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토마토줜장입니다.^^ 오늘은 그 간 월간토마토에서 리뷰했던 책 3권을 가져와 봤습니다. 함께 보시죠!😎
‘내가 생각하는 나’는 과연 나 그대로일까?
주나 반스 『나이트우드』

글 로와
새해가 다가오는 겨울 일요일 오후, 세 외국인이 독일 베를린 의 카페에 모였다. 각각 한국, 폴란드, 브라질에서 건너 온 서른 즈음의 여자들.
“눈 오네.”
“그러네.”
“작년 이맘때도 우리 여기서 셋이 모이지 않았나?”
“아마도.”
“주말 저녁이면 보통은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하지 않나?”
“너 지금 하고 싶은 얘기가 뭐냐?”
우린 다 같이 자기 앞의 잔을 들어 한 모금씩을 마셨다. 맥주든 커피든, 달콤하진 않았다.
“설마 우리 내년 이맘때도 여기 셋이 모이는 거야?”
“그거 저주냐? 아님 예언?”
“어쩌겠어. 멋진 남자는 카톨릭 신부거나, 게이거나, 그것도 아니면 친구 남편인데.”
우리는 또 한 모금씩을 마셨다.
“나는 계약 만료라 내년 이맘때는 여기 없을 거야.”
“어디로 가게 됐는데?”
“아직은 모르지. 오늘은 영국에 원서 보냈어.”
그 때 나는 몰랐다. 새로 옮겨가게 될 영국에서 어떤 놀라운 경험과 맞닥뜨리게 될 줄을. 유쾌하던 채용면접, 영화에서 튀어 나온듯한 신사 면접관의 입주면접, 그리고 여성이면서 동시에 남성이기도 했던 하우스메이트들. 내가 가지고 있는 줄도 몰랐던 선입견을 깨뜨려 준 고마운 친구들.
기억이란 얼마나 질기고 끈덕진지. 존재조차 잊고 있었건만, 어쩌다 하나 눈길이 가면 연이어 수십 개의 추억이 고개를 내밀곤 한다. 하나의 실마리에서 풀려나와 끝없이 이어지는 실타래처럼, 치렁치렁한 문장으로 욕망과 삶을 그려낸 독특한 작품이 있다. 미국 작가 주나 반스Djuna Barnes의 『나이트우드Nightwood』. 내게는 잊고 있던 지난 기억들을 소환해 재해석하고 새삼 그리워하게 만든, ‘인생소설’이다.
퀴어 문학의 고전 『나이트우드』
모더니즘의 대표 문제작이자 퀴어 문학의 고전으로 알려진『나이트우드』는 퀴어 문학이라는 장르조차 없던 1936년에 출판된, 어쩌면 최초의 퀴어 장편 소설이다. 작가 주나 반스의 이력도 이채롭다. 1892년에 일부다처 가정에서 태어난 그녀는 여성참정권 운동가이자 작가였던 자델 반스의 손녀로, 정규 교육 없이 폴리가미 신봉자인 아버지와 할머니로부터 배웠다. 가족관계는 복잡하다. 미성년 때 아빠 애인의 오빠에게 결혼으로 포장된 성적 대상자로 넘겨진 적도 있고, 친할머니와도 친족 이상의 관계로 분석되기도 한다. 부모의 이혼 후에는 어머니와 형제들을 부양하느라 스무 살 때부터 저널리스트, 일러스트레이터로 집안 경제까지 책임져야 했다. 성인이 된 그녀는 수많은 여성 애인들과 남성 애인들을 거느렸다.
2차 세계대전 이전 파리에 살던 미국 여성예술가들의 표상과도 같은 삶을 살았던 그녀가 9년간이나 격렬히 사랑하다가 끝내는 헤어진 연인 셀마 우드Thelma Wood와의 관계를 소재로 그려낸 대표작이 바로 『나이트우드』다. 당시 파리에 살았던 많은 동성애 여성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생활을 글로 남긴 경우가 매우 드물기에, 주나 반스의 작품은 더욱 큰 의미를 갖는다. 소설가이자 페미니스트인 도로서 앨리슨은 “『나이트우드』는 가장 좋은 의미에서 페미니스트 소설이다. 복잡다단하고, 여성이 중심이며,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평을 남겼다.
