 군 생활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중간에 의정부로 전보 발령을 받았다. 그럴만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그가 근무한 부대 관습이 문제였다. 외출을 갔다 오는 병사는 으레 양담배 한 보루와 조니 워커 한 병을 사서 고참인 병장들에게 상납을 했다.

“그때 상납을 주도한 병장이 김천 놈이었는데, 안 되겠더라고. 당시 계급으로 볼 때, 내 위로 7명 밑으로 30명이 있을 때였는데, 나보다 계급이 낮은 친구들을 다 모아놓고 얘기했지. 내가 책임질테니, 앞으로 양주하고 담배는 나에게 가져오라고. 그 뒤로 외출 다녀오는 병사가 담배와 양주를 가져오면 30명을 모아 놓고 다 같이 나누어 피고 마셨지. 그러니, 고참들이 좋게 볼 리가 없잖아. 김천에서 온 고참이 자기 숙소로 날 불러서 협박하더라고. 애인이 자주 면회 오는 걸 가지고 트집을 잡고 말이야. 그날 들이 받았지. 얼마 뒤에는 잔디밭에서 술 마시다가 한 대 후려 갈겼어. 그 김천 출신 병장은 제대를 한 달 정도 남겨두었을 때였어. 내가 군대를 늦게 가서 나보다 네 살이나 아래였지.”

그 사건 이후 병장이 요청을 해서 서정구 씨는 의정부로 전출을 당했다. 문책성 전출이었지만, 오히려 서정구 씨에게는 전화위복이었다. 의정부에 있었던 미군 7기갑사단으로 갔다. 그곳에서 만난 미군 선임하사가 대전 식장산 꼭대기에서 근무하다가 온 사람이었다. 그 선임하사의 아내는 판암동 사람이었다. 대전 사람이라고 무척 반가워하며 잘 챙겨주었다. 당시 한 달 사병 월급이 700원일 때인데, 월급날이면 그 미군 선임하사가 본인은 물론이고 주변 장교들에게도 돈을 걷어 200~300달러 씩 서정구 씨에게 건넸다. 술이라도 마시라며 말이다. 일종의 격려금이었다.

“그렇게 받은 돈은 회식에 썼어. 대대장에게 회식하게 클럽 좀 비워달라고 부탁했지. 그때 군부대 안에 장교 클럽과 사병클럽이 있었거든. 둘 중 하나는 빌릴 수 있었지. 부대 안에 한국군들 다 불러다가 클럽에서 노는 거야. 그때 우리 대대 카투사가 75명이었어. 당시에 패티김 같은 가수가 미군부대 들어와서 공연하고 그럴 때라고. 부대원들이 얼마나 좋아했겠어. 그것뿐만이 아니야, 당시 카투사들은 늘 김치 생각이 간절했지. 대대장에게 얘기해서 가을걷이 할 때면 대민봉사를 추진했어. 나가서 벼 베는 거 도와주고 김치에 밥 한 그릇 먹고 오는 거였지. 대대장은 생색내서 좋고, 농민은 일손 생겨서 좋아했지. 우리는 제대로 집밥 먹어서 좋았고.”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군 생활은 그렇게 흘러갔다. 제대 후에 서정구 씨는 바로 김정자 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하며 신혼집으로 마련한 곳이 지금 사는 곳이다. 대전 동구 대동. 누군가가 밭농사를 짓던 시유지였다. 그 사람에게 1만2천 원을 주었고 나중에 시로부터 불하를 받았다. 80평이 조금 넘었다. 그곳에 직접 기와집을 지었다. 당시에 대동에는 판자때기로 얼기설기 지은 하꼬방집이 가득했고 기와집이나 슬레이트집은 서너 채에 불과했다.  

“마을에 길도 제대로 안 나서 저 아래에 건축 자재를 쌓아 놓고 사람이 들어 날라야 했어. 동네 사람들 다 동원해야 했지. 벽돌 한 장 나르는데 얼마씩 준다고 하면, 동네 아이들이고 어른들이고 다 나서서 날라주었지. 그때는 이 동네에 사람이 정말 많이 살았어. 동구에서 제일 많다고 했지. 국회의원 선거 때도 이 동네 인심을 잡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어. 그 좁은 집에도 두세 가구씩 살았으니까. 매일 아침이면 골목마다 일 나가는 사람들로 꽉 찼어.”

