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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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칼럼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by 토마토쥔장 2021. 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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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

노동의 반대편에는 노동하지 않음이 아닌, 사유가 있다.

이혜정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에서 바틀비는 말한다.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1853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월 스트리트 변호사 사무실에서 필경사로 일하는 ‘바틀비’라는 인물이 업무를 거부하다가 결국 교도소에 수감되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극단적인 설정이기는 하지만 무의미하고 무용한 노동이 인간의 존엄을 위협한다는 걸 보여 주는 예로 자주 인용되는 이야기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은 ‘돈’의 교환 가치 가운데서 벗어나 생존할 수 없다. 태어나는 순간, 그 교환의 세계로부터 벗어나기 힘들다. 어린 시절, 조금씩 주어지는 용돈으로 군것질거리를 사 먹으며 돈의 단맛을 알게 된다.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 거기에 더해 대학까지. 차례차례 교육 과정을 밟고 나서 직업의 세계로 진입한다. 이 기나긴 교육과정은 고용에 적합한 인재를 키워 내는 데 집중된다. 한 개인이 온전한 주체로 인정받고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기 위해 경제적 활동이 가능한 직업을 가지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

 

간호사가 되고 싶다, 선생님이 되고 싶다, 과학자가 되고 싶다, 기자가 되고 싶다, 대통령이 되고 싶다, 자아실현의 신화 끝에 자리해 있는 것은 직업의 세계이다. 그곳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바로 ‘노동’이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우리는 노동을 한다.

 

 

<평균 노동시간 2,113시간>

노동시간단축법, 기본소득, 최저임금, 정규직, 비정규직… 더 나은 일터, 행복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동자는 오랜 시간 투쟁해 왔다. 하지만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운으로 여겨지는 기회의 희박 속에서 과연 노동의 질을 논할 수 있는 이는 몇이나 될까?

 

2017년 1~10월 평균 취업자 수는 경기회복 신호에 힘입어 전년동기대비 330,000명이 증가했다. 실업자 역시 같은 기간 12,000명이 증가했다. 실업률은 3.8%, 그중에도 청년층 실업률은 10%로 여전히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다. 청년층 비경제활동인구는 20대 후반을 중심으로 증가하고 있으며, 2017년 취업준비자는 1~10월 평균 전년동기대비 57,000명 증가했다. 이 가운데서도 공시생은 2017년 5월, 전년동월비 6,000명 증가했다.1) 실업은 높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으며, 청년 채용이 개선되는 조짐은 없다. 그리고 기업 간 근로조건의 격차가 너무 크다. 노동의 질을 논하기 전에 적정한 일자리를 찾아 취업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한국은 2015년 연간 총근로시간이 2,113시간으로 OECD 평균(1,766시간)보다 347시간이나 길다.2) 취업난과 고용불안이 심화된 환경에서 노동의 기회를 잡았다고 해도, 그 이후의 삶은 결코 녹록지가 않다. 24시간이라는 한정된 시간 가운데 노동으로 그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면 생존과 휴식을 위한 최소한의 자유시간이라도 보장받기는 어려울 터다.

 

그렇다면, 이런 이중고의 상황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이 가능할까? 무한정 유예된 시간이 펼쳐진 실업의 상태로 돌아가거나, 무한정한 가능성이 열려 있으나 끝을 모르는 자기 착취의 레이스 위에서 ‘자폐적 성과기계’가 되어 계속되는 질주를 멈추지 않거나. 과연 두 가지 길뿐일까.

 

<그림자 노동, 유령의 확대>

이반 일리치는 《그림자 노동》이라는 저서에서 토박이 노동에 대해 “관료주의로서는 예측할 수도 없고 위계질서로 통제할 수도 없지만, 특정 공동체가 공유하는 가치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그런 활동”이라고 설명한다. ‘토박이(vernacular)’는 인도유럽어족에 기원을 둔 단어로 ‘뿌리박음’이나 ‘거주지’라는 뜻이 있다. 이반 일리치는 교환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인간 행위들을 지칭할 간단명료한 단어로 이를 가져와 쓴다. 이 토박이 노동에 반대되는 개념이 산업적 노동이다. 산업적 노동의 유지를 위해 일부에게 강요되는 노동이 바로 ‘그림자 노동’이다. 그림자 노동은 산업적 노동, 임금 노동의 보완물다.

 

그림자 노동의 예로는 가사 노동이 대표적이다. 여성을 집안에 가두는(인클로저) 조치는 노동하는 남성을 가사 일하는 여성의 관리자로 임명하고 여성의 가사노동을 마땅히 받아들여야 할 의무로 만들었다. 그림자 노동은 시간, 노고, 수모에 대해서는 대가가 지급되지 않는다. 이반 일리치는 여성이 경제적인 면에서 보수를 받지 못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급자족의 측면에서도 무익한 노동을 강요받고 있다고 말한다. 그림자 노동을 광범위하게 보자면, 경제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사람들에게 강요되는 모든 활동을 지칭한다. 이는 산업경제에서 억압적 차별의 중심을 이룬다.3)

 

이 같은 강요된 노동의 그림자는 성과사회에서 측정되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며 노동자 개개인을 억압한다. 공시생들이 20대를 바쳐 가며 오랫동안 준비하는 과도기적인 노동 상태 역시 ‘그림자 노동’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퇴근 후에도 연속되는 접대, 혹은 업무의 연장과 관련된 다양한 모든 활동들도 ‘무익한 노동’을 강요받는다는 면에서 그림자 노동과 같은 성격을 가진다. 산업적 노동의 지배가 강화될수록 그림자 노동의 그림자는 짙어진다.

