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대상이 혁신을 주도하는 사회는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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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편지

혁신 대상이 혁신을 주도하는 사회는 우울하다

by 토마토쥔장 2021.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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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 대상이 혁신을 주도하는 사회는 우울하다

[2021년 3월호 월간토마토 편집장 편지]

 

 지난 겨울에는 예년보다 눈을 많이 보았습니다. 눈이 쏟아지는 동안 하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며 세상이 온통 흑백으로 변하는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잔뜩 찌푸린 채 눈을 쏟아 내는 하늘도, 눈이 덮어버린 세상도 백색 아니면 겨울 잿빛이었습니다. 그런 흑백 세상은 몰입감을 주었습니다. 그동안 컬러풀한 세상에 둘러싸여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는 힘을 잃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흑백으로 바뀐 단순한 세상은 오랜만에 머리를 맑게 해 주었습니다.

 

 생각이 많았던 차에 짧게나마 단순하게 세상을 볼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요즘, 급격한 세상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다는 불안감도 있고, 크고 작은 영역에서 벌어지는 변화에 기대감보다는 두려움이 일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 여기저기서 북적북적거리며 많은 일이 끊임없이 벌어지는데 썩 매력적인 현장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지구는 끊임없이 다른 방식의 삶을 모색하지 않으면 미래가 없다는 경고를 보내지만, 별 뾰족한 대안이 보이지 않습니다. 잠깐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으면 좋을 텐데, 폭주하는 기관차처럼 잔뜩 성질을 내며 앞으로만 내달립니다.

 

 물론, 우리 사회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새롭고 다양한 정책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실험합니다. ‘혁신’이 필요하다는 부분에는 사회 적 합의를 이룬 것처럼 보입니다. 다만, ‘혁신’이라는 달콤한 어휘에 사로잡혀 본질을 잊어버린 듯합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한 혁신이 아니라 ‘혁신’ 그 자체에 매몰되는 느낌입니다. 껍데기만 그럴듯할 뿐, 그 안에 담긴 삶은 별다른 변화가 없습니다. 아니 불평등은 더욱 심화되고 인간다움은 사라진 채 이미지만 채우며 더 끔찍하게 변하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삶은 너무 큰 세상 속에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채 퉁쳐집니다.

 

 대한민국에는 모두 18부가 있습니다. 고용노동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교육부, 국방부, 국토 교통부, 기획재정부, 농림축산식품부, 문화체육 관광부, 법무부, 보건복지부, 산업통상자원부, 여성가족부, 외교부, 중소벤처기업부, 통일부, 해양 수산부, 행정안전부, 환경부입니다. 모든 부서가 혁신 정책을 만들어 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도시재생뉴딜, 마을공동체를 비롯한 다양한 활성화 사업, 사회적경제, 주민자치, 문화도시, 리빙랩, 디지털사회혁신을 비롯한 다양한 청년정책까지. 들여다보면, 가짓수와 예산이 만만치 않습니다.

 

 무슨 일이든 긍정적인 성과를 찾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세상에 쓸모없는 시도는 없으니까요. 문제는 자원과 시간의 제약입니다. 자원과 주어진 시간에 한계가 있다면, 쓸데없는 시도를 줄이고 효율적인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 과정에서 최소한 구성원이 그 사회가 어디로 가는지는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도통 모르겠습니다. 세계와 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내 삶에 직접 영향을 끼치는 지역은 더욱 그러합니다. 대한민국 18부에서 결정한 다양한 정책을 내려받아 시행하는데, 본래 방향성을 상실한 채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맴을 도는듯 합니다.


지역에서 구현 하는 정책의 주도성을 해당 지역이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거창한 사업명만 둥실둥실 떠다닐 뿐 내 삶에 근원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합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중앙부처에서 계획한 테두리 안에서 옴짝달싹 못합니다.

 

 지역이 스스로 정책을 기획하고 실현할 구조도 역량을 갖지 못해서입니다. 우리 사회에 이를 가능케 할 자원도 부족했고 시민이 스스로 미래를 상상하고 정책으로 구현할 수 있는 시스템도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늦게나마 지방과 분권을 중요하게 여기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법도 제정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 답답하기만 합니다. 자원과 시스템 을 적절하게 활용할 역량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겁니다. 이런 부조화를 일으키는 이유는 ‘혁신의 대상이 혁신을 주도하는 현실’ 때문이라고 봅니다.

 

 굴곡진 근현대사를 보내며 우리 사회는 철저한 관료주의사회로 성장했습니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구축하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라는 구호를 외치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의 ‘관료성’은 여전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가장 시급한 혁신 대상을 혁신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은 ‘시민’에게 있습니다.


‘지방 분권과 주민 자치’는 결국 관료주의 사회 해체를 의미합니다. 이를 주도하는 건 제도와 시스템이 아닙니다. 분권과 자치를 실현할 수 있는 시민 역량입니다.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보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웠던 것처럼 관료주의사회를 해체하고 민주주의를 실제로 구현할 수 있도록 강제해야 합니다. 더 많은 시민이 우리 사회에 등장 해야 합니다. 지금처럼 관료가 기획한 정책 속에 시민이 소품으로 등장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저는 ‘기본소득’ 지지자입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기본소득 시행만이 지금 내달리는 이 폭주를 멈추고 호흡을 가다듬도록 해 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전국민 기본소득 시행으로 정부부처가 사용할 수 있는 사업 예산을 말려야 합니다. 사회구성원이 다음 세상을 준비할 시간을 갖고 스스로 역량을 키울 수 있지 않을까요? 현재 우리 사회가 가진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안입니다. 지금 우리 관료 집단은 가용 예산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월간토마토 편집장 이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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