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대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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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칼럼

나의 살던 고향은 대전(3)

by 토마토쥔장 2021.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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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 대전 

 

조성남 대전역사문화연구원장전 중도일보 주필 > 사진 대전찰칵 제공

3. 유소년시절 여름의 추억

더운 여름이지만지금은 가는 곳마다 에어컨이 있어 더위를 식혀준다그러나 60여 년 전인 1950년대 말 또는 1960년대 필자가 살던 동네의 가옥구조는 대부분 목조 기와집이었고초가집도 여러 채 있었다필자가 살던 옆집의 울타리는 탱자나무였는데 집에 들락날락하면서 탱자나무 가시를 만지곤 했었다동네의 가운데는 우물이 있었는데 꽤 깊었다. (어린아이의 눈높이로 볼 때넓은 마당을 지닌 집에서는 봄에는 보리가을에는 벼를 수확해 마당에서 타작하기도 했다.

국민학교 3학년 때까지 5, 6월이 되면 아버지는 새벽 동틀 무렵 필자를 깨워 깡통을 들려 동네 앞 논에 나가 개구리를 잡았다벼가 자라는 논이나 논둑에 큰 눈을 껌벅거리며 사람을 보면 펄쩍 뛰어오르던 개구리는 아버지 손에 잡혀 닭 모이로 던져지고는 했다.

선풍기도 없던 시절 한여름의 더위는 침상이나 마루에 앉아 부채를 부치거나 그마저도 힘들면 세숫대야에 물을 가득 담고 발을 담그는 게 피서의 전부였다한여름 밤은 길었다지금은 없어진 동네의 솔밭으로 동네 아이들과 몰려나가 피서 아닌 피서를 하기도 했다그때는 차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동네를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는 특권이 아이들에게 주어졌다.

학교가 끝난 방과 후나 여름방학이라도 되면 동네 아이들은 골목 어귀나 솔밭 또는 인근의 논밭야산으로 진출해 여기저기 쏘다니는 게 하나의 일과였다특히여름철은 낮이 길어 놀기에 안성맞춤이었다어떤 날은 지금 아파트 단지로 바뀐 태평동의 둥구나무(지금은 태평사거리에 있는 수령이 오래된 느티나무로 그때 아이들은 그렇게 불렀다)를 지나 넓은 땅이 펼쳐져 있는 곳에서 공놀이를 하기도 했다유성 가도를 지나 호남선 철로 아래를 통과해서 갔던 그 길은 동네의 밋밋한 골목에 비해 훨씬 재미있었는데 몇 번인가 아이들과 그곳에 갔다가 아버지에게 멀리 가지 말라는 경고를 받았다.

유소년 시절 여름철이면 제일 힘들었던 일은 더위와 함께 파리모기와 같은 곤충과의 싸움이었다당시 동네는 시골의 농촌과도 같았기 때문에 파리와 모기 같은 곤충이 서식하기에 적합한 환경이었다밥 먹을 때도집에 있을 때도 파리와 날벌레가 괴롭혔고밤에는 깔때기들이 뭉쳐 동네 곳곳에서 윙윙거렸다그중 가장 힘든 건 모기였다저녁때면 마루와 방에 모기장을 치는 게 여름날 부모님의 일과였다아침에 일어나 모기장 안에 들어온 모기를 잡으면 늘 붉은 피가 터져 나왔다

소년 시절 한여름의 풍경 가운데는 용두동과 탄방동 사이의 수침교와 그 아래를 흐르던 유등천의 물줄기가 자리하고 있다여름방학이 되면 아이들은 수침교 아래의 천변과 물속에서 몇 시간이고 보내곤 했다물길이 얕은 곳도 있었지만꽤 깊은 곳도 있어서 여름철 익사하는 일도 생겼다머리에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지만물속에 들어가 있으면 시원했다그 맛에 동네 꼬마들은 수침교 아래로 몰려갔고동네의 어른들은 늘 물 조심하라는 경고를 하고는 했지만아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동네에서 한참 떨어진 수침교 아래로 원정을  갔다동네나 집에는 거기만큼 시원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지금의 수침교 하상은 토사가 쌓이고 나무와 풀이 자라 그때의 모습과는 너무도 달라져 있지만, 60여 년 전 수침교 아래를 유유히 흐르던 천()은 아이들에게 더없는 피서 장소였고또 그때의 천()은 맑았다.

