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소녀 제주도로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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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 제주도로 떠나다

by 토마토쥔장 2021.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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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소녀

제주도로 떠나다


글•사진 이지선

월간토마토 vol. 130.


   청주 ‘공정여행협동조합 여행가자’와 사단법인 모먼트에서는 취약계층 청소년의 문화 격차를 해소하고 여행을 통한 삶의 질 향상을 위해 공정여행을 진행했다. 우리의 발길이 닿는 곳을 배우고 이해하는 여행으로 삶의 가치를 변화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공정여행의 지향점이다. 총 2박 3일 일정인 이번 여행은 22일부터 24일까지 진행하는 1차 팀과 25일부터 27일까지 진행하는 2차 팀으로 나뉘었다. 여행지는 아름다운 섬 제주도다. 공정여행협동조합 여행가자에 변지숙 대표, 우은정 이사, 이재향 이사와 정보나 내수희망지역아동센터 교사, 충북 지역 학생 열다섯 명과 함께 1차 팀에 합류해 제주도 여행길에 올랐다.

 

 

 

1. 우리가 함께 떠나는 공정여행

   어디론가 여행을 간다는 것은 그런 것일까. 한파주의보가 내려진 매서운 날씨가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아이들 얼굴은 설렘의 온기로 들떴다. 청주 공항으로 삼삼오오 모여 수속한 이후 제주도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여행 전 사전 만남을 통해 학생 열다섯 명을 4개 조로 나누었고, 여행을 더욱더 알차게 즐기기 위한 각종 미션을 메신저를 통해 미리 전달했다. 열다섯명의 학생은 각자 여행을 위한 준비를 마치고 제주도로 향했다. 걱정 반, 기대 반의 마음으로 제주도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 날씨는 우리를 반겨 주듯 맑아졌다. 

   첫날 우리 여행의 주제는 ‘제주의 아픔을 돌아보는 여행’이었다. 일명 ‘Dark Tour’로 잔혹한 참상이 벌어졌던 역사적 장소나 재난·재해 현장을 돌아보는 여행이다. 제주도는 역사 속에 아픔과 슬픔을 간직한 곳이다. 우리는 본격적인 여행에 앞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광에 가려진 제주의 아픔을 이해하고 제주도민의 삶을 돌아보기로 했다. 

 

 

 

2. ‘자유와 평화는 공짜가 아니다’

   처음으로 도착한 곳은 제주평화박물관이었다. 제주평화박물관에 ‘자유와 평화는 공짜가 아니다’ 라는 문구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간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누려온 ‘평화’라는 단어가 가진 의미를 잠시 생각해 본다. 

   평화박물관이 있는 가마오름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이 주둔한 2km에 달하는 땅굴 기지가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수세에 몰린 일본군은 일본 본토사수 작전을 세웠고, 그중 하나가 제주도 방어 작전이었다. 작전 수행을 위한 방어기지인 인조 땅굴은 강제로 끌려간 제주도민이 만들었다. 

   박물관에 도착해 약 15분가량의 영상을 시청했다. 1943년 당시 강제 노역했던 사람의 증언을 시작으로 박물관 건립과정을 영상을 통해 만났다. 가마오름은 박물관을 건립한 이영근 씨의 아버지 이성찬 씨가 강제 노역했던 현장이기도 하다. 영상을 시청한 후 직원의 안내에 따라 평화박물관을 돌아봤다. 전시관에서는 일본 정보국이 발간한 교과서를 비롯해 각종 무기와 놋그릇 등 일제 관련 물품과 자료를 볼 수 있다. 

   박물관을 돌아보고 나와 땅굴 진지 유적지로 향했다. 가마오름 땅굴 진지는 제주도의 113개 땅굴 진지 중 최초로 공개한 곳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에 의지해 걸어본다. 등잔불 하나에 의지해 장갑도 없이 곡괭이질을 멈추지 못했던 그들의 삶이 묵직하게 다가오는 순간이다. 

 

 

 

3. 제주도의 아픔을 가슴에 새기는 시간

   제주도의 아픔을 돌아보기 위해 우리가 두 번째로 향한 곳은 제주4·3평화공원이다. 제주4·3사건은 해방 이후 제주도에서 벌어진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학살당한 일련의 사건을 총칭한다. 제주는 일제강점기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민족 간의 대학살인 4·3사건을 겪었다. ‘바다로 둘러싸여 고립된 섬 제주도는 거대한 감옥이자 학살터였다’ 제주 4·3평화공원 전시장은 당시 제주를 ‘학살터’라고 칭한다. 

