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충구수제화 - 이충구 씨
"백 번 두드려야 구두 하나가 만들어진다."
글·사진 황훈주
<신발에 대한 짧은 단상>
엄마는 맨날 내가 산 신발이 못마땅했다. "신발은 가벼워야지." 발이 피곤하면 몸이 피곤하다는 게 엄마의 지론이었다. 살면서 결국은 엄마가 맞았다 느낄 때가 많다. 예전엔 몰랐는데 정말 발이 피곤하면 하루가 피곤하다. 나이가 들면서 지출이 늘어나는 것 중 하나가 신발이다.
최근엔 가벼운 신발 하나를 샀다. "원래 조금 크게 신어야 편해요."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있다. 미용실에서 머리 자를 때, 그리고 신발가게에서 신발 신을 때. 분명 좋은 신발인데 비싼 가격 주고서도 왠지 아쉬움이 남았다. 신발은 조금 헐렁했다.
생각해 보면 신발은 원래 수제였다. 모든 것이 손에서 기계로 옮겨 가지만 신발만큼은 오래도록 손으로 만들었다. 지금은 값싼 중국산 기성화에 밀려 자취를 감춘 양화점. 수제화 가게. 하지만 이제는 낯선 공간이 되어 버린 그 가게의 문지방을 다시 넘는 순간, 잘 찾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마치 꼭 맞는 신발을 신었을 때처럼 말이다.
<신발은 발에 맞춰 신는 것>
"90년엔 중국에서 3년 있었어. 대전에 써니상사라고 큰 구두 회사에 다닐 때야. 당시 중국에선 1국 5개사로 진출 제한 정책이 있었어. 국내에서 다섯 개 신발업체가 중국에 갈 수 있었는데 그중 한 회사가 써니상사였지. 중국 쿤산시에 공장을 지었어. 쿤산시에서 상해까지 40분이면 갈 수 있어. 쉬는 날엔 상해에 나가 놀았지. 중국. 재밌었지."
이충구 씨는 구두 재단이 한창이다. 검은 가죽 위에 가위는 요리조리 춤을 춘다. 오늘은 구두 두 켤레를 만들 예정이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배우기 시작한 구두 일이라 하니 그의 경력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45년을 넘는다. 올해 66세. 그의 손은 굵다. 그이 손을 잡으면 마치 다른 세계와 연결되는 느낌이다. 그의 손이 곧 그의 역사다. 오랜 가위질로 엄지엔 굳은살이 박혔고 집게로 가죽을 잡아당기느라 손 마디도 휘었다.
그의 손 만큼이나 이충구 씨 발도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대전에서 구두 기술을 배운 걸 시작으로 성수동 구두 공장, 중국을 거쳐 개인 공장도 차려 봤다. 그리고 이제는 홀로 한 손님을 위한 구두를 만든다. 가게는 대전천이 흐르는 가오교 근처에 있다. 사람이 많이 지나는 길이 아니다. 하지만 골목에 숨어 있는 맛집처럼 멀리서도 손님이 찾아온다.
"신발 한번 신어 보세요."
"왼발은 잘 들어가는데 오른발은 조금 끼네요."
이충구 씨가 만든 이번 구두는 왼쪽과 오른쪽 구두 모양이 약간 다르다. 왼쪽 구두 밑창은 왼쪽을 비스듬히 높였다. 오른쪽 구두는 발 볼이 넓다. 공주에서 찾아왔다는 손님은 오른발에 보조 기구를 착용했다.
"오른발이 불편하실 거 같네요. 금방 교정해 드릴게요."
이충구 씨는 신발 한 켤레를 들고 이리저리 손을 본다. 가죽을 손님 발에 맞게 늘리고 맞추는 일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구두에 목형을 넣고 몇번 망치질을 한 후 손님에게 다시 건넨다.
"이제 딱 맞네요. 진작 올 걸 그랬어. 아주 좋아요."
손님은 신을 신고 걸어 보더니 환하게 웃는다. 절뚝이며 걷는 그에게 딱 맞는 신발이다. 원래 신던 왼쪽 구두도 밑창을 비스듬히 높여줬다. 그리고 그냥 서비스로 받아 가라 한다. 다음에 또 오라며.
"신발은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지고 만들어야지."