‘밤의 숲(나이트우드)’에 한 발짝 들어서기
『나이트우드』에는 남성과 여성이 온통 뒤섞여 있다. 여느 소설처럼 남성들과 여성들이 등장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의 인물 안에 여성성과 남성성이 혼재된 캐릭터들이 넘쳐난다는 이야기다. 섹스와 젠더의 차이가 큰 사람들. 소설 첫 장면에 등장하는 헤트비히 폴크바인부터가 그렇다. 출산이라는 지극히 여성적인 행위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람한 체격과 담대함을 보이는 여장부로 그려져 있다. 헤트비히가 아들 펠릭스를 두고 일찍 사망했기에, 직접 대면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며느리 로빈 보트. 그녀가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소년의 몸을 지닌, 키가 큰 소녀의 모습”인 주인공의 대사는 별로 없고, 온통 주변 인물들 간의 사랑과 욕망, 기억과 대화로 소설이 이어진다. 목소리 없는 주인공이라니, 묘하다. 게다가 덩굴처럼 치렁치렁한 문장과 페이지마다 흥건한 시적 비유가 독자의 진입장벽을 높인다. 오죽했으면 소설 편집자였던 T. S. 엘리엇도 “시로 훈련된 감수성만이 그것을 온전히 감상할 수 있다”고 평했을까. 하지만 한편으로는 바로 이것이 『나이트우드』 만의 독특한 맛이다. 특이한 맛의 음식이 그렇듯, 일단 즐기기 시작하면 헤어날 수 없이 빠져드는 소설!
입담 좋은 그 (혹은 그녀), 매슈 오코너
주인공 로빈과 대조적으로, 다른 캐릭터들 대사까지 죄다 끌어 모아 혼자 다 해버리는 듯한 캐릭터도 있다. 부인과 의사 매슈 오코너는 알고 보면 무면허인데, 그의 어둑어둑한 방에는 가발을 비롯해서 여장이 넘쳐난다. 수다스러운 아일랜드인으로 설정된 그는 마침표가 가끔만 나오는 긴 대사들로 소설을 채운다. “속된 말로 ‘페고트’나 ‘페어리’, 혹은 ‘퀸’이라 일컬어지는 몸”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매슈. 그의 입담은 가히 독보적이다! 이를테면 “벽돌을 백 장 누이고도 벽돌공이라 불리지 않더만, 사내아이 하나 누였다고 그때부터 남색자라는 꼬리가 붙다니!”라며 억울함을 토로한다던지, “남정네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뭔지 알아요? 둘 중 하나예요. 속여도 될 정도로 멍청한 여자를 만나거나 자신을 속여도 눈감아줄 만큼 깊이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는 것.”이라고 명쾌하게 정의하기도 한다. 그뿐이랴. 캐릭터 설명부터 시작해서 온갖 멋진 명대사까지도 독차지한다.
우린 다만 욕망에 둘러놓은 거죽일 뿐이요, 기어이 죽고 말 숙명에 맞서 근육을 옥죌 따름이에요.
이 정도면 프로이트문학상을 받아야지 않나 싶다. 로빈은 작가 의 연인 셀마 우드를 반영한 캐릭터라는데, 매슈의 대사로 표현되는 로빈은 이렇다.
이 세상에는 살기 위해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남작부인이 그런 경우로, 그 허락을 내려줄 누군가를 찾지 못하면 그이는 몸소 순수를 빚어낼 사람이에요. 두려워해야 마땅할 원시적인 형태의 순수를요. (중략) 삶이란 손수 발명할 때 비로소 제 고유의 삶이 되기 마련이죠.
로빈, 노라, 제니 - “사랑, 그 끔찍한 것!”
남작부인 로빈은 아들 기도를 힘겹게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아이를 원치 않았어!”라며 남편 펠릭스의 얼굴을 갈기고 집을 떠난다. 로빈이 서커스 관람장에서 첫눈에 ‘홀린’ 노라 플러드의 집에 함께 사는 동안 그들은 진정으로 열렬했다. 그러나 이따금 비치는 일순간의 몸짓이나 표현으로부터 노라는 알았다. “로빈이 기어이 돌아가고 말 세계로부터 온 사람임을”. (사랑에 빠진 상대에게서 찰나에 느껴지는 서늘한 예감을 내 영혼은 얼마나 열심히 부정하려고 노력하는가! 하지만 그런 감각은 또한 얼마나 잘 들어맞곤 하던가!) “로빈이 이 자리 저 자리, 이 잔 저 잔, 이자 저자 전전하는 것을 보며” 노라의 마음은 피폐해져 간다. 진정 “로빈을 간수할 길, 그 유일한 방법은 죽음뿐임을 노라는 이제 알았다.” (그렇다. 세상에는 그 무엇으로도 구속할 수 없는 사람이 존재한다. 잔인하게도, 그런 자들은 대개 치명적으로 매혹적이다. 당신은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는가? 심장을 빼앗긴 적은?)