   신은정 선생님의 안내에 따라 제주4·3평화기념관을 비롯해 위령탑, 위령 제단, 봉안관까지 4·3평화공원 곳곳을 둘러봤다. 과거 우리 민족의 잔혹성에 마음이 절로 아려온다. 무고한 희생을 겪고도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손가락질받아온 그들에게 우리는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까. 4·3 위령 재단에 도착했을 때 절로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13,903개의 위패 앞에서 우리는 조용히 참배하고 역사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졌다. 

   평화공원을 돌아보다 제주도 자장가가 새겨진 돌담길을 걷다 보면 새하얀 눈밭 위 아이를 끌어안고 무릎 꿇은 채 웅크린 어머니 조각상을 만날 수 있다. 바로 ‘변병생 모녀상’이다. 

   1949년 1월 6일, 당시 25세였던 변병생과 그의 두 살배기 딸은 토벌대에 쫓겨 피신하던 도중 토벌대의 총에 맞아 죽음을 맞이했다. 추후 행인이 눈더미 속에서 모녀의 시신을 발견했고 억울한 희생으로 죽음을 맞이한 생명을 기억하기 위해 모녀상을 제작했다. 아이를 지키기 위한 몸부림에서 당시의 공포가 엄습해 오는 듯했다. 

   맑은 하늘에 붉은 노을이 내리는 아름다운 평화공원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이 찬란한 아름다움 속에 그들의 아픔이 깊게 서려 있다. 올해는 제주4·3사건의 70주년이다. 우리는 똑같은 과오를 범하지 않기 위해 제주도가 가진 아픔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제주4·3평화공원을 벗어나며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마음에 새겼다. 

 

 

 

4. 제주의 거센 바람과 함께하는 여행

   제주도는 바람, 여자, 돌이 많아 ‘삼다도(三多島)’라고 불린다. 제주의 거센 바람을 온몸으로 느끼며 둘째 날 여행을 시작했다. 새벽에 울리는 제주 대설 및 풍랑 특보 재난 문자로 마음이 철렁했다.  날씨로 인해 계획했던 일정을 변경하면서 여행의 테마 역시 ‘재미있게 즐기는 여행’으로 변했다. 

   계획보다 늦은 오전 일정을 시작하면서 우리가 향한 곳은 용눈이오름, 다랑쉬오름 등 제주의 자연경관을 볼 수 있는 ‘제주 레일바이크’다. 전적으로 여행에 참여한 학생의 의견을 반영해 선택한 장소다. 전날 여행의 피로는 느껴지지 않는 아이들의 에너지에 새삼 감탄이 나오기도 했다. 걱정과는 달리 레일바이크는 바람을 막는 가림막이 있어 편안하게 탈 수 있었다. 날씨가 좋았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았겠지만, 눈 오는 제주의 오름을 바라보는  일도 나쁘지 않았다. 레일바이크 안에선 흥겨운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고 그에 맞춘 힘찬 발 구르기가 이어졌다. 옆에서 달리는 레일바이크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웃음소리는 끊일 줄 몰랐다. 

   오전 일정을 마치고 아이들이 가장 기다리던 시간인 자유 시간을 보내기 위해 세화해변으로 향했다. 각자 일정 금액의 용돈과 꿈같은 세 시간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함께하는 아이들과 해물 라면을 먹고 바다가 보이는 아기자기한 카페로 들어섰다. 함께한 아이들의 즐거운 수다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노트북을 켜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바닷바람에 절로 걸음이 걸어지는 날씨다. 이 와중에도 웃음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와 진짜 춥다”라는 소리를 남발하면서도 아이들은 함께 모여 자유 시간을 만끽했다. 거센 바닷바람이 부는 화해변에 내려가 사진을 찍기도 하고, 아기자기한 카페에 가서 따뜻한 차를 한잔 마시기도 하고, 편의점에서 군것질도 했다. 