그의 구두 가격 정책은 확고하다. 가격은 맞춰 주지 않는다. 하지만 평생 A/S 서비스. 노동의 가치는 확실하고 그 가치는 또한 영원하다.
<구두 이야기>
분홍신, 한일양화점, 이화양화점. 70년대. 대전역부터 충남도청까지 이어지는 큰 길 주위로 양복점과 양화점이 많았다. 자신에 맞는 걸 입던 시대다. 입학, 졸업, 취업, 결혼. 인생사 축하할 일마다 맞춘 것이 옷이고 신발이었다. 이충구 씨는 수많은 양화점 중 한일양화점에서 구두 일을 시작했다. 옷은 매번 본드로 더럽고 50-100원 들고 양푼이 하나 챙겨 중앙시장에 가서 수제비 한가득 받아 와 점심을 해결하곤 했다. 그래도 구두 만드는 사람은 돈을 많이 벌었다. 돈은 '간조'로 받았다. 일주일마다 또는 보름마다 임금을 받는 걸 간조라 했단다. 구두 가게가 잘되니 돈도 자주 줬다.
국립민속박물관에서 발간한 [세대를 넘어-수제화 장인전-특별기획전]을 찾아보면 우리나라에서 구두를 신기 시작한 것은 1880년대, 외교관과 개화파 정객이 구두를 신으면서다.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을 보면 고종 32년 11월 15일에 '의복제도는 외국 제도를 채용하여도 무방하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갑오개혁 영향으로 이때부터 서양식 의복이 인정되었으며 구두 소비도 늘었다. 우리나라 최초 양화점은 1898년경에 설립된 '이익규 양화점'이다. 당시 구두는 9원이었다. 구두는 부의 상징이었다. 구두가 대우 받는 만큼 구두 기술자가 받는 돈도 많았다.
"돈은 많이 벌어도 버는 대로 많이 썼지. 당시 대전역 근처엔 놀 게 많았거든. 그렇게 일을 배우다 서울 성수동으로 가서 일했어. 분업으로 일을 했지. 본뜨는 사람은 하루 종일 본만 뜨고, 미싱 하는 사람은 하루 종일 미싱만 하고. 우리는 바닥쟁이, 가피쟁이라고 불렀어. 공장에 한 10명 정도 앉아서 일 했어. 식비도 주고 잠도 재워 주고 그래. 그렇게 한 2년 했나. 입대 때문에 대전으로 다시 왔어."
<구두로 많은 시절을 지냈다>
이충구 씨는 다시 대전에 내려와 군대를 마치고 대전피혁에서 일을 했다. 대전에는 구두 공장이 많았다. 구두 기술이 있으니 취직이 어렵진 않았다. 대전피혁은 워커 공장으로 군납도 하고 수출도 하는 곳으로 그 당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하루 일당이 300원. 이충구 씨는 한 군데에 오래 일하진 않았다. 다시 양화점에 들어가 일을 하기도 했고 90년도엔 써니상사에서 일을 했다. 그리고 써니상사에서 일하던 때, 구두 공장을 만들러 중국으로 해외 파견을 나가게 되었다.
"공장을 만들면 일하고 싶다는 중국인이 많았어. 중국 기업보다 인건비를 많이 줬거든. 그래도 한국보단 인건비가 저렴했어. 아마 18배 정도 차이 났을 거야. 중국에선 깔끔하게 다니지 않았지. 있는 척하지 않았어. 깔끔하고 재수 없이 보이면 어떻게 해코지당할지 모르거든. 현지인들이랑 똑같이 다녔지.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 감지 않고 그냥 출근하고. 그래도 중국 재밌었어. 중국어도 배우고 말이야."
중국에 3년 있으며 번 돈으로 97년에 대전에 구두 공장을 만들었다. 직원도 30명을 두었다. 공장 이름은 큰아들 이름을 딴 창원상사. IMF로 다들 사업을 접을 때지만 오히려 크게 공장을 만들어 이익을 봤다. 만든 구두는 금강제화 그리고 이마트도 납품했다. 공장 문을 닫게 된 건 IMF가 아니었다. 바로 90년대 말부터 쏟아져 들어 온 값싼 중국 제품 때문이었다.
"이마트로 납품하면 모든 신발은 부산으로 가거든. 거기서 다시 전국 매장으로 퍼져. 우리가 구두를 만들어 가면 그중 몇 개 디자인을 선택한다고. 그럼 한 4,000개씩 구두를 만들지. 그런데 이상하게 재주문이 안 들어오는 거야. 그래서 매장에 가 보니 내가 디자인한 구두랑 똑같이 생긴 게 있더라. 중국산이었어."
