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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기울이니 와인이 쏟아졌다 책을 기울이니 와인이 쏟아졌다 글·사진 황훈주 책이 나왔다. 출판 계약서를 보니 작년 2월에 책을 만들기로 계약했었다. 그런 책이 이제야 나오다니. 그만큼 신경 쓴 책이라고 나름 위안을 삼아야 하려나. 책을 어찌어찌 내고 작가님과 밥을 먹었다. "와인은 뭘로 하실래요?" 와인. 좋아하긴 한다. 그런데 와인을 고르라며 두꺼운 책을 건네니 머릿 속이 하얗게 된다. "어...음... 추천으로 주세요." 직원 분은 친절하게 웃으며 추천 와인을 골라줬고 나는 다 안다는 표정을 지으며 친절히 고맙다고 했다. 새로 나온 책엔 편집자로 내 이름이 들어갔다. 아직도 배울 게 많은 데 내가 이렇게 편집자로 이름이 올라가고 밥을 얻어 먹어도 되나 싶지만 와인은 좋았다. 그 와인. 식기 전에 내가 마시겠소. 책을 만드는 건 .. 2021. 5. 12.
문제는 죽일 놈의 외로움 - 세 원루머(one-roomer)가 말하다 문제는 죽일 놈의 외로움 세 원루머(one-roomer)가 말하다 글 암바사 *원루머(one-roomer는, one-room과 사람을 나타내는 ‘er’이 합쳐진 단어로, 암바사가 급조한 단어다) 날짜를 헤아려 보니 이곳에서 생활 한지 일 년이 지났다. 때때로 이 도시는 내게 따뜻하기도, 잿빛의 콘크리트이기도 했다. 단칸방에 누워 쓸데없는 생각으로 몸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그 공간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잠자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 특별히 애정 쏟을 일도, 가슴 한쪽이 텅 빌 일도 딱히 없다. 다른 청춘들은 어떻게 사는지 물어봤다. 역시, 나와 다를 바 없었다. 문제는 죽일 놈의 외로움이었다. 1. 닉네임: 울뜨라 (남, 28, 직장인) Q.원룸에 얼마나 .. 2021. 5. 12.
어른들이 읽는 동화 - [유통기한] 어른들이 읽는 동화 - 《유통기한》 글 이선희(동화작가) “계십니까?” 그가 찾아온 것은 정오가 막 지난 무렵이었다. 나는 자다가 화들짝 깨어 문을 열었다. 문 밖에 그가 서 있었다. 분홍색 하트 무늬 잠옷 바람으로 나간 것이 부끄러워 나는 얼굴을 붉혔다. 1월의 찬바람이 휭 불어왔다. 그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 뒤 얼른 문을 닫았다. “오실 거면 미리 연락이라도 주시지…….” “점검은 불시에 이뤄진다는 것을 모르십니까?” 그의 말투는 칼날처럼 날카롭다. 나는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은 일 년에 한 번 있는 정신 위생 점검 기간이다. 유통기한이 지난 후회, 미련, 집착 등은 없는지 방부제가 과도하게 처리된 불안, 걱정, 근심 등은 없는지 쓸데없는 잡념이나 허황된 공상은 없는지 등을 꼼꼼하게 점검.. 2021. 5. 12.
너도 한때는 따뜻했구나 너도 한때는 따뜻했구나 글 정덕재(시인, 르포작가) “아빠, 짜장면 먹을까?” 아흐레 만에 집에 들어온 나한테 아들이 던진 첫마디였다. 희미하게 웃어 주었다. 녀석도 해맑은 표정을 지었다. 일주일의 금식과 이틀간의 미음을 끝내고 돌아온 사람에게 내뱉는 첫마디 치고는 경쾌한 농담이었다. 지난해 12월 13일 새벽, 화장실 변기에는 중국집 춘장 색깔을 띤 흑변이 가득했다. 잠이 덜깼나 싶어 유심히 살펴봤다. 역시 짙은 어둠이었다. 속 쓰린 배를 쓰다듬으며 소파에 누웠다. 식은땀이 흘렀다. 잠시 후 다시 화장실로 직행, 역시 변기는 먹다 남은 짜장면 그릇이었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인근 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것은 아침 7시, 혈압을 재고 심전도 검사를 하고 피를 뽑고 링거를 맞았다. 매번 다른 간호사와 의.. 2021. 5. 11.