로빈의 다음 상대는 남의 것 빼앗기를 즐기는 ‘점거자’ 제니 페더브릿지. “남편들은 하나같이 기진하여 숨을 거두었다. 제니가 그들을 역사적인 인물로 만들고자 밤낮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안간힘을 쏟으니, 누구 하나 끝내 버텨내질 못했다.”는, 네 차례 이혼 경력이 있는 중년 여성이었다.
새벽 세 시 매슈의 진료실. 노라가 찾아와 제니는 어떤 사람이냐고 묻자 그는 “사랑, 그 끔찍한 것”으로 엮인 로빈-노라-제니, 이 세 여성의 미래를 매슈는 이렇게 예언한다.
“그 왜, 뿔이 한데 뒤엉켜 목숨을 다한 채 발견되는 가련한 짐승들처럼요. 그렇게 얽힌 짐승들은 원치도 않았던 서로에 대한 이해와 정보로 머리가 비대해지기 마련이죠. 얼굴 맞대고 눈과 눈을 마주한 채로 죽음이 닥치는 순간까지 서로를 생각하는 수밖에는 없으니까. 그런데 그게 바로 당신과 제니와 로빈이 맞을 운명이라니까.”
역시나, 작가가 애정하는 캐릭터의 대사는 허투루 들을 게 아니다. 소설의 마지막 장 <홀리다>를 꼭 확인해 보시길!
짜장이냐 짬뽕이냐 혹은 홍차냐 커피냐
크리스토퍼 이셔우드Christopher Isherwood의 소설 『싱글맨A Single Man』(1964년)의 한 문장처럼, “질문을 받기 전까지는 자신이 아는 줄도 모르는 것들이 있다.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사람을 만날 기회란 많지 않다.” 매슈와 노라가 주고받는 수많은 질문이 가득한 밤의 숲에서 길을 잃어가며, 과연 내가 가진 선입견과 사고의 틀은 어디서 비롯되고 과연 온당한지 의문을 가졌다. “나는 내가 자칭하는 대로인가요?”, “전에는 아예 모르고 살았어요 – 안다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안 게 아니었죠.”
내가 소수자 중에서도 소수자인 ‘아시아계 외국인 여성’으로 유럽에서 살아보지 않았더라면, 성소수자 하우스메이트들과 함께 지내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아직도 유교문화와 모태신앙에 젖어 성소수자에게 막연한 거부감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오직 소수만이 시스템의 문제를 인식하고 소수자들을 알아보는 법!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는, 유럽에서 4년 반 사는 동안 뒤돌아보게 멋진데다가 예의도 바른 사람들은 거의 성소수자였다. 그들은 나같은 소수자들에게도 똑같이 친절했으니. 그들은 소수자들의 생존법은 연대임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러니 어찌 내가 동성애자에게 우호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이성애자가 당연시되고 심지어 도덕적으로도 우월하다고 여겨지는 현재의 시스템에서, 성소수자들은 매 시간 불편함을 느끼리라. 절대다수인 이성애자들은 그들에게 꼬리표를 붙이고 온당치 않은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 왔다. 전자회사 애플의 상표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탄압받다가 끝내는 독극물이 주입된 사과를 먹고 세상을 뜬 세기의 천재 앨런 튜링을 상징하지 않던가. 그가 그렇게나 일찍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컴퓨터 산업과 인공지능 연구는 얼마나 더 앞당겨질 수 있었을까! 비극은 한 건으로 그치지 않는다. 오스카 와일드, 주나 반스, 그리고 숨어 지내느라 이름조차 남지 않은 그들과 그녀들. 욕망의 대상이 동성이라는 게 어째서 처벌받을 이유가 되나? 다름을 인정하기 싫다는 유아기적 거부증을 도덕이나 종교라는 근사한 명분으로 포장한 폭력, 종교와 도덕이라는 허울 좋은 칼날에 인류 역사상 얼마나 많은 위대한 정신이 파괴되었는가? 얼마나 많은 권력자들이 권력을 유지하고 생각 없이 사는 대중들을 위에 군림해 왔는가? 그리고 21세기인 지금까지도 진행 중인가?
