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 리뷰 2021 아트랩 대전 김정인의 《녹일 수 없는 이미지》
비 오는 날 어울리는 전시
글 사진 염주희
2021 아트랩대전 두 번째 전시를 보러 가는 날, 비가 내렸다. 7월 초라 장마려니 하고 취재에 나섰다. 주차장에서 이응노미술관으로 걸어가는 동안 비가 그쳤다. 나는 재빨리 회색 하늘과 쥐색 구름을 사진기에 담고 전시실로 갔다. 이번 달에는 이응노미술관 신수장고 M2 프로젝트룸에서 화가 김정인의 전시 《녹일 수 없는 이미지》가 열린다. 비 온 뒤 하늘은 젖은 콘크리트 벽 색깔 같은데, 무채색 톤이 강한 김정인의 작품도 이와 비슷하다. 그의 작가 노트에 있는 “탈색의 미감”이란 표현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이번 전시를 찾은 이들은 동선을 따라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즐거움을 누린다. 김 작가가 작품의 순서와 동선을 세심하게 계획한 덕분이다. 김정인의 그림을 관람하려면 전체적으로 전시장을 둘러본 후, 다시 한번 꼼꼼히 개별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을 추천한다. 먼저 주요작을 걸어놓은 메인 룸에서 시작한다. 십여 개의 작품을 보고 돌아 나오면 복도 왼쪽 바닥에서 <숨은 남자>를 만난다. 작품 속 주인공은 나무에 가려서인지 머리가 없는데, 타인의 시선을 피해 숨어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낚시 중인 것 같기도 하다. 이 사람은 멀리서 보면 바위 같지만, 다가가면 기둥에 등을 댄 남자의 형상이다. 가까이 가야 비로소 대상을 파악할 수 있는 <숨은 남자>는 《녹일 수 없는 이미지》가 가진 반전 매력 중 하나이다.
복도 끝 구석에 있는 <작가의 방>은 김정인의 작업실을 옮겨온 모습이다. 밑 작업에 사용한 젯소 통, 마스킹 테이프, 붓, 화판이 작업의 현장을 보여준다. 이 연출된 공간 안에도 작품이 숨어 있다. <작가의 방> 왼쪽에는 이젤 위에 얹은 <억압된 나무>가, 오른쪽에는 바닥에 세워둔 <습기 가득한 유리>가 전시 중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큰 작품 두 개인데, 이 방 안에 그림 하나가 더 있다. <습기 가득한 유리> 뒤로 벽에 기대어있는 작품 <불난 눈>이 그것이다. 캔버스 F4호를 사용한 작은 그림 <불난 눈>은 큰 작품에 가려진 채, 전시장 맨 끝에서 외진 곳까지 찾아온 이와 눈을 맞춘다. 전시장을 관통하는 계산된 혼돈이 보는 이의 마음을 끌어내 관람객은 김정인의 작품 세계로 한 발짝 다가간다.
김정인은 작품에 직관적인 이름을 붙였다. 무제Ⅰ, 무제 Ⅱ와 같은 작품명 대신 <잔해가 만든 별>,<밀려난 사람>,<꺼지지 않는 불씨>와 같이 작품을 보고 제목을 읽으면 수긍이 가는 표현을 사용했다. 현대미술을 감상하는 이로써 회화작품에 딸려오는 유일한 텍스트에 상세한 의미를 담은 작가에게 감사했다. 이번 전시회 ‘녹일 수 없는 이미지’의 뜻은 어디서 왔을까. “급류로 상정된 외부 압력이 근접하게 다가와도 관계망을 형성한 이미지들은 쉬이 녹여지지 않는다. … 연대하는 이미지로의 시각화는 혼란스러운 시대상에 대응해나가는 나의 의식과 태도를 드러낸다.” (김정인 작가 노트, 2021). 하나의 이미지가 작게 쪼개져 주변 환경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면 이 자체로 힘이 생긴다. 김정인은 테이프로 종이를 겹겹이 붙인 느낌과 궤적이 드러나는 붓질로 이런 역동성을 보여준다. 그는 작품의 거친 표면으로 뒤엉킨 시대상을 표현했지만, 그 속에 들어 있는 형상은 생활인으로 마주하는 도시의 풍경이다. 해체되었지만 여전히 건재하는 건축폐기물, 따로 있지만 모이면 시너지를 내는 젊은이, 이들은 함께 모여있을 때 쉽게 무너트릴 수 없고 희석할 수 없는, 녹일 수 없는 이미지의 예시일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서 특별히 관심 있게 본 작품을 소개한다.
첫 번째는 <불안함이 가득한 돌멩이>다. 작가는 주택가 카페에 방치된 삼미신(三美神) 조각에서 영감을 얻었는데, 이를 부드러운 물길, 어두운 하늘, 숲속을 배경으로 재배치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었다. 슬픈 표정, 껴안고 있는 모습, 도로변 어딘가에 버려져 미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 김정인의 먹먹한 색채와 만난다. 그 결과, 그림 앞에 선 관람객은 삼미신 조각이, 아니 돌덩이가 불안에 떨고 있음을 느낀다. 작품 중앙 하단부에는 큰 별이 있다. 작가는 포토타임에서 여럿이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 하나의 별을 만드는 청년들의 상징물을 넣음으로, 무거움과 친숙함을 한 작품 안에 표현했다.
두 번째 관심작은 연작으로 이루어져 있다. <밀려난 사람 Ⅰ,Ⅱ>는 가구의 일부분을 테이프로 칭칭 감아 들고 있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첫 번째 그림에는 토르소 부분이, 두 번째 그림에는 상체가 드러난다. 내 눈에는 두 작품을 위아래로 놓으면 완성작일 것 같다. 하지만 작가는 이미지를 나누어 창작했을 뿐 아니라 중간에 유리 조각에 비친 인물화를 배치하여 관람객에게 생각할 점을 던져주었다. 나무로 태어나 가구가 되고, 가구로 쓰이다 뽑힌 다리가 된, 기능 다 한 부속품에서 작가는 뒤처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작품 속 등장인물은 조각난 의자 다리처럼 밀려난 존재 그 자체를 상징할 수도 있고 뽑힌 다리로 표현된 상처받은 영혼을 보듬고 있는 더 큰 존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관람을 마치고 나오니 날씨가 쨍했다. 얼마간 걷다가 미술관 담당자의 전화를 받고 다시 전시실로 들어섰다. 이번에는 그의 작품이 다르게 보였다. 작품이 변한 것은 아니니 변한 것은 나의 기분일 텐데, 관람객과 작품이 그렇게 상호작용 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김정인 작가의 전시는 날씨가 좋은 날과 흐린 날, 느낌이 다르다. 김정인의 전시 《녹일 수 없는 이미지》에서 비 오는 날 감상하면 잘 어울리는 전시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월간토마토 vol.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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