대동에서도 높은 곳에 있는 서정구 씨 집에서 아침이면 처음 지었던 집은 물이 새서 부수고 다시 슬레이트집으로 고쳐지었다. 오솔길이었던 집 앞길을 넓힐 때 세 번째로 집을 다시 지었다. 그 집이 작업장으로 쓰면서 생활도 하는 지금 집이다. 그 사이에 둔산동이나 다른 지역 아파트로 이사 갈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입장에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시골에서 평생을 살아온 부모님에게 아파트는 너무 답답한 공간이었다. 서정구 씨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시내라도 나가면 답답하다. 집 옆 텃밭에서 채소를 가꾸며 사는 지금 삶이 행복하다.

4.

제대하고 본격적으로 건축업을 하면서 서정구 씨 사업도 점점 확장했다. 주택을 짓는 일은 학교 짓는 일로 커졌다. 청주에 새터초등학교와 남성중학교도 짓고 대전에서는 보문중고등학교 건물도 지었다. 본인 명의 회사가 없어 다른 큰 종합건설사 이름으로 함께 일을 했지만 사실상 서정구 씨가 맡아 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일하는 게 불편해 회사 내는 걸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청주에서 만난 사람이 회사를 할 의향이 없느냐고 물었다. 그 사람이 서울에 있는 회사를 소개했다. 그렇게 소개 받은 제법 큰 종합건설사와 인연이 닿았다. 

“그 회사를 온전히 사지는 못하고 대전에 사무소를 냈지. 한강이남 공사는 내가 하고 한강이북 공사는 본점에서 하는 걸로 계약을 했어.”

당시 문창동에 동림학원이라고 있었다. 7층짜리 건물이었다. 그 건물 2층에 사무실을 냈다. 사업이 정말 잘 돌아갔다. 새벽부터 건설 현장 돌면서 정신없이 살던 시절이었다.

사업이 잘 되자, 딴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처음 서울 종합건설회사를 소개해준 청주 지인을 명예회장으로 놓고 그 아들을 총무부장으로 두었는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서정구 씨는 건설 현장을 챙기느라 사무실 안살림을 돌볼 여유가 없었다. 명예회장은 단종면허를 가진 건설회사 한 군데랑 짜고 회사를 빼앗기 위한 공작을 펼쳤다. 어이가 없고 억울했지만 치밀한 공작과 위협에 버티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힘들게 일군 회사와 수주한 일을 고스란히 빼앗겼다. 종합건설사 면허를 주지 않고 반납하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응이었다. 1990년대 초반에 벌어진 일이다. 마음을 추스르기 어려울 정도로 분노에 휩싸였다. 건설업계에도 소문이 파다해 모두 서정구 씨가 큰일이라도 벌일까, 걱정할 정도였다.

서정구 씨는 차에 낚싯대와 텐트를 챙겨 대청호로 들어갔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마음을 다독였다. 다행히 고기도 많이 잡혀 딴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주변 친구들에게 연락해 고기를 나누어주었다. 그 와중에도 물고기를 잡으며 주변에 나눠줄 생각을 하면 기분이 좋아졌다. 대청호뿐만 아니라 전국에 유명한 낚시터는 안 돌아다닌 곳이 없었다. 세상 힘든 일을 겪은 그가 버틸 수 있었던 건 낚시 때문이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 그때 내게 회사를 빼앗아 간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어. 명예 회장을 맡겼던 사람은 또 다른 사기 혐의로 도망 다니는 중이었고, 단종면허를 가진 건설회사 사장도 많지 않은 나이에 풍을 맞아 제대로 걷지도 못하더라고. 자식들에게도 안 좋은 일이 계속 생기고, 그렇게 욕심 부리더니, 끝이 안 좋더라고.”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된 뒤에는 낚시 릴 받침대를 만들었다. 낚시터에 오래 있다 보니 필요한 물건이 떠올랐고 손재주가 좋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그의 성격이 만나 탄생한 물건이었다. 그의 집 차고에서 만든, 그동안 없었던 혁신적 물건이었다. 릴 받침대 다섯 개를 만들어 차에 싣고 낚시터에 가면 서로 가져가려고 난리였다. 잘 팔렸다. 1997년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다. 퇴직금을 받고 직장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낚시터로 몰려들어 늘 사람들로 북적였다. 직접 만든 릴 받침대 다섯 개를 팔면 한 달 정도 낚시하며 지낼 비용을 벌 수 있었다. 중간에 특허 문제로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업그레이드한 상품을 만들어 개인 특허도 출원했다. 특허를 받은 릴 받침대는 잘 팔리다가 금융위기 여파가 사그라지면서 판매도 주춤했다. 낚시터에 사람이 준 것이었다. 경기는 저 시골 저수지 낚시터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다. 릴 받침대도 팔며 그렇게 낚시터를 돌아다니며 생활한 것이 근 20년이었다.