성적 취향, 그게 뭐라고. 짜장이든 짬뽕이든 둘 다 중국음식이고, 커피든 홍차든 모두 음료일 뿐이다. 성적 취향이 어떻든지 간에 그래봤자 모두 지구인 아닌가? 혹시 모르지 않나. 평생을 자신이 이성애자인줄로만 알고 살아왔건만, 사실은 단지 기회가 없어서 성적 취향이 개발되지 못했을 뿐인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어떨까? 독자들께서는 자신이 어떤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죽은 자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올가 토카르추크, 민음사, 2020

글 로와
어느 겨울날, 폴란드 접경 지역 산골에서 사냥꾼이 시체로 발견된다. 최후의 식사였던 듯 그의 목구멍에는 사슴 뼈가 걸려있고, 발목을 넘길 정도로 눈이 쌓인 집 주변은 온통 사슴 발자국투성이다. 그날 이후, 여름 별장과 사냥터를 제외하면 호젓하기 그지없는 이 산골 마을에 하나둘 시체가 늘어간다. 범인은 누구일까? 인근 주민? 그렇다면, ‘괴짜’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시비엥토페우크? 동물애호가 듀셰이코? 아니면 블레이크의 시를 번역하는 채식주의자 디오니시오스? 아니면 집 주변에 온통 발자국을 남긴 사슴들?
『죽은 자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는 201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폴란드 여류 소설가 올가 토카르추크(Olga N. Tokarczuk)의 장편 스릴러 소설이다. 영국 시인 블레이크와 그의 작품은 이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책 제목부터 윌리엄 블레이크의 연작시 「천국과 지옥의 결혼」 중 「지옥의 격언」에 나온 문구에서 따왔다. 각 장 도입부마다 그의 시구를 인용했다. 판화로 보이는 흑백 동물 삽화도 왠지 평생 판화가였던 블레이크를 연상시킨다.
전복적인 시를 많이 남겼지만, 평생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했던 블레이크처럼, 이 소설의 주인공 야니나 두셰이코도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잊힌 존재다. 두셰이코는 폴란드와 체코 접경 마을 여름 별장들을 겨울 동안 관리해주는 대가로 생계를 유지하는 60대 여성이다. 개와 여우를 자유롭게 놓아주라고 주장한다거나 사냥터에서 사냥하지 말자고 외쳐도, 누구도 귀담아듣지 않는다. 동물과 인간을 같은 지위로 바라보는 두셰이코는 사냥터에서 죽은 동물을 발견할 때마다 먹먹한 비탄과 애도에 잠긴다. 끊임없이 상중(喪中)이라는 그녀는 사냥터에 버려진 멧돼지 사체를 쓰다듬으며 울먹이곤 한다.
두 번째, 세 번째 시체가 발견될 때마다 경찰은 미궁 속으로 더욱 깊숙이 빠져들었다. 연이어 발견되는 시체의 공통점은 주변에 사슴 발자국이 있다는 점, 평소 사냥을 즐기던 자들이라는 점뿐이었다. 자살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살인 동기나 용의자도 없는 상황이다. 여름에는 별장 덕분에 북적대지만 추운 겨울에는 굳이 산골 마을에 머무르는 사람이 없어 겨우내 상주하는 주민이라고는 ‘괴짜’, 두셰이코, ‘왕발’, 이렇게 셋뿐이다. ‘괴짜’는 지방 검사의 아버지이고, 두셰이코는 나이 든 여성이고, 사냥꾼 ‘왕발’은 첫 희생자였다. 급한 대로 경찰은 ‘괴짜’와 두셰이코를 계속 경찰서로 불러댄다. 상부에 보고하려면 범인은 못 잡더라도 우선 목격자의 진술서라도 있어야 할 테니까. 지겹도록 반복 진술을 하던 어느 날, 두셰이코는 경찰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동물을 보면 그 나라가 어떤지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동물을 대하는 태도 말입니다. 사람들이 동물에게 잔인하게 군다면 민주주의나 그 어떤 시스템도 소용이 없습니다.”(148쪽)라고.
