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 대전
글 조성남 <대전역사문화연구원장, 전 중도일보 주필> 사진 대전찰칵 제공
1. 연재를 시작하며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언론인 출신 소설가 故 이병주 작가의 유명한 말이다. 새삼 이 말이 떠오른 것은 SNS가 주류를 이루는 2021년, 역사의 의미도 퇴색돼 가고 더욱이 신화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진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또 모든 가치의 중심에는 자본이 자리하고, 도시는 외적인 성장만을 지고의 가치로 삼아왔던 게 작금의 현실이었다. 이 점에서 대한민국의 어느 도시도 예외가 아니고, 필자를 포함한 도시에 사는 사람 그 누구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모든 가치의 중심에 자본이 있고, 또 외적인 성장 위주의 도시정책이 가져온 결과가 오늘의 대전이라는 도시의 모습이라면 지나친 표현일는지.
땅에 무늬가 있듯이 도시의 외적인 모습에도 그 도시의 과거를 보여주는 결이 있다. 도시의 역사, 도시의 과거가 남아있는 공간과 결은 도시민에게 무엇을 선사할까. 또는 도시의 과거는 오늘을 사는 도시민들에게 무용지물인가. 코로나가 유행하는 가운데 자산의 가치가 증가하면서 필자가 살아온 도시 대전도 부동산가격이 크게 올랐다. 도심 곳곳의 장소에서 재개발, 재건축이라는 이름으로 옛 건물과 골목이 사라지고, 새로운 아파트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사람들이 다니던 오래된 길과 나무들 그리고 여기서 살던 사람들의 흔적이 순식간에 사라져 가고 있다. 도시의 과거가 사라지고 고층의 아파트 건물이 들어서는 요즘 대전을 보면서 필자의 뇌리에 새삼 작가 이병주의 말이 생각난 것은 대전이라는 도시의 지난 역사가 자칫 송두리째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하는 강박증에 사로잡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도시 대전은 세계 유수의 도시처럼 긴 역사를 지닌 도시는 아니다. 몇천 년, 몇백 년 된 도시가 세계 곳곳에 자리하고 있고, 코로나 이전까지 사람들은 여행을 통해 세계의 도시들을 돌아보았는데 도시 투어는 대부분 그 도시의 역사와 그 도시의 명소를 둘러보는 일정을 짜기 마련이다. 이런 일정은 무엇보다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과 또 그 도시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호기심과 관람 욕구를 충족 시켜 준다. 우리가 선진국이라고 칭하는 나라의 도시에는 그 도시의 과거를 보여주는 박물관이 있고, 그 박물관에는 과거의 흔적을 보존하기 위해 많은 예산이 들어가는 냉난방 시설을 가동한다. 얼핏 현재와 미래를 살아야 하는 도시민들이 많은 돈을 들여 지나온 과거를 지키는 이 모순된 행동은 도시의 과거가 여행객을 불러들이는 효과와 함께 그 도시에 사는 시민들에게도 교육적 효과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도시 대전은 일제가 낳은 식민도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물론 구석기부터 신석기, 청동기시대를 거쳐온 오랜 삶의 터전이었고, 삼국시대에는 신라, 백제, 고구려의 치열한 격전지였다. 고려 시대에는 대사동이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큰 절이 많은 불교의 융성 시기였음을 짐작게 하고 조선 시대에 와서는 박팽년을 위시한 많은 유학자가 배출되었다. 특히 양송(兩宋)이라 불렸던 우암 송시열과 동춘당 송준길을 배출한 은진 송씨 문중이 활동한 무대가 대전이었다. 그런데 이런 긴 역사를 지닌 대전이 오늘날과 같은 도시로 탈바꿈한 계기는 일제에 의한 경부선철도 부설이 그 시발점이었다. 한밭이 대전으로 되면서 일본풍의 시가지가 형성되고, 호남선이 개통되면서 대전은 부산과 서울, 영남과 호남을 연결하는 교통중심지가 되었다. 동시에 대전은 군사기지화 되면서 일제의 대륙침략의 중요한 거점도시가 되어 간 것이다.
8・15해방과 함께 도시 대전에 살기 위해 많은 외지인이 몰려들기 시작했으며 이 같은 인구 유입은 1950년 한국전쟁으로 가속화되었고, 이후 불어닥친 재건과 개발시대를 맞으면서 얼마 전까지 단 한 번도 인구증가가 멈추지 않는 대도시가 되었다. 대전이라는 도시의 도시사(都市史)는 사실 백년을 조금 넘긴, 세계 유수의 도시에 비하면 아주 짧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필자는 1954년생이고 여행 기간을 빼고는 대전을 떠난 적이 없다. 성장기에 대전을 떠나려 했지만, 지금까지 대전을 떠나지 못한 채 서서히 노년기로 접어들고 있다. ‘여우도 죽을 때가 되면 제가 태어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고 했던가. 필자 역시 고향 대전이 두고두고 사람들이 살고 싶고 또 살기 좋은 도시로 남기를 바라고 있다. 이런 작은 소망에 필자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이렇다 할 기술도, 재주도 없는 필자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대전에 대한 기억과 추억을 기록하는 일이라는 생각에 미치게 되면서 이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다.
1954년생인 필자의 대전에서의 삶은 대전이라는 도시의 100년 역사 속에서 거의 중간지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8・15해방과 한국전쟁이라는 극한상황을 겪은 직후에 태어나 개발연대와 성장시대 그리고 둔산 개발과 IMF, 도시 광역화에 이르기까지 대전은 줄곧 외적인 성장을 해왔고, 다양한 도시 모습의 변화를 가져왔다. 필자가 10대, 20대까지도 대전은 지금의 원도심을 빼놓고는 도시라기보다는 논과 밭, 과수원으로 이루어진 소도읍에 지나지 않았다. 50년대의 판자촌에서 사람들은 공동화장실을 사용했고, 가을철에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이삭을 주워갈 수 있도록 이웃을 배려하는 공동체 의식이 짙게 남아있었다. 또 서대전 사거리에서 유성으로 가는 국도는 포장이 안 돼 군용차와 시내버스가 지나갈 때면 뽀얗게 먼지가 일어나고는 했다. 70년대의 개발 시기가 되면서 대전은 농촌사회의 정서적 유대감이 차츰 사라져 가고, 이후 급격한 도시화의 과정을 거쳐 150만의 대도시가 되면서 후기산업사회로 변모했다. 또 도시개발이 확장되면서 도시의 모습은 급격하게 과거의 모습을 지워버린 채 도시형 주택과 고층 아파트 건설로 치닫고 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과연 어떤 도시가 살기 좋은 도시이고, 또 그 해답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는 점에서 그 도시의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도시는 하나의 유기체라는 점에서 끊임없이 변화되고 이 변화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 간다. 이 변화가 시작된 지점을 되돌아보는 것은 일종의 역사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1950년대부터의 대전의 옛 모습에 대한 기록은 어쩌면 지역사의 한 대목이라고 볼 수 있고, 지방화 시대에 지역사는 지역의 자원이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필자는 옛 기억을 더듬어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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