시라는 굴레, 시인은 행복할 수 없는 사람 - 나태주 시인 시라는 굴레, 시인은 행복할 수 없는 사람 - 나태주 시인 - 글·사진 박숙현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전통 서정시를 대표하는 나태주 시인과의 만남은 의외의 연속이었다. 그의 시처럼 따뜻하고 부드러울 거로 생각했던 인터뷰는 탁구 같았다. “인터뷰는 짧게 전투적으로 한다.”라는 그의 말마따나 나 시인은 기자의 질문에 빠르고 정확하게 대답했다. “치고받고 해야 속에 있는 것이 탁 나오면서 해결이 돼요. 짧게 결판 보죠. 근데 오늘은 좀 길게 하네.”라고 웃음기 없이 말한다. 그러면서 “기사를 전투적으로 써 달라.”라고 덧붙인다. 진지하게 말하는 나 시인을 유심히 바라보니 입가에 살짝 미소가 서려있다. 그 모습에 친근한 느낌이 들 쯤 “가능하면 시인이 안 되는 게 좋아요.”라는.. 2021. 5. 11.
혹시, 이런 된장 혹시, 이런 된장 정덕재의 일상르포 글 정덕재(시인, 르포작가) 된장녀와 된장남이라는 유행어가 나오면서 된장이라는 말이 다소 무시당하는 느낌을 받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된장이 있는 밥상은 여전히 정겹다. 직장인들은 점심때마다 ‘오늘은 뭘 먹지’ 이런 고민을 반복해도 정작 메뉴는 그동안 먹었던 음식을 뛰어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색다르게 파스타를 먹자는 만년 과장의 제안에 직원들은 무리수를 두지 말라며 “된장찌개 드시죠”, “김치찌개 어떤가요?” 이런 반응을 보이기 일쑤다. 식생활이 서구화되고 혼밥 문화가 확산되고 있어도 어머니가 끓여 주는 된장찌개는 다양하게 등장하는 신메뉴를 한방에 정리하기에 충분하다. 아마도 길든 음식이기에 더욱 그럴 것이다. 입맛을 바꾸기가 쉽지 않은 것은 맛의 보수성 때문이다. .. 2021. 5. 11.
으능정이 부루어리 - 김지훈 양조사 으능정이 부루어리 - 김지훈 양조사 기억에 남는 술이 있으신가요? 네, 저는 있습니다! 글·사진 정현구 2017년, 무심코 찾은 축제에서 마음에 쏙 드는 와인을 찾았다. 묘사하자면 복숭아 향이 나고, 단맛이 그 뒤를 따른다. 마치 과일 젤리를 먹는 듯, 화사한 향이 입을 가득 채운다. 포도라는 본질을 잊지 않게 하려는 듯, 화사한 향이 걷혀갈 때 즈음 혓바닥 위엔 옅은 포도 향이 머문다. 묵직한 향과 깊은 감칠맛은 부족하지만 분명 사랑스러운 와인이다. 매년 말, 대전컨벤션센터에서 ‘대전국제와인페스티벌’이 열린다. 스페인, 프랑스, 독일 등 전 세계 많은 나라가 출품한 와인과 맥주 등 다양한 술을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는 행사다. 2017년 처음 찾은 뒤, 좋아하는 축제를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와인페스티벌.. 2021. 5. 11.
제주도 공연 리뷰 - <해녀의 부엌> 제주도 공연 리뷰 - "이여도 사나 - 이여도 사 - 이여도 사나 - 이물에랑 - 이사공아 - 고물에는 - 고사공아 - 물때나 점점 늦어나진다 - 이여도 사나 -" 글·사진 양지연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는 올해로 90세를 맞은 권영희 해녀 할머니가 계신다. 권 씨 할머니는 이곳 종달리에서 최고령 해녀라는 타이틀을 소유했다. 요즘 해녀는 편하게 물질한다는 권 씨 할머니, 할머니 말씀에서 ‘요즘 해녀’라는 소리를 듣는 해녀는 놀랍게도 현재 70대다. 학교에 다닐 기회가 없던 시절, 여성들은 물질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권 씨 할머니는 요즘은 아무리 촌에 사는 아이들이라도 전부 대학에 가고 각자 배울 것이 많은 시대니, 해녀 일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다며 앞으로 10년, 15년만 지나면 해녀는 역사 속으로.. 2021. 5. 10.