내 생각도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여성, 아이, 노숙인 같은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그 사회가 어떤지를 알 수 있다. 아동 성폭행 사건에 어떤 처벌을 내리는지, 여성 성추행에 관해 어디서부터 사건으로 바라보는지, 동물 학대가 얼마나 일상화되었는지는 한 나라의 문화와 인식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다. 과연 대한민국은 어떤가? 생후 6개월 아기 성폭행 동영상을 찍어 유통해서 돈을 벌어들인 작자도, 길고양이 배를 갈라 빼낸 내장을 전시한 미친 것도, 자기들에게 소위 ‘인권’이 있다는 헛소리를 지껄인다. 게다가 재판을 통해서조차도 이런 범죄를 선진국과 비교해 턱없이 약하게 처벌한다. 이것이 세계 10위권 경제 선진국의 민낯이다. 우리는 무엇을 팔아 돈으로 바꿔 온 걸까? 과연 ‘잘 살게’ 된 거라 할 수 있을까?
두셰이코는 격분하여 말을 잇는다. “누군가의 뱃가죽으로 완성한 신발과 소파, 숄더백, 누군가의 털로 몸을 따뜻하게 유지하고, 누군가의 몸을 먹고, 그것을 토막 내어 기름에 튀기고 있습니다. 이런 잔혹한 행위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는 게 말이 되나요?”(157쪽)라고. 사실상 이는 작가 토카르추크의 대사이리라. 생태주의, 채식주의, 동물권 수호, 여성 인권 보장 등에 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해 온 그녀의 목소리는 다른 작품 『방랑자들』과 『태고의 시간들』에서도 드러난다. 그녀는 노벨상 수상 기조 강연에서 “욕심, 자연을 존중할 줄 모르는 태도, 이기주의, 상상력의 결핍, 끝없는 분쟁, 책임 의식의 부재가 세상을 분열시켰고, 함부로 남용했고, 파괴했다.”라며 인류를 비판했다. 나는 이것이 옳은 분석이라 생각한다. “세상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거대한 그물망이며, 그 속에서 우리 인간은 다른 존재와 보이지 않는 실타래로 연결되어 상호작용하고 있다.”라는 그녀 말에 동의한다.
한편, 토카르추크는 ‘별자리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기도 했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은 별자리를 잘 읽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다른 인물의 성격이나 행동을 그들의 별자리로 대략 파악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도 두셰이코는 점성가 수준이다. 그녀는 과거 교량 건설 엔지니어로 일하던 시절에 갈고닦은 수학적 재능을 점성술 영역에서 발휘한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생월생시부터 따져 물을 정도다. 물론 이것은 소설이 너무 교훈적인 색채가 짙어질까 봐 설치해 둔 작가의 기술이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두셰이코 생각으로는 인간이란 ‘문신으로 새겨진 수감번호’처럼 탈출할 방법도 없이 주어진 운명이라는 족쇄에 모두가 묶여 있다. 비록 신들의 장난에 불과할지라도 운명이라면 순응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말이다.
혹시 운명론자이신가? 올해의 토정비결은 보셨는가? 나는 둘 다 아니었는데, 생일 횟수가 쌓여갈수록 왠지 ‘운명’이란 게 있는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노오력만으로 바꿀 수 있는 게 과연 얼마나 되는지, 어쩌면 정말로 ‘별들에게 물어봐’가 정답은 아닐지를 요즘 심각하게 고민하곤 한다. 운명이 있다면, 지금 나의 번뇌조차 별자리와 운명에 아로새겨져 있다는 건가. 작가는 이런 말로 위안을 주었다. “별의 신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종종 그 별들의 영향력에 압도당한다. 별을 읽지 않거나 읽을 수 없는 뉴턴과 같은 사람은 또한 자신의 실험과 추론에 압도당한다. 그러니 결국 우리는 모두 실수와 오류의 대상인 것이다.”(363쪽)라고. 그리고 또 한마디, “모든 것은 지나가는 법. 현명한 사람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으니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250쪽)라고도.
결국, 범인은 누구일까? 스릴러 책 리뷰에서 절대 밝히면 안 되는 게 범인이 아니겠나. 범인 찾기 외에도 블레이크의 시구나 별자리에 따른 성격도 알 수 있는 독특한 스릴러, 『죽은 자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를 2021년에 읽어볼 만한 책으로 추천해 드린다.