 

5.

그 즈음 오리를 키워보자는 제안을 받고 사육장 터를 알아보러 전국 곳곳을 다녔다. 땅을 구하는 게 만만치 않았다. 다행히 보은군에 적절한 곳이 나와서 땅을 보러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옥천군 안내면 고갯길을 오르던 중 갑자기 자동차 핸들이 말을 안 들어 중앙선을 넘었고 반대쪽에서 내려오던 자동차와 부딪쳤다. 차를 폐차시켜야 할 만큼 큰 사고였다.

이 사고 직후에 집에서는 오리 농장 하지 말라고 극구 말렸다. 평소 배포가 큰 서정구 씨가 일을 또 크게 벌렸다가 문제가 생길까봐 걱정이 컸던 차에 좋은 핑계거리가 생긴 거였다.

가족 반대가 심해 오리농장 계획은 접고 새로 산 중고 자동차를 손보려고 낚시동호회 회원이 운영하는 카센터에 갔다.

“그곳에서 우연히 동호회 막내 이야기가 나와서 전화를 했더니 추부에 공장을 차렸다고 하더라고, 그곳에 놀러 갔는데 폐기물 처리업체야. 그 녀석이 폐 모터를 분리해 팔면 일당은 나온다는 얘기를 해주더라고, 그래서 기계를 들여놓고 그 일을 시작한 거지.”

지금 서정구 씨 작업장에 있는 커다란 기계는 폐 모터를 분해하는데 쓰는 거였다. 끝에 커다란 도끼날이 달린 무서운 기계였다. 그걸로 모터를 사정없이 때려 양은, 섀시, 청동을 분리한다. 가장 큰 돈이 되는 건 구리다.

큰돈은 안 되어도 용돈벌이는 할 수 있었다.

못 쓰는 모터가 많이 들어올 때는 매일 아침부터 밤 10시까지 작업을 했다. 낚시 동호회 회원 중에 고물상을 하는 사람도 의외로 많았고 그들이 도움을 주었다. 폐 모터를 분해하는 일을 시작하고는 근 3년 동안 그 좋아하던 낚시도 딱 끊을 정도로 집중했다.

“경기가 안 좋으면 폐 모터가 고물상에도 잘 안 들어와. 냉장고나 에어컨 같은 데서 나오는데, 사람들이 경기가 안 좋으니까 가전제품을 안 바꾸고 그냥 쓰는 거지.”

많이 들어올 때는 옆에 창고에 못 쓰는 모터가 가득 쌓였는데, 지금은 고물상에 연락해도 몇 개 못 구한다. 그렇다고 별 걱정은 없다. 요즘에는 바다낚시에 빠졌다. 일이 없으면 낚시를 가면 된다. 한 달에 두세 번은 고기를 낚으러 바다에 나간다. 서정구 씨는 철제 책상 앞에서 낚싯대를 꺼내놓고 손을 본다. 얼마 전 통영에 한치 낚으러 가서 제대로 잡지 못한 게 영 속상한 눈치다. 낚싯대를 바꿔볼 요량이었다.

“너무 욕심내지 말고 살아야 해. 나도 그냥 욕심 안 부리고 목수 일이나 하며 살았으면 한가하게 편하게 살았겠지. 지금은 세상 편해. 폐 모터 들어오면 열심히 분해해서 팔고, 없으면 낚시 하러 가는 거지. 뱃속 편하고 좋아. 이 밑에 박 사장도 내가 우리 동네에서 제일 행복해 보인다고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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