 

이 같은 노동 과잉 현상은 점차 심화되고 있다. 노동사회는 개별화를 통해 성과사회, 활동사회로 변모했으며 이런 사회는 새로운 강제를 끊임없이 발생시킨다. 게다가 스마트기기의 발전으로 노동과 휴식의 경계는 무너졌다. 소셜네트워크의 발달은 정보의 가속화와 더불어 근로시간의 경계를 약화시킨다. 자동기계적인 쉼 없는 활동은 개인적 시간, 관조와 사유가 가능한 시간을 상실하게 만든다.

 

한병철은 “사유는 활동적 삶의 활동 가운데서도 가장 활동적인 것이며 순수한 활동성의 면에서 모든 활동을 능가한다”고 말한다. 사색적 능력의 상실, ‘번아웃증후군(Burnout syndrome)’은 현대인이라면 피할 수 없는 질병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 치달으며, 착취자가 동시에 피착취자이기에 제동 장치가 없다.4) 관조와 사유가 가능한 시간을 확보하고, 사색적 능력을 되찾는 것이야말로 활동의 본질적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가장 우선해야 할 일이다.

 

 

 

<사유의 회복>

한나 아렌트는 근본적인 인간의 활동을 노동(labor), 작업(work), 행위(action) 등 세 가지 범주로 구분했다. 노동은 “인간 신체의 생물학적 과정에 상응하는 활동”이며, 작업은 “인간 실존의 비자연적인 것에 상응하는 활동이며”, 행위는 “사물이나 물질의 매개 없이 인간 사이에 직접적으로 수행되는 유일한 활동”이다.5) 아렌트는 노동이나 작업을 도구적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행위는 순수한 행위 그 자체로 여겼다. 노동이라는 고통스러운 노력을 통해 인간은 생존한다.6) 아렌트는 활동적 삶의 위계질서에 노동이 초고속으로 지위가 상승하며, 관조를 무의미한 것으로 제거함으로써 많은 것을 잃게 되었다고 말한다.

 

“공동체가 공유하는 가치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그런 활동”은 판단 중지 상태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사유 없이 가치를 생산하는 활동은 없다.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며, 자가 증식적인 재생산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기 의미를 찾아나가는 활동은 사유와 관조의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과로 자살’이라는 용어가 나올 정도로, 절박한 생존의 현실 앞에서 과도한 노동의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지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고등학교 실습생들은 ‘취업률 성과주의’에 떠밀려 위험한 일터로 내몰린다. 누군가는 이 사회가 강요한 노동 속에 죽는다. 이런 현실에서 휴식의 문제, 과로의 문제, 일을 하며 찾아야 할 의미의 문제를 개인에게만 전가하는 것 역시 무책임하다. 개인이 행복하게 일하기 위해서는 ‘일’의 문제를 논하기 전에 기본소득, 복지제도 등의 사회적 안전망이 절실하다. 이 같은 환경 없이 생존에 내몰린 개인이 우리 모두의 삶을 윤택하게 할 의미 있는 노동을 선택하는 건 요원한 일이다.

 

언제나 노동의 우위에 있는 것이 바로 삶 전체이다. 노동이 의미를 갖는 건, 삶의 전체성 속에 그것이 공고한 반석으로 무게를 잡을 때이다.

 

우리는 모두 벽 앞에 서 있는 바틀비이다. 필경사는 글을 베껴 쓰는 철저히 기능적인 일을 한다. 바틀비는 자신의 고용주인 변호사의 지시를 거부한다. 그가 그 지시를 거부하는 이유는 소설 《필경사 바틀비》에서 명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거부만은 명확하다. 그는 노동하지 않음을 택한다. 불행하게도, 그다음에 그를 덮친 것은 죽음이다.

 


  • 1) 편집부, 〈2017년 노동시장 평가와 2018년 전망〉, 《노동리뷰》, 한국노동연구원, 2017.12, 9~27쪽, 참조.
  • 2) 안주엽,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한 실근로시간 단축〉, 《노동리뷰》, 2017.3, 52쪽 인용.
  • 3) 이반 일리치, 《그림자 노동》, 사월의책, 2015 참조.
  • 4) 한병철, 《피로사회》, 민음사, 2012, 참조.
  • 5) 장영란,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렌트의 활동적 삶과 관조적 삶〉,《철학연구》, 2016.12, 285쪽 인용.
  • 6) 위의 글, 289쪽 참조.

 

[월간 토마토 130호 기획기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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