『모든 이의 과학사 강의』
정인경, 여문책,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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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책이 대세다. 과거 전 국민이 열광하던 재테크 서적 열풍은 ‘재테크 관련 책을 살 돈을 아끼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재테크의 시작이다.’라는 깨달음을 남기고 사그라들었다. 뒤를 이은 힐링 서적들은 ‘대안 없는 토닥토닥의 무한반복을 활자화한 책을 읽으며 도를 닦을 바에야 신경정신과에서 처방한 약을 먹는 편이 더 빨리 힐링 되는 방법이다.’라는 결론을 주었다. 꾸준히 베스트셀러에 머무르던 자기계발서들조차도 ‘취직한 사람들의 여가활동 지침서’라는 판단으로 구매가 미뤄지는 시대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급변하는 과학기술 시대에 상식이나 쌓아두자’가 되기라도 한 걸까? 요즘에 서점 신간 코너에는 과학책이 꽤 많이 눈에 띈다. 최소한 소설책보다는 훨씬 더 많아 보인다.
선택지가 너무 많다 보면 오히려 결정을 내리기는 힘든 법이다. 과학책이 한 달에도 수십 권이나 쏟아져 나오는 통에 독자로서는 대체 뭘 읽어야 할지 판단하기가 더 어려워지고 말았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가 과학책의 대표이자 거의 모든 것이던 시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과학 정보는 온라인뿐 아니라 신문 지면과 매스미디어에도 넘쳐난다. 밥도 안 먹고 오직 읽기만 한다 해도 절대 못 다 읽고 죽게 될 이 무시무시한 과학 정보의 홍수 속에서 대체 나의 소중한 시간을 들여도 아깝지 않을 과학책은 대체 무엇인가. 누가 좀 알려줬으면, 하시는 분이 계실까 봐, 이번 달에는 과학사 서적을 한 권 추천하려 한다. 나처럼 성미 급한 독자분을 위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인경 작가의 『모든 이의 과학사 강의』이다.
‘하고 많은 과학사 서적 중에 왜 하필?’이라 물으신다면, 나는 최근 과학 서적 중에서 이 책만큼 넓고 깊게 통찰한 책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대 장점은 쉽게 읽힌다는 점이다. 조금만 더 과장하자면,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문장이다. 게다가 번역서가 아니라 한국 작가가 모국어로 쓴 책이다. 많은 과학 서적이 과학자들의 전공 용어 남발 때문에 제대로 읽히질 못하는 게 현실이다. 월간 토마토를 꼼꼼히 읽어오신 독자라면 아시겠지만, 내가 책 리뷰로 과학사 서적을 선정하기는 처음이다. 직업이 과학자이다 보니 짬 내서 읽는 책은 주로 문학이나 철학 서적이었기 때문이다. 뭐든 직업이 되면 다른 이의 결과물을 즐긴다기보다는 분석가가 되어버리고 만다. 요리사가 재미로 맛집 투어를 하겠는가? 시작은 재미였을지라도 분석과 비평으로 빠질 게 뻔하지 않은가? 내게는 과학 서적이 그렇다. 나는 SF 영화도 재미있게 관람하질 못한다. ‘산소가 없는 상황에서 저렇게 불이 확 타오르지 못할 텐데’라든지 ‘중력을 갑자기 느끼는데 벌떡 일어서서 잘도 걷네’라든지, 하는 식으로 맞지 않는 설정이 자꾸만 눈에 들어와서다. 이런 까다로운 독자인 나도 이 책만큼은 푹 빠져들어 가며 읽었다. 쉽게 읽히면서도 내용과 구성이 탄탄하다. 이런 책을 만나다니 가슴이 뛴다. 완전 득템한 기분이랄까.
『모든 이의 과학사 강의』 첫 문장은 “과학은 인간이 만든 언어다.”이다. 힘이 느껴지는 문장이다. 아마도 많은 고민 후에 선택한 첫 문장이리라. 이 책의 부제는 첫 문장과 결이 같은, “과학과 문화로 이해하는 과학 인문학”이다. 책을 읽던 중에도, 모두 읽은 지금에도, 이 표현은 결코 과장되지 않았다고 느껴진다. 오히려 읽으면서 머릿속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든다. 과학사를 따분하지 않은 새로운 시각에서 빠르게 훑어 읽게 되기 때문이리라. 구석기 시대부터 고대 문명, 중세를 거쳐, 과학혁명의 근대와 현대과학기술까지를 다루는데도 절대 지루하지가 않다. 게다가 그 오랜 기간을 372쪽 안에서 아무런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으니, 작가의 역량이 놀라울 뿐이다.
