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의 오랜 역사를 기록하다
본문 바로가기
문화예술

강원도의 오랜 역사를 기록하다

by 토마토쥔장 2021. 12. 15.
728x90
반응형

강원도의

오랜 역사를 기록하다

특집

2021 춘천 한국지역도서전 특별전 《강원도 기록전 - 오래된 미래》


글·사진 하문희

월간토마토 vol. 173.


2021년 춘천 한국지역도서전 특별전시회 주제는 강원도다. 강원기록 문화네트워크와 강원지역출판연대는 “가장 강원도다운” 모습을 보여 주고자 태백산맥과 동해, DMZ와 댐, 산촌과 화전민 그리고 탄광촌의 역사와 그곳에 생활한 사람들을 소개하는 특별전을 열었다. 전시회에서는 다양한 고향 모습을 기록했다. 떠난 사람들과 돌아온 사람들의 발자취를 사진과 함께 소개했다. 

강원도는 전쟁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곳이다. 《강원도 기록전 - 오래된 미래》의 첫 번째 코너는 강원도 철원 구호 주택 마을 이야기다. 수복지구인 철원군은 특히 역사의 아픔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지역이다. 1953년 7월부터 1954년 11월까지 철원군은 미국군의 통수를 받았다. 이때 군인들이 설정한 민간인 출입통제선 때문에 주민들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대신 군인들이 임시로 설치한 천막에서 생활해야 했는데, 당시 철원 동송 지역만 하더라도 천막 개수가 100여 개가 넘었다고 한다. 이렇게 밀려 들어오는 정착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든 것이 구호 주택이다. 현재까지 파악된 구호 주택 마을은 약 20개 정도로 추정된다. 대부분은 거의 파괴돼 터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지만, 아직도 마을을 형성하고 주민이 사는 곳도 있다. 철원군 갈말읍 신철원4리에 사는 변대복 씨의 인터뷰를 통해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느껴볼 수  있다. 

두 번째 코너에서는 철원 민통선 마을 생창리를 소개한다. 북한 아래 첫 동네라고 불리는 민통선 마을은 한국 전쟁이 끝난 직후 이주민이 집단으로 들어서며 마을이 형성됐다. 그중 생창리마을은 과거 김화군의 군청 소재지로, 1914년 여러 마을이 병합돼 생창리로 개칭됐다. 본래 인구 2만 명이 살던 큰 동네였지만 전쟁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지금은 마을 안 DMZ 방문자 센터와 김화군 재현관이 설치돼 사라진 마을을 추억하는 공간만 남아 있다. 또한 DMZ 생태공원이 조성돼 관광객에게 접경 지역의 모습을 보인다. 

한국지역도서전 개최지인 춘천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세 번째 코너는 춘천 소양호 수몰민들의 이야기다. 소양호가 만들어지면서 춘천 북산면과 동면 일부, 양구 남면, 인제 남면 등이 물에 잠겼다. 이 코너에서는 순식간에 고향을 잃고 떠나야만 했던 당시 사람들의 현장감 있는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그다음에 나오는 이야기도 수몰 지역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횡성 댐이 건설되기 이전 수하리에 살던 주민들의 모습과 실제 인터뷰를 담았다. “고향은 모두에게 똑같은 고향이지만 떠나는 이주민의 삶의 가치는 자본에 의해 판가름 난다.” 당시 이주민들의 심정이 어땠는지 나타내는 문장이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탄광촌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태백 철암 탄광촌과 정선 함백탄광 이야기는 한국 근현대사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 준다. 1960~1970년대는 탄광의 시대였다. 황금과 꿈을 찾아 삼방동에 둥지를 튼 사람들은 서로 도우며 삶을 꾸려갔다. 석탄 합리화 정책 이후 폐광이 늘어 가면서 이주민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남은 사람들은 빈집에 텃밭을 가꾸며 생계를 유지했다. 항상 북적이던 철암시장에는 주전가 연기와 남은 상인들의 한숨만이 남았다. 

