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건축
글·그림 이혜정
마음이 끝나도 나는 살아 있구나
숲길을 걸으면서 그가 결국 벌집을 깨트렸던 것을 떠올렸다 걸어갈수록 숲길은 더 어둡고
가끔 무슨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는 시간이 오래 흘러 내가 죽는 장면으로 끝난다
그때는 아름다운 겨울이고
나는 여전히 친척의 별장에 있다
잔뜩 쌓인 눈이 소리를 모두 흡수해서 아주 고요하다
세상에는 온통 텅 빈 벌집뿐이다
그런 꿈을 꾼 것 같았다
(황인찬, 〈건축〉 부분, 《희지의 세계》, 민음사, 2015)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읽히지 않는 책도 있고 읽어도 모르는 책도 있다. 황인찬의 시는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는다. 잘 읽히지만 완전히 이해되지 않는데, 그 이해되지 않음이 아름다운 여백을 만들어 낸다. 그 여백에는 남은 시간들이 유령처럼 떠돌며 공간을 넓힌다.
시 〈건축〉은 “친척의 별장에서 겨울을 보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지난여름 그와 보낸 마지막 날”을 추억한다. 지난여름 그는 벌집을 발견했고 조밀하게 붙어 있던 육각형의 방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게 끝난 여름을 이야기하는데, 육각형의 벌집이 어쨌다는 거야,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게 시는 모호하다. 다만 “한낮의 빛이 들이닥쳐서 여러 가지 무늬가 바닥에 일렁”이는 이미지와 벌집의 이미지가 조응하고, 지금의 겨울과 지난여름의 기억이 묘한 거리로 배치되며 빈 공간을 만들어 낸다. 시인은 그 여름날 “마음이 끝난 것 같다”고 한다. 그때는 정확히 알기 어렵지만 끝나 버렸다고. 그것이 끝났는데도 “나는 살아 있”다. 그러다가 문득 미래를 말한다. “이 시는 시간이 오래 흘러 내가 죽는 장면으로 끝난다”라고.
벌이 꿀을 채우기 위해 정교하게 만들어 놓은 육각형의 방, 그 방을 이어 붙이듯이 사람들은 감정을 엮어 간다. 순간의 감정들이 견고하게 모여, 단단한 하나의 집을 이루고 그것은 오래 머무는 마음이 된다. 시인은 눈 내린 겨울날 “온통 텅 빈 벌집뿐”이라고 한다. 마음은 빠져나가고 그것을 담은 얇은 껍질만 남는 순간, 그때야말로 다른 것이 깃들 수 있는 텅 빈 건축이 완성된다. 인간은 죽음을 앞둔 순간, “그런 꿈을 꾼 것 같”다고 말하는 것이겠지. 그렇게 꿈이 빠져 나간 텅 빈 공간을 남기고 인간은 죽는다.
황인찬의 시는 의미를 담고 있지 않다. 의미가 담겼던 얇은 껍질만 남겨 놓는다. 그것이 그의 은유이다. “겨울이 저녁을 깨물었다 그러자 저녁이 검게 물들고(〈은유〉 부분)” 구체적인 감정이나 의미 대신, 겨울과 저녁, 그리고 검게 물든다는 현상만이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존재는 구체적이지 않다. 텅 빈 시선만이 느껴진다. “마음이 끝나도” 살아 있는 세계가 거기에 있다. 그것은 몸 안의 세계가 아닌 몸 밖의 세계이다.
얼마 전에 숲에 간 적이 있다. 밤이 늦도록 야외에서 상영하는 영화를 보았다. 하늘에 가득 별이 떠 있고, 영사기에서는 빛이 쏟아져 영상을 만들어 냈다. 화면에서는 지금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 이미 늙어 버린 옛사람들이 새파랗게 살아 움직였다. 20대 초반의 존과 폴, 링고, 조지…. 머나먼 우주에서 오는 빛처럼. 그렇게 덧없는 존재들이 눈을 뜨고 영화라는 빛과 소리를 들었다. 화면 위의 어두운 허공으로 유성이 떨어졌다. 어둠이 그토록 깊은 질감과 서늘한 감촉을 지녔다는 걸 깨닫게 하는 숲속의 밤이었다.
마음은 유성이 떨어지듯 꺼진다. 그것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남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때마다 육각형의 빈방들이 생겨난다. 어느 순간, 어느 밤에.
로르카의 시 〈강의 백일몽〉의 한 구절처럼 “포플러 나무들은 시들지만/ 그 영상들을 남긴다.” 여름이 지나가고 있다. 다가오는 겨울에 지금 푸른 잎들은 다 사라지고 흰 눈만이 고요 속에 남을 것이다. 때로 시간만이 구원 같다. 우리는 무엇을 흉내 내며 살고 있는가? 우리는 모두 육각형의 껍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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