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서 생각한 열 가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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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강릉에서 생각한 열 가지 이야기

by 토마토쥔장 2021. 9.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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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서 생각한 열 가지 이야기

이주연 기자의 필름로드 - 이용원 편


글•사진 이용원

월간토마토 vol. 140. 


 

1.

   내게 첫 강원도는 군부대였다. 높은 산이 가득한 강원도는 나나 친구, 혹은 일가친척들이 얼룩무늬 군복을 입고 생활하는 공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주변은 온통 산이었고 산이 둘러싼 그 공간만큼만 하늘이 빼꼼 얼굴을 드러낸 곳이었다. 집에서는 강원도로 떠나는 아들을 두고 멀리 파병이라도 가는 것처럼 막막해했다. 가족이 면회를 오려면 꼬박 여섯 시간 이상 차를 타고 와야 하는 외지고 먼 곳이었다. 유배가 형벌임을 알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2.

   그렇게나 먼 강원도의 터줏대감은 ‘강릉’ 이었다. 공식적인 건 아니다. 내게는 그랬다. 어렸을 때는 해운대와 경포대가 늘 헷갈렸다. 경포대가 있는 강릉도 부산 만큼이나 크고 화려한 동네일 거라 막연하게 생각했다. 드라마 <모래시계>를 방영한 후, 남들처럼 정동진에 해돋이를 보러 갔으면서 그곳이 강릉인지는 몰랐다. 간첩선이 매일 들락거릴 것 같은 ‘주문진’에서 도루묵구이를 맛있게 먹으면서도 그곳이 강릉에 속한지는 몰랐다. 

 

 

 

3.

   강릉은 그렇게 저 멀리에 있는 큰 도시였다. ‘태백산맥’이 주는 심리적 거리감도 한몫했다. 차를 가지고 대관령을 넘어가려면 운전하면서도 멀미가 났다.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땅에 몰래 발을 딛는 것처럼 긴장과 흥분이 일었다. 간혹 한겨울에 눈이 많이 내려 이곳 길이 막혔다는 보도를 접하면 완벽하게 고립되었을 그곳을 떠올리며 ‘무척 낭만적이다’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배가 끊긴 섬처럼,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현실은 역설적이게도 묘한 안도감과 포근함을 주었다. 어릴 적 생각이다. 

 

 

 

4.

   강릉은 해운대가 있는 부산처럼 그리 큰 도시는 아니었다. 20만 명 남짓 삶터를 일구며 사는 작은 도시였다. 고구려 시대, ‘하슬라’라는 묘한 이름으로 불렀고, 신라 영토에 편입한 후에는 아슬라, 다시 통일신라 시대에는 9주 중 하나인 명주였다. 그래서 강릉에는 아직도 명주동이 있다. 이 명주동에는 대도부호관아가 여전히 남아 이곳의 위상을 전한다. 이곳 건물 중 객사 정문인 임영관 삼문은 고려말에 만든 무척 오래된 나무문이다. 옛 도심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명주동 골목 곳곳에서 정겨운 모습을 발견한다. 카페 봉봉방앗간과 오월은 많은 젊은이에게 잘 알려진 공간이다. 두 공간 모두 옛 정취를 소멸시키지 않고 재해석했다는 특징이 있다. 임만혁 작가 작품으로 채운 골목 갤러리는 여느 벽화 거리와는 다른 격을 보여 주었다. 

 

 

 

5.

   해가 한참을 떠 버린 후에 정동진에 도착했다. 늦가을 떠오른 태양은 구름 뒤에 몸을 감춘 채 햇살만 퍼뜨렸다. 그 아래로 산 위에 올라앉은 크루즈가 얌전하다. 배를 산 위에 얹어 놓은 사람의 심리가 궁금하다. 그곳은 유명한 호텔이다. 이른 아침 바다 열차가 태양을 향해 내달린다. 그 옆으로 옹종맞은 레일 바이크도 치그렁 치그렁 달린다. 정동진시간 박물관은 기차 모양이다. 시간과 달린다는 것은 묘하게 얽혀 있다. 시간을 달리다. 길게 달리는 기차를 보며 누군가는 시간을 생각한 모양이다. 눈앞을 지나쳐 터널로 빠져들어 가는 기차의 모습이 시간과 닮았다. 

