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 학교상담의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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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칼럼

제도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 학교상담의 모순

by 토마토쥔장 2021.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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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가 사회를 바꿀 수 있을까? - 학교상담의 모순

윤대진

출처 : pixabay

 

다수의 학자들이 현대사회의 핵심문제로 “물질만능주의에 의한 인간소외”를 지적한다. 물질의 가치가 사람의 가치를 초월하며, 사람들 사이의 따뜻한 정이 사라지고,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경쟁적인 사회가 된 것이다. 따뜻함으로부터 멀어진 인간에게 찾아 온 것은 우울, 불안, 분노, 분열등과 같은 정신질환이다. 사회의 한 부분이며 우리사회의 미래라고 하는 학교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시험지로 학생의 가치를 매기며 지나친 경쟁구도 속에 그들을 몰아넣는다. 곧 무기력한 학생, 폭력이 난무하는 교실, 정규학교를 거부하게 되는 현상 등 소위 중2병이 난무한다.

 

  대개 이런 현상이 나타날 경우, 우리사회는 제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그래서 도입한 WEE프로젝트(WE+Emotional)라는 제도가 있다. 학생들이라면 다 알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상담을 통해 학생이 보이는 문제현상을 치유하고자 하는 제도이다. 사실 이는 문제의 원인이 철저히 개인의 심리 때문이라는 관점에 기인한다. 이 문제들이 어디서 왔는지, 개인으로부터인지, 사회로부터인지, 아니면 원래 있었던 것인지, 따져보는 것도 흥미롭고 매우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차치하고. WEE프로젝트 제도가 생긴 이후 달라진 학교의 모습을 그려보며, 과연 상담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학생이 고민이 있대요. 상담실로 보낼게요.”

  “애가 몸이 자꾸 아프다고 하는데 상담실에서 좀 봐주실래요?”

  “가출을 하고 싶다고? 상담실에 가서 상담 좀 받아보렴.”

  “시험 본다는 학생이 교복도 안 입고와? 넌 상담실에 가서 따로 시험 보도록 해.”

  “교외 징계처분을 결정하겠습니다. OO기관에 가서 일주일동안 상담 받고 오는 것으로 결정합니다.”

 

 

  제도화된 상담은 학생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순기능이 있는 반면에 역기능도 존재한다. 몸이 아픈 학생에게 상담실은 피난처이기도 하지만 수업을 거부하는 학생이 보내지는 유배지이기도 하다. 고민이 있는 학생도, 교우관계에 불편함을 호소하는 학생도, 교칙을 위반한 학생도 모두 상담실로 보내진다. 심지어 교외징계처분을 받은 학생도 상담기관으로 보내지며 상담을 받게 한다.

 

 

정말 모든 것을 상담으로 다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일까? 나는 이 현상을 물질만능주의에 빗대어 상담만능주의 라고 부른다. 상담이 마음의 병을 꿰뚫는 명약이라도 된 것 마냥, 학생의 모든 문제를 상담으로 조치하는 것이다. 문제의 원인과 정도가 제 각각일 텐데, 마치 조금 열이 난다고 해서 무조건 병원으로 보내려는 것 같다.

 

 

  세 살배기 아기가 감기에 걸려 밤에 열이 난 적이 있다. 38.0, 38.5, 38.8. 오르는 숫자만큼 불안감이 밀려온다. 대부분의 부모는 병원에 가야 할까? 라는 생각을 할 것이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아내의 생각은 달랐다. 체온이 오르는 것은 면역체계에 의한 몸의 반응인 것이기에 당장 병원에 데리고 갈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우선 열경련이나 다른 증상은 없는지 아기의 몸을 잘 살피고, 따뜻한 물을 적신 수건으로 몸을 닦아주며 열을 떨어뜨려야 하는데 어차피 병원에 가도 같은 방식으로 돌본다는 것이다. 이 새벽에 분주하게 집을 떠나 병원에 가는 것보다 오히려 집에서 부모가 편안하게 돌보는 것이 아기에게도 낫다는 논리였다. 이는 내 아내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아는 소아과 의사의 말이기도 하다. 다만 불안해서 또는 잘 알지 못해서 우리가 실천하지 못하는 행동이지만.

 

 

  간과하다가 치료에 중요한 시기를 놓쳐버리라는 무식한 이야기는 아니다. 주의 깊게 관찰해보고 나서 조금 열이 나는 것이라면 그에 알맞게 돌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반드시 상담으로 도움을 받으면 좋은 순간이 있다. 하지만 매순간 상담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개인의 면역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때는 20대 초반, 그날만큼은 너무나 가슴이 아픈 날이었다. 맘을 터놓을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했다. 내 일생 처음, 아픔을 말하기 위해 아는 선생님을 찾아갔다. 하지만 내 앞에 앉아 있던 선생님 앞에서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말하려고 입을 떼자마자 눈물이 쏟아진 것이다. 영문도 모르고 많이 당황했을 텐데, 선생님은 어느새 내 곁으로 와서 함께 눈물을 흘려주었다. 그날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또 어떤 조언도 듣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그 어떤 말도 오가지 않았다. 그것은 지금껏 내가 살면서 받은 최고의 상담이었다.

 

 

  사실 그곳은 상담실도 아니었고, 그 선생님이 상담사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그것은 나를 향한 선생님의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따뜻하게 나를 수용하는 그 분의 태도에 마음이 편안했고 비로소 함께 눈물을 흘리며 위로 받을 수 있었다. 어쩌면 다른 상담사처럼 기술적으로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으흠", "으흠" 추임새를 넣으며, "얼마나 힘들었니." 라고 틀에 박힌 멘트를 던졌다면 불가능 했을 것 같다. 아파하는 나를 위한 선생님의 마음과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인 것이다. 상담이 필요한 순간이 있지만 그것이 반드시 상담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상담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의외의 순간에 찾아오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철학적 표현 중에 “가치의 제도화”라는 표현이 있다. 예컨대 사랑이라는 가치를 제도화하여 사람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가치는 제도화한다고 사람에게 주입되지 않는다. 그것은 제도화가 아닌 내면화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담만능주의 현상도 마찬가지이다. 교사들은 상담이라는 제도 속에 학생을 넣으면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상담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것이 교사들에게 내면화되지 않는 이상, 그 이상의 어떤 것도 해결되기 어렵다. 내 경험을 거울삼아 돌아본다면, 상담에는 마음을 터놓고 고난에 함께할 사람이 있어야 한다. 비가 오는 날 함께 비를 맞을 수 있는 사람 말이다. 이미 비에 젖은 사람에겐 우산을 씌워주는 것보다 함께 비를 맞는 것이 더 위로가 되는 까닭이다. 과연 이것이 제도만으로 가능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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