과학이란 대체 무엇인가? 딱딱하기 그지없는 학문의 일종, 소위 전문가들만의 영역일까? ‘패러다임’이라는 용어를 탄생시키면서까지 중요하게 여겨지는 서양의 과학혁명이 어째서 동양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나? 유럽의 과학이 승승장구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우리에게 현대과학이란 무엇일까? 이러한 다소 무거운 질문들에 관해 답을 주는 책이었다. 한편으로는 최초의 근대과학자는 누구였을까? 과학혁명이라는 단어는 언제 생겨났을까? 등, 회식 자리에서 아는 척하기에 좋을 법한 질문과 답변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조선의 과학자가 있다. 동양의 코페르니쿠스라 불리는 18세기 조선의 과학자, 홍대용이다. 그는 『의산문답』이라는 책에서 세상에 중심이 특별히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어디든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썼다고 한다. 사람과 천지만물이 모두 귀한 존재라는 인물균人物均 사상을 펼쳤다 하니, 우리 역사 최초의 포스트 휴머니즘이 아닌가? 이런 멋진 철학자를 왜 나는 기억하지 못한 걸까? 나에게는 역사 교과서에서 딱 한 번 언급되었던 학자를 재발견한 셈이다.
한편 정인경 작가는 전작 『뉴턴의 무정한 세계』 (정인경, 돌베개, 2014)에서도 ‘우리의 시각으로 재구성한 과학사’를 들려준 적이 있다. 나는 이 책도 마음에 들었다. 작가의 전공이 한국과학사라서 깊이가 남다르기도 하려니와, 근대 한국의 시선으로 바라본 과학사 책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완성품처럼 이식되어 온 근대 과학이 우리 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를 바라보고, 현재 내가 어떠한 역사적 맥락에서 과학기술자로 살고 있는지에 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꼭지마다 『무정』이나 이상의 시 등 한국 근대 문학을 도입부에 넣고, 당시의 시대 상황과 과학의 의미까지를 융합하여 써 내려간 글은 더없이 신선했다.
역사에 조예가 깊지 못한 평범한 시민인 내게 한국의 근대는 그저 지우고 싶어도 지울 수 없는 암울한 흑역사일 뿐이다. 최근에는 영화 속에서나 낭만적으로 비칠 뿐이지. 우리의 근대가 침울했던 이유가 바로 서양의 과학 때문이었음을 새삼 알게 되었다. 대포와 함장으로 표현된 근대과학은 소위 비문명국들을 굴복시키고 착취하는데 일등 공신이었음을 말이다. 과학혁명으로 새로이 패권을 잡게 된 유럽을 두려운 시선으로 바라보며 얼른 따라 한 일본과 달리, 조선은 세상의 변화와 과학이라는 무기를 감지하지 못했고 그것은 아시아의 오랜 패권 국가 중국도 마찬가지였다. 역사로 나타난 결과는 우리가 아는 대로다. 근대과학은 고대 자연철학과 달리 학자들만의 학문이 아니었다.
『모든 이의 과학사 강의』 뒤표지에 문장처럼, “과학은 모든 이의 것이고 모든 곳에 있었다.” 과학은 도서관 속 박제된 학문이 아니라 인간의 지적인 문화 활동임을 조명한다. 오늘날은 흰 가운 입은 과학자만이 실험실 안에 틀어박혀서 과학을 하는 시대가 아니다. 과학은 기술과 융합되었고, 그 창조물은 이미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자동차, 전기, 인터넷, 핸드폰, 와이파이 등 과학기술의 결과물은 수없이 많다. 간단한 예로, 평범한 현대인이 전기와 인터넷 없이 하루라도 문명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까? 오늘날의 과학기술은 생활 필수조건이 된 지 오래다. 입는 것도 먹는 것도 화학적 가공품이 많아진 오늘날, 과학을 아는 것은 현대인의 생존 상식이다.
개인의 생존뿐이랴. 우리는 이제 개인의 생존뿐 아니라 지구의 생존까지도 걱정해야 한다. 모든 것을 다 알게 되었고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는 오만함에서 자연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던 근대과학은 마냥 무궁무진할 줄로만 여겼던 토양과 공기를 오염시켰고, 지구의 온도조차 올려 버렸다. 환경과 인류는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고, 현대과학이 나아가는 방향에 따라 인류뿐 아니라 지구의 존속 가능성도 달라지리라. 알아야만 행동하고, 행동해야만 살아남는다. 그러니 우리 과학책을 읽자. 우선 『모든 이의 과학사 강의』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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