   매서운 추위에 온몸을 감싸고 흩날리는 눈발을 바라보며 우리가 향한 곳은 제주도의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이다. 김영갑 작가는 1982년부터 제주도에 빠져 1985년 정착했다. 작가는 제주의 오름, 산담, 산갓, 바람, 구름 등 제주 자연을 평생의 주제로 삼았다. 우리가 레일바이크를 타며 바라봤던 용눈이오름은 김영갑 작가가 특히나 사랑했던 오름 중 하나다. 작가는 루게릭병을 앓으며 시한부 인생을 살면서도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제주도를 사랑한 작가의 마음이 사진 한 장, 한 장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의 작품은 제주도를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보았던 제주도를 조금 더 자세히, 그리고 오랫동안 바라보고 싶어졌다.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찬찬히 김영갑갤러리를 둘러봤다. 한 친구는 오랫동안 한 작품 앞에 서 있기도 했으며, 어떤 친구들은 잘 꾸며진 정원에서 사진으로 추억을 남기기도 했다. 

 

 

 

5. 우리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제주도 여행 이야기

   둘째 날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조촐한 치킨 파티를 시작했다. 치킨을 먹으며 빙고 게임도 하고, 조별로 모여 앉아 제주 방언의 뜻을 찾는 게임도 진행했다. 우리는 둘러앉아 지난 이틀간의 여행을 자기만의 언어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다. 

   “여행하면 보통 좋은 것만 보는데 처음으로 다크투어를 통해 제주도가 가진 아픔을 알 수 있어서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자유시간도 좋았고, 김영갑갤러리에서 작가의 포기하지 않는 열정이 인상 깊었어요. 레일바이크도 생각보다 힘들지 않고 재미있었습니다.” 

   “제주도의 아픔을 더 잘 알았고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여길 왜 왔을까 싶기도 했어요. 계속 멀미를 해서 많이 피곤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도 평화박물관과 제주4·3평화 공원을 돌아보며 제주도의 아픔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레일바이크는 정말 재밌었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느낀 아이들 저마다의 감상이 이어졌다. 변지숙 대표는 “여러분 스스로 소극적으로 따라오는 여행이 아닌, 주도적으로 기획하는 여행을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아쉬움이 남는다”라고 말을 전하기도 했다. 

   “다음번엔 전통시장에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새로운 공정 여행을 위한 제안도 이어졌다. 아이들은 여행을 통해 스스로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고 있었다. ‘공정여행을 아이들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라는 의문은 나의 편견이었음을 새삼 느꼈다. 

 

 

 

6. 제주도의 여러 날씨를 몸소 체험한 여행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제주도에는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였다. 마지막까지 일정에 가장 큰 어려움은 마음처럼 따라 주지 않는 날씨였다. 그래도 제주도의 여러 날씨를 경험할 수 있어 재미있었다고 서로를 다독여 본다. 

   도로 사정상 오전 일정이었던 감귤농장 체험을 취소한 채 ‘메이즈랜드’로 향했다. 유명 예능프로그램을 촬영했던 이곳에서 아이들은 함께 길을 찾으며 협동심을 발휘했다. 복잡한 미로 끝에 출구를 만나게 되면 그 어느 때보다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미로를 체험한 후 메이즈랜드에 있는 미로 퍼즐 박물관에서 몸을 녹이며 전시를 구경했다. 

   미로퍼즐박물관 한쪽에 설치한 대형트리에는 이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소원이 적혀 있었다. 그곳에 아이들 몇몇이 자신의 소원을 적었다. 아이들이 꾹꾹 눌러 쓴 손글씨를 몰래 훔쳐보기도 했다. 

   그렇게 모든 일정을 소화한 후 우리는 제주공항으로 향했다. 2박 3일의 일정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공항에서 아이들과 아쉬운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날씨로 인해 계획했던 일정을 모두 소화하진 못했지만, 그것 또한 여행의 묘미라고 생각했다. 언제나 좋을 수 없는 인생사처럼 맑은 날이 있다면, 흐린 날도 있다는 것을 배운다. 

   궂은 날씨 탓에 힘들었을 텐데, 불평 한마디 없이 여행을 즐기는 아이들의 모습이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색한 첫 만남에 아이들은 말하기를 쑥스러워하기도 하고 얼굴을 피하기도 했지만, 그새 먼저 다가와 말을 걸어주고 시답지 않은 질문에도 다정하게 대답해 주었다. 혼자 제주도에 남아 2박 3일의 기록을 정리하면서 웃는 아이들의 모습을 마음에 새겼다. 비록 카메라를 보고 크게 웃어주진 않았지만, 내가 본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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