현재 있는 자리로 온 건 15년 전이다. 당시 아파트도 건물도 없었다. 땅 값이 쌌다. 공장을 옮기고 직원도 줄여서 운영도 해 봤지만 어려웠다. 이충구 씨 말에 따르면 지금 성수동 수제화 거리에서 직원 인건비를 벌려면 하루에 수제화 50개는 만들어야 한다. 하루에 많이 만들고 또 싸게 만들어야 그나마 중국산 신발과 가격 경쟁이 된다. 수제화 가게가 많이 사라지는 이유다. 고객은 보다 가격이 싼 신발을 원하고 손으로 만드는 신발은 시간이 걸린다. 공장은 그렇게 12년 운영했다. 직원들 퇴직금 챙겨 줄 수 있을 때 공장을 정리했다. 직원들은 모두 보내고 홀로 구두를 만들기 시작했다. 공장 건물도 치우고 땅 주인에게 컨테이너 집 하나를 얻었다. 한 일주일 홀로 구두를 뚝딱뚝딱 만들어 진열장 한 줄을 채우고 문을 열었다. 가게 옆 식당 손님이 벗은 구두를 가져가 닦아 놓았다. 그렇게 조금씩 손님을 모았다.
"지금까지 손님이 찾아오는 걸 보면 거짓 없이 살아온 거지."
<꾸준함이 그 보람을 대신한다>
이충구 씨가 앉은 의자 위 천장에 조명이 많다. 그의 자리는 다른 곳보다 더 빛난다. 가죽은 예민하다. 그냥 눈으로 보일 땐 괜찮은 것도 가죽 당기며 구두를 만들다 보면 흠이 나타난다. 그 작은 티를 조금이라도 잘 보기 위해 많은 조명을 천장에 달았다. 큰 가죽 안에서 쓸 만한 부위를 찾아 본을 뜬다. 좋은 가죽을 쓰는 게 중요하다. 가죽 공장에서 만들 때마다 매번 똑같은 품질로 나오진 않는다. 매번 가죽을 깐깐히 봐야 한다. 상처난 소로 가죽을 만들면 아무리 가공해도 그 상처는 남는다. 그런 가죽으론 구두를 만들 수 없다. 또 가죽을 접었을 때 주름이 잘게 가야 한다. 그런 가죽으로 구두를 만들어야 발이 안 아프다. 수제화를 찾는 손님은 그만큼 기대도 크다.
'구두는 상품이잖아. 까다롭게 보는 손님도 만족하게 만들어야 하지."
이충구 씨는 재단을 끝낸 가죽을 가지고 갑피 작업을 시작한다. 가위로 자른 가죽의 가장자리를 다듬는 작업이다. '스카이빙'이라고도 한다. 가죽을 다듬어야 봉합할 때 용이하다. 기계 모터를 돌리고 가죽을 깎는다. 크게 울리는 기계 앞에서 그의 손은 편안하게 움직인다.
'구두 만드는 건 알려 주기 힘들어. 손님 발 본을 떠서 가죽을 자르는 건 감이 90퍼센트야. 경험이랑 실력이지. 많이 해 봐야 해."
그가 처음 구두 배우겠다 말했을 때, 아버지는 좋아하셨다고 한다. 기술이 있어야 했던 시절이었다. 손재주는 시간이 만들어 주는 거라 일찍 시작할 수록 좋았고 그래서 고생도 많았던 시절이다. 대전에 구두 공장이 많았지만 지금은 거의 사라졌고 수제화 만드는 가게도 많진 않다. 그에게 일의 보람이 뭐냐고 물으니 그런 게 어디 있냐고 한다. 할 수 있는 걸 꾸준히 할 뿐이다. 이충구 씨 손은 쉬지 않는다. 오늘이 지나면 아마 누군가를 위한 두 켤레 구두가 완성될 것이다. 그렇게 그는 꾸준히 해 온 일을 해내 간다. 일의 보람을 찾기 보단 꾸준히 할 수 있는 것을 채워 나가는 그의 삶은 신기 편한 신발처럼 자유롭다.
[월간 토마토 161호 인터뷰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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