수침교 부근 유등천

한여름 수침교 천변에서의 잊히지 않는 기억 중에는 동네 어른들이 개를 잡던 일이다초등학교 몇 학년 때인가무척 더운 8월쯤으로 기억되는 어느 날동네 어른들이 솥과 장작그릇과 채소 등을 챙겨 수침교 쪽으로 놀러 가기로 했는데 아이들도 같이 간다는 것이었다동네 아이들은 잔치가 벌어진다고 직감했다모두 좋아라 하고 따라나섰다수침교 아래에 도착한 동네 어른들은 곧 솥을 걸고 장작불을 피웠다그 후에 본 모습은 지금도 어두운 기억 속에 남아있다동네의 개가 두어 마리 끌려왔고얼마 안 되어 보신탕으로 끓여지고 있었다말하자면 개들이 당시 여름철 동네 어른들의 몸보신용으로 제공되는 날이었고이런 수침교 다리 아래의 행사는 당시 일종의 동네 단합대회적 성격을 지닌 셈이었다아이들은 곧 종전 개의 모습은 까맣게 잊은 채 어른들이 주는 탕을 먹었다물속에서 놀다 나와 먹던 탕은 맛있었다먹을 게 모자라던 시절의 한여름 회식이었다어느 여름날의 이 행사장에는 장구를 메고 온 어떤 아주머니가 창을 하면서 흥을 돋우기도 했다그때는 집마다 개를 길렀는데 한여름에는 이들 중 몇 마리가 희생되는 수난을 겪어야 했다.

아래 동네로 이사 오기 전 언덕 위쪽 어느 골목에는 국수를 뽑는 기계가 있는 집이 있었는데 그 집 앞에는 늘 긴 국수 가락을 드리운 채 뽑아낸 국수를 말리던 장면도 기억 한편에 남아 있다먹는 이야기가 나온 김에 덧붙이면유년 시절의 우리 집에서도 닭과 토끼를 길렀다아버지를 따라 새벽에 잡아 온 개구리는 닭의 모이로야산에서 뜯어온 풀은 토끼 먹이로 주었는데 이 닭과 토끼는 여름철과 명절에 아버지가 잡아주시곤 했다먹는 게 귀하던 시절 집안에서 키우던 닭과 토끼는 중요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또 집안의 뒤뜰에는 아주 조그만 채소밭이 있었는데그곳에 상추와 호박쑥갓과 같은 채소를 심어 여름철에 반찬으로 먹었다또 동네 사람들은 국수 같은 음식을 만들어 가져다주곤 했다.

어린 시절 음식에 대한 기억은 옆집과 관련된 것도 있다탱자나무 울타리로 돼 있던 우리 집과 맞닿은 옆집은 종갓집이었다이 집의 할머니는 한 달에도 몇 번씩 제사를 지냈고제사가 끝난 밤에 늘 우리 집으로 제사 음식을 보냈다어느 날인가 낮에도 사람들이 모여 있어 가보니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전날 제사를 지내고 남은 상이었던 모양이다어린 내 눈에 많은 음식이 접시마다 담겨 있었다그 모습을 보는 순간 필자의 뇌리에는 그 집에 시집온 며느리의 모습이 떠올랐다필자가 어렸을 때 시집온 옆집의 며느리는 늘 집안일에 얽매여 있었고제사 때면 불을 때던 부엌과 마당을 드나들던 모습이 담 너머로 목격되었다제사 음식은 다소 기분이 나빴지만늘 기다려지곤 했다제사 음식과 함께 동네의 초상집도 먹을 음식이 있다는 점에서 동네 아이들에게는 선호하였던 장소였다특히 모두 좋아하던 돼지 수육을 이 초상집에서 먹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드센 모기에 뜯기고 한여름 무더위에 시달리면서도 저녁 무렵 불어오는 솔바람과 동네 아이들과의 만남가난 속에서도 동네 어른들의 훈훈한 인정이 살아있었던 유소년 시절 여름은 그런대로 지낼만했던 시절이었다

 

월간토마토 vol.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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