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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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칼럼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by 토마토쥔장 2021.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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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 (올가 토카르추크, 민음사, 2020)

로와

 

 

 어느 겨울날, 폴란드 접경 지역 산골에서 사냥꾼이 시체로 발견된다. 최후의 식사였던 듯 그의 목구멍에는 사슴 뼈가 걸려있고, 발목을 넘길 정도로 눈이 쌓인 집 주변은 온통 사슴 발자국투성이다. 그날 이후, 여름 별장과 사냥터를 제외하면 호젓하기 그지없는 이 산골 마을에 하나둘 시체가 늘어간다. 범인은 누구일까? 인근 주민? 그렇다면, ‘괴짜’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시비엥토페우크? 동물애호가 듀셰이코? 아니면 블레이크의 시를 번역하는 채식주의자 디오니시오스? 아니면 집 주변에 온통 발자국을 남긴 사슴들?

 

 

  『죽은 자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 는 201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폴란드 여류 소설가 올가 토카르추크(Olga N. Tokarczuk)의 장편 스릴러 소설이다. 영국 시인 블레이크와 그의 작품은 이 소설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형성한다. 책 제목부터 윌리엄 블레이크의 연작시 「천국과 지옥의 결혼」 중 「지옥의 격언」에 나온 문구에서 따왔다. 각 장 도입부마다 그의 시구를 인용했다. 판화로 보이는 흑백 동물 삽화도 왠지 평생 판화가였던 블레이크를 연상시킨다.

 

 

 전복적인 시를 많이 남겼지만, 평생 예술가로 인정받지 못했던 블레이크처럼, 이 소설의 주인공 야니나 두셰이코도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잊힌 존재다. 두셰이코는 폴란드와 체코 접경 마을 여름 별장들을 겨울 동안 관리해주는 대가로 생계를 유지하는 60대 여성이다. 개와 여우를 자유롭게 놓아주라고 주장한다거나 사냥터에서 사냥하지 말자고 외쳐도, 누구도 귀담아듣지 않는다. 동물과 인간을 같은 지위로 바라보는 두셰이코는 사냥터에서 죽은 동물을 발견할 때마다 먹먹한 비탄과 애도에 잠긴다. 끊임없이 상중(喪中)이라는 그녀는 사냥터에 버려진 멧돼지 사체를 쓰다듬으며 울먹이곤 한다.

 

 

 두 번째, 세 번째 시체가 발견될 때마다 경찰은 미궁 속으로 더욱 깊숙이 빠져들었다. 연이어 발견되는 시체의 공통점은 주변에 사슴 발자국이 있다는 점, 평소 사냥을 즐기던 자들이라는 점뿐이었다. 자살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살인 동기나 용의자도 없는 상황이다. 여름에는 별장 덕분에 북적대지만 추운 겨울에는 굳이 산골 마을에 머무르는 사람이 없어 겨우내 상주하는 주민이라고는 ‘괴짜’, 두셰이코, ‘왕발’, 이렇게 셋뿐이다. ‘괴짜’는 지방 검사의 아버지이고, 두셰이코는 나이 든 여성이고, 사냥꾼 ‘왕발’은 첫 희생자였다. 급한 대로 경찰은 ‘괴짜’와 두셰이코를 계속 경찰서로 불러댄다. 상부에 보고하려면 범인은 못 잡더라도 우선 목격자의 진술서라도 있어야 할 테니까. 지겹도록 반복 진술을 하던 어느 날, 두셰이코는 경찰서에서 이렇게 말한다. “동물을 보면 그 나라가 어떤지 알 수 있어요. 그러니까 동물을 대하는 태도 말입니다. 사람들이 동물에게 잔인하게 군다면 민주주의나 그 어떤 시스템도 소용이 없습니다.”(148쪽)라고.