 

 

 

6.

   하슬라가 강릉의 옛 지명임을 몰랐을 때 하슬라아트월드는 무척 이국적인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높은 언덕에서 커다란 개선문처럼 두 다리를 벌리고 선 하슬라아트월드는 숙박시설과 갤러리를 겸한다. 야외 구석구석에 세워 둔 조형물이 감각적이다. 하반신 조형물 옆, 성벽처럼 쌓아 둔 담벼락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았다. 이제 막 노란 꽃 한 송이를 그려 넣고는 흐뭇한 표정으로 망중한을 즐긴다. 구석구석 눈길을 잡아당기는 장치가 여럿이다. 

 

 

 

7.

   주문진은 항구다. 강릉시의 유일한 읍이기도 하다. 주문진 항구에는 엄청나게 큰 건어물 시장이 있다. 북적임이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생동감이 넘친다. 간판은 온통 특정 지명이다.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를 망라한다. 전국에서 온 관광객에게 어필하기 위한 마케팅 요소인 모양이다. 거대한 고속도로 램프처럼 만들어 둔 주문진항 주차장 위에서 항구와 바다를 내려다본다. 북측으로 바다를 마주 보며 산비탈을 타고 들어선 마을이 인상적이다. 완도군에 갔을 때 만난 마을이 떠올랐다. 완도에 있는 게스트 하우스 완도네시아 옥상에서 바라보았던 마을이다. 강릉과 완도, 그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많이 닮았다. 

 

 

 

8.

   주문진에는 최근 새롭게 생긴 관광지 몇 곳이 있다. 방파제 둑에 커플이 줄을 서 있다가 한 팀씩 가서 사진을 찍길래 궁금했는데, 드라마 도깨비에서 김신과 지은탁이 처음 만났던 곳이란다. 충격적이며 새로운 경험이었다. 주문진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이번에는 방탄소년단이 앨범 재킷 사진을 촬영한 곳이 나온다. 버스정류장, 촬영 후 철거했던 것을 다시 복원해 세웠단다. 그곳에도 많은 사람이 줄을 서서 차례로 사진을 찍었다. 우리에게 의미 있는 ‘장소성’조차 새로운 변화를 맞는 듯하다. 개별적 고유성과 창의성이 사라지고 유희마저 획일화되어 가는 듯하다. 

 

 

 

9.

   강릉으로 돌아오는 길에 들른 소돌 해변에서 부자를 보았다. 아니 부자로 짐작되는 두 남자였다. 낚싯대를 조립하고 미끼를 물리고 좌대에 설치하는 아버지(로 짐작되는) 곁에 아들(로 짐작되는)은 쪼그리고 앉아 그 모습을 얌전히 지켜보았다. 맑은 물 위에 솟아오른 아주 조그만 바위섬은 그 순간 온전히 둘에게 집중했다. 바로 옆이 바닷속에서 솟아오른 기암괴석으로 유명한 관광지임에도 다른 관광객의 소란스러움이 바위섬에 닿지 못했다. 바위 위에 올라선 부자는 강제로 유폐된 고립에 빠져들었다. 

 

 

 

10.

   해 질 녘 경포호는 아름다웠다. 대관령 쪽으로 넘어가는 태양이 만들어 낸 붉은 기운이 호수에 어렸다. 촉촉한 연둣빛 잎사귀가 강한 푸른빛으로 성하다가 울긋불긋 단풍이 진 후에 바닥으로 낙하했다. 아쉬움이 남은 몇몇 잎사귀가 물끄러미 지는 해를 바라본다. 나와 태양의 잔영 사이에 우뚝 선 나뭇가지가 만들어내는 실루엣은 결코 다가갈 수 없는 거리감으로 남았다. 세상엔 욕망하지만 손에 쥘 수 없는 것이 너무 많다. 실루엣은 그냥 실루엣일 때 아름답다. 애써 거리를 좁히며 다가서 본들 남루하고 왜소하며 일그러진 실체만 마주할 뿐이다.


글•사진 이용원

월간토마토 vol.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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