강원도 정선 함백은 한때 희망의 땅이었다. 진용선 정선아리랑연구소장의 말에 따르면 그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함백은 “배고픔이 없고,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곳”이라는 소문이 돌았다고 한다. 부푼 기대를 안고 함백으로 떠나온 사람들은 대부분 탄광촌에서 일했다. 위험하고 힘든 일이었지만, 덕분에 가족이 풍족하게 생활할 수 있었다. 1970년대에는 함백 사람들 사이에서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1980년 청정에너지인 가스가 보급되면서 함백 탄광촌도 쇠퇴하기 시작했다. 찬란한 역사를 자랑한 함백광업소는 결국 1993년 10월을 끝으로 폐광했다. 이토록 거대한 탄광 산업을 진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함백에는 남아 있는 광업소가 없다. 당시 광부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 많던 광부는 어디로 갔는지, 몇 미터나 되는 땅속에서 광부들은 어떤 모습으로 일을 했는지, 이제는 영영 찾아볼 수 없는 과거가 됐다. 

다음은 속초 아바이마을 이야기다. 속초 앞바다에 위치한 아바이마을은 ‘속초의 하와이’라고 불렸다. 이렇게 불린 이유는 아바이마을이 배를 타고 속초 시내로 넘나들어야 했던 지리적 위치 때문도 있지만, 드물게 함경도 억양을 사용하는 주민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바닷가 모래톱 위에 있는 아바이마을은 전쟁과 이산가족의 아픔을 간직한 곳이다. 전쟁통에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은 금방 고향에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거센 파도에 집이 쓸려 나가고, 지붕에서 물이 새도 고향에 갈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그렇게 가족과 고향을 그리던 사람들은 70년이 넘도록 돌아가지 못한 채 그대로 땅에 묻혔다. 아바이마을 망향동산에는 지금도 실향민들의 아픔이 남아 있다. 

강원도 하면 화전민을 떠올리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류제원 기록사진가가 찍은 사진으로 가득한 이 코너는 잊힌  화전민들의 생활을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조선 시대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강원도 지역에 살던 화전민들이 어떻게 밥을 짓고 농사를 지었는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 당시 사용한 생활 도구와 집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강원도 기록전 - 오래된 미래》의 마지막 코너는 고성 섬마을 명파리다. 명파리는 1953년을 시작으로 1978년까지 전국 팔도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농사지으며 먹고살기 위해 만들어진 마을이다. 초반에는 이주민들이 땅을 개간했다. 이주민들은 개간하면 내 땅이 된다는 희망으로 일했지만, 원주민들의 횡포와 개간비 요구 등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1960년 사천리 출입 영농이 가능해지면서 명파리 전입 주민이 늘어났다. 명파리에 있는 명파마을에는 군부대 방첩대(보안대)와 경찰이 있었다. 이들은 주민들의 이동 시간을 제한하거나 방문객을 제한하는 등 횡포를 부렸다. 방첩대는 1970년 초반에 다른 부대로 갔지만, 악명은 여전했다. 명파리 일대는 민통선 지역으로 주민이 적어 원전건설 후보지 중 하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주민들이 발 벗고 나서 원전 시설 건설을 반대했다. 고성공군설운동장에서 고성군민 1만 명이 모여 반대 시위를 하기도 했다. 거센 반대로 결국 정부는 주민들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강원도 기록전 - 오래된 미래》 는 대한민국의 역사와 강원도 땅에 관한 깊은 이해를 돕는다. 강원기록문화네트워크는 “잊혀 가는 역사와 장소를 기록하고 사라지지 않게 기록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며 다짐을 밝혔다. 


글•사진 하문희

월간토마토 vol. 173.


월간토마토 구독하기

https://tomatoin.com/app/request/index?md_id=request

 

토마토

 

tomatoin.com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