 

 

 내 생각도 그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여성, 아이, 노숙인 같은 약자를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그 사회가 어떤지를 알 수 있다. 아동 성폭행 사건에 어떤 처벌을 내리는지, 여성 성추행에 관해 어디서부터 사건으로 바라보는지, 동물 학대가 얼마나 일상화되었는지는 한 나라의 문화와 인식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다. 과연 대한민국은 어떤가? 생후 6개월 아기 성폭행 동영상을 찍어 유통해서 돈을 벌어들인 작자도, 길고양이 배를 갈라 빼낸 내장을 전시한 미친 것도, 자기들에게 소위 ‘인권’이 있다는 헛소리를 지껄인다. 게다가 재판을 통해서조차도 이런 범죄를 선진국과 비교해 턱없이 약하게 처벌한다. 이것이 세계 10위권 경제 선진국의 민낯이다. 우리는 무엇을 팔아 돈으로 바꿔 온 걸까? 과연 ‘잘 살게’ 된 거라 할 수 있을까?

 

 

 두셰이코는 격분하여 말을 잇는다. “누군가의 뱃가죽으로 완성한 신발과 소파, 숄더백, 누군가의 털로 몸을 따뜻하게 유지하고, 누군가의 몸을 먹고, 그것을 토막 내어 기름에 튀기고 있습니다. 이런 잔혹한 행위가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는 게 말이 되나요?”(157쪽)라고. 사실상 이는 작가 토카르추크의 대사이리라. 생태주의, 채식주의, 동물권 수호, 여성 인권 보장 등에 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피력해 온 그녀의 목소리는 다른 작품 『방랑자들』과 『태고의 시간들』에서도 드러난다. 그녀는 노벨상 수상 기조 강연에서 “욕심, 자연을 존중할 줄 모르는 태도, 이기주의, 상상력의 결핍, 끝없는 분쟁, 책임 의식의 부재가 세상을 분열시켰고, 함부로 남용했고, 파괴했다.”라며 인류를 비판했다. 나는 이것이 옳은 분석이라 생각한다. “세상은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라 거대한 그물망이며, 그 속에서 우리 인간은 다른 존재와 보이지 않는 실타래로 연결되어 상호작용하고 있다.”라는 그녀 말에 동의한다.

 

 

 한편, 토카르추크는 ‘별자리 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기도 했다. 등장인물 중 한 명은 별자리를 잘 읽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다른 인물의 성격이나 행동을 그들의 별자리로 대략 파악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도 두셰이코는 점성가 수준이다. 그녀는 과거 교량 건설 엔지니어로 일하던 시절에 갈고닦은 수학적 재능을 점성술 영역에서 발휘한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생월생시부터 따져 물을 정도다. 물론 이것은 소설이 너무 교훈적인 색채가 짙어질까 봐 설치해 둔 작가의 기술이겠지만 말이다. 여하튼 두셰이코 생각으로는 인간이란 ‘문신으로 새겨진 수감번호’처럼 탈출할 방법도 없이 주어진 운명이라는 족쇄에 모두가 묶여 있다. 비록 신들의 장난에 불과할지라도 운명이라면 순응했던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말이다.

 

 

 혹시 운명론자이신가? 올해의 토정비결은 보셨는가? 나는 둘 다 아니었는데, 생일 횟수가 쌓여갈수록 왠지 ‘운명’이란 게 있는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노오력만으로 바꿀 수 있는 게 과연 얼마나 되는지, 어쩌면 정말로 ‘별들에게 물어봐’가 정답은 아닐지를 요즘 심각하게 고민하곤 한다.

 

 운명이 있다면, 지금 나의 번뇌조차 별자리와 운명에 아로새겨져 있다는 건가. 작가는 이런 말로 위안을 주었다. “별의 신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종종 그 별들의 영향력에 압도당한다. 별을 읽지 않거나 읽을 수 없는 뉴턴과 같은 사람은 또한 자신의 실험과 추론에 압도당한다. 그러니 결국 우리는 모두 실수와 오류의 대상인 것이다.”(363쪽)라고. 그리고 또 한마디, “모든 것은 지나가는 법. 현명한 사람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으니 아무것도 후회하지 않는다.”(250쪽)라고도.

 

 

결국, 범인은 누구일까? 스릴러 책 리뷰에서 절대 밝히면 안 되는 게 범인이 아니겠나. 범인 찾기 외에도 블레이크의 시구나 별자리에 따른 성격도 알 수 있는 독특한 스릴러, 『죽은 자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를 2021년에 읽어볼 만한 책으로 추천해 드린다.

[2021년 2월호 월간 토마토 칼럼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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