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면의 새벽, 조에 부스케를 읽다
글 김운하
잠깐 잠이 들었다 어지러운 꿈 탓인지 그만 설핏 잠이 깨고 말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온갖 잡념에 시달리며 몸을 뒤척이던 끝에 불을 켜고 시계를 보니 새벽 다섯 시다. 새벽 다섯 시라니, 아침 잠이 많은 내게 이런 일은 지극히 드문 일이다. 결국 서재의 불을 켜고 거실로 나왔다. 그리곤 한 개비의 담배와 함께 멍한 상태로 앉아 희부윰하게 동이 터 오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또 하나의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 내겐 너무 낯선 이른 시각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또 하루의 일상을 위해 억지로라도 눈을 떠야 할 시각일 터이다. 나는 늘 너댓시간만 자도 충분하여 긴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곤 했다. 아침형 인간이란, 내겐 늘 요령부득의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오늘 같은 경험은 생뚱맞기까지 하다. 쓰기 싫지만 결국 써야만 하는 글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일까. 아니면, 내속에서 스물스물 자라나 결국 목까지 차오른 어떤 불안감 때문일까.
나는 결국 진한 커피를 한 잔 타서 마시면서 어제 밤에 읽던 책을 다시 꺼내든다. 조에 부스케의 <달몰이>라는 책이다.
어떤 책은 문장과 문장 사이의 밀도가 너무 높은 탓에 마치 문장을 꿰뚫을듯이 온 정신을 집중해야만 한다. 조에 부스케의 책이 바로 그런 책이다. 그의 책에 쓰인 한 문장 한 문장은 모두 연필로 노트에 그대로 옮겨적는 그런 심정으로 읽어야만 한다. 그리고 모든 문장 앞에서 멈추어 서서 한참을 생각해야만 한다.
그가 쓴 <달몰이>라는 제목의 산문집은 첫 문장에서부터 독자를 사로잡는다. 그의 문장 하나하나는 모두 그의 깊은 상처에서 길어올려진 것이다.
“스무 살에, 총탄 하나가 나를 꿰뚫었다. 내 몸은 생으로부터 잘려 나갔다. 생에 대한 사랑으로 나는 처음엔 내 몸을 부수기를 꿈꾸었다. 그러나 나의 불구가 보다 분명하게 되었던 몇 해가 내 파멸에의 의지를 땅에 묻어 주었다. 상처를 입고서 나는 이미 나의 상처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내 욕망의 수치였던 살 속에 살아남았다.”
프랑스 작가인 조에 부스케(1897-1950)는 1차대전의 광풍이 휘몰아치던 1918년, 총탄에 맞아 척추가 부서지는 부상을 입고 남은 평생 하반신이 마비된 채로 살아야만 했던 작가다. 그의 나이 스무살 때의 일이었다. 그리고 총탄이 가슴을 뚫고 지나간 그 순간 이후, 그는 평생을 육체를 괴롭히는 끔찍한 고통 속에서, 끊임없는 죽음의 유혹 가운데서, 그 상처 자체를 통해 삶과 죽음, 고통을 사유하면서 살았다.
하반신 마비, 그리고 수시로 척추를 파고드는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는 죽음의 유혹에 굴복하진 않았던 것이다. 대신 그는 자신의 상처를 통해 ‘사건’ 을 사유했다. 철학자 질 들뢰즈는 <의미의 논리>라는 저서에서 “조에 부스케의 책들은 그 전체가 상처, 사건 그리고 언어에 대한 성찰이다.” 라고 말하면서 자기보다 앞서 사건을 사유한 철학자가 바로 조에 부스케임을 인정했다.
<달몰이>라는 산문집은 그런 그의 대표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2007년에 아르테라는 출판사를 통해 처음 소개되었지만 금방 절판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가 다행히도, 작년 2015년에 봄날의 책이라는 출판사에서 다시 번역해서 출간했다.
나는 일상에 쫓겨 정신이 산만해지거나 혹은 공연한 우울에 사로잡혀 자기연민에 빠질 순간이거나 혹은 글쓰기에 대한 감각을 되찾고 싶을 때, 이 책을 다시 꺼내 읽곤 한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인간 정신의 치열함, 숭고함, 끔찍한 고통에도 지지 않는 영혼의 강인함을 읽는다.
“ 절단에 의해 감소된 나의 존재 속에서, 자살하려는 마음은 추억처럼 살아 남았다. 사람은 불행들로부터는 그다지 고통받지 않는다. 그 불행을 사고할 힘을 갖고 있지 않을 때는.”
그는 자신의 불행을 사고함으로써 더 큰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그 고통에 굴복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침대에 누워, 침대에 결박된 상태로 지내기로 결심하고는 치열하게 공부와 글쓰기, 사색에 몰두했던 것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달몰이>를 쓸 즈음에는 한 편지에서 이렇게 쓸 수 있었다.
“나의 상처는 추상이었다. 나는 그것을 물질적 소여로 환원해버렸다. 그것은 잘못이었다. 너의 고통에 친숙해지는 대신에, 그것과 흥정하는 대신에 상처의 완성, 상처의 섬광이 되어야 한다. 단순한 사실일 뿐이었던 사건에 인간의 최고의 높이를 주어야 한다.”
그의 책을 읽는 독자들은 그의 불행과 고통의 크기에 먼저 놀라지만, 이윽고 그의 문장의 아름다움과 사유의 심오함에 또 한번 충격을 받게 된다. 그의 문장은 탁월하게 시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상처와 불행, 고통에 무너지지 않고 감상적인 우울에 빠져 허우적대는 대신 오히려 극단적으로 객관적인 정신으로 마치 남의 상처와 고통을 관조하듯이 사유하는 힘과 그 사유를 극한까지 밀어붙이는 강렬함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객관적인 사유는 바로 자기자신의 상처와 고통을 향한 질문들로 가득차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의 글쓰기는 결국 인식을 통해 자신의 상처 자체를 극복하고 치유한다.
나는 그의 문장들을, 그의 사고를 읽으면서 나 자신과 만난다. 아마도 조에 부스케의 책을 읽는 독자들도 그런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영혼을 만나고 그 영혼의 진실과 만나는 일이다. 그러나 어떤 책은, 프란츠 카프카가 말했듯이, 얼어붙은 영혼을 깨뜨리는 도끼처럼 작용한다. 조에 부스케라는 책은, 바로 ‘나’ 에게 직접 말을 걸고, 매서운 채찍 같은 질문을 쏟아낸다. 그리고 그 질문들 속에서 우리 독자들은 길을 잃고, 자신의 영혼 속으로 깊이 침잠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고 싶어한다. 이 말은 사람은 인식을 새롭게 하려고 한다는 뜻일까 아니면 자신에게까지 인식을 확장하려고 한다는 뜻일까? 실존은 간단히 인식 능력을 좌초시키는데도 불구하고 그는 실존이 그에게 특권적인 경험의 장이라고 믿는다. 아니 그렇다고 해서 실존에 인식을 덧붙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실존이 그로부터 빼앗아 갔던 것을 새롭게 인식에게 돌려주라는 말이다. 정말이지 존재한다는 것이 인식의 궁극점일 것 같다.
네 자신을 알라고 할 때, 그것은 네 자신 위에서 만들어진 밤의 굴을 파내라는 것으로 들린다. 그런데 너는 네가 어떻게 만들어져 있는지를 모르기에 그 말은 네 무지의 깊은 심연 속으로 파고들라는 소리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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