첫번째 원칙: 당연한 건 당연히 말하지 않는다 - '곡물집' 첫번째 원칙: 당연한 건 당연히 말하지 않는다 브랜드의 탄생 - '곡물집' 글 황훈주 사진 황훈주, 곡물집 제공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최근 월간토마토 사무실 한편에 작은 책방을 만들었다. 사무실 공간 중 정말 작은 공간을 내었지만 이젠 네이버에 월간토마토를 치면 서점이라 나온다. 아니, 이곳까지 누가 수고롭게 책을 사러 오겠냐마는 그래도 좋다. 적어도 출판사라는 이름보단 서점이라는 이름이 더 친근하니까. ‘어떻게 살 것인가’는 ‘어떻게 기억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야. 나 토종 콩으로 만든 커피 마시러 가!” 곡물집 인터뷰 잡은 날. 친한 친구에게 신나서 연락했다. 그렇다고 이곳이 유명한 커피집이냐 묻는다면 그렇지 않다. 토종 곡물을 파는 곳으로 이름도 ‘곡물집’, 좀 더 친숙하게 생각한다면 쌀집 .. 2021. 5. 10.
육아빙자 인생만화 - 웹툰작가 소만 육아빙자 인생만화 - 웹툰작가 '소만' 글·사진 김예인 친구들과 만화책을 서로 돌려가며 보고, 다음 권 누구한테 있냐며 행방을 찾던 시절을 기억한다. 시간이 지나며 인터넷으로 들어온 만화는 웹툰이 되었고 나는 고등학생 때 처음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재미있어서 보게 되었지만, 지금은 다른 이유가 생겼다. 웹툰 속 인물의 대사가 힘과 위로를 줬고 이해되지 않던 다른 이가 이해되는 경험도 했다. 사람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진 것이다. 로맨스 웹툰일 경우 약간의 대리 만족도 함께. 웹툰을 챙겨보는 사람으로서 웹툰 작가의 삶이 궁금했고 작품을 통해 무얼 말하고 싶은지 듣고 싶었다. 지난 4월 대전웹툰캠퍼스 입주 작가 천정연 작가를 만났다. 천정연 작가의 필명은 ‘소만’으로 삶이 소소하고 충만하기를 바란다는 마음으.. 2021. 5. 10.
저녁은 있지만, 미래는 없는 것처럼 - 한량 꿈나무 윤명석 저녁은 있지만, 미래는 없는 것처럼 한량 꿈나무 윤명석 글·사진 이주연 “꿈은 없고요, 그냥 놀고 싶습니다.” MBC 예능프로그램 에서 박명수가 했던 말이다. 그저 생각 없이 탱자탱자 놀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유난히 고된 하루를 보내고 나면 늘 드는 생각이다. 한편으로는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그런데 명석이를 보면 그 의구심이 깨지곤 한다. 저녁이 있는 삶을 지향하고 그저 자기 살 정도로만 벌면서 노는 베짱이다. 그를 보면 ‘그래, 저렇게 사는 게 진짜 노는 인생이지 뭐’ 하는 생각이 든다. 인터뷰 당일에 만난 명석이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저녁은 있지만, 미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신나게 웃어 재낀다. 올해로 대학 생활 10주년을 맞이하는 명석이는 올해도 졸업할 마음이 눈.. 2021. 5. 7.
책과 노니는 공간, 세종지혜의숲 책과 노니는 공간, 세종지혜의숲 글·사진 염주희 함께 만드는 공동의 서재 국립도서관, 시립도서관, 마을 단위 작은 도서관에 이어 책 놀이터까지 보유한 도시가 있다. 세종특별자치시에 있는 복합문화공간 세종지혜의숲은 서점도 아니고, 도서관도 아닌, 누구나 방문하여 책을 둘러볼 수 있는 공동의 서재다. 사계절, 뜨인돌, 웅진, 민음사 등 국내 출판사가 기증한 서적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세종우수도서와 같은 지원프로그램에서 받은 도서, 개인 기증서의 책을 합쳐 약 5만 권의 책이 애서가를 맞이한다. ‘지혜의숲’ 하면 출판 도시 파주에 있는 공간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2014년 문화체육관광부 후원으로 조성한 후 출판도시문화재단이 운영하는 이곳은 연간 40만 명(코로나19 이전을 기준으로 함)이 다녀가는 명소이다.. 2021. 5. 7.
정신적 이주, 이동한 경계,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들 - 광주비엔날레 커미션전 정신적 이주, 이동한 경계, 말로 다 할 수 없는 것들 《광주비엔날레 커미션전》 글·사진 이용원 1. 제법 큰 거울은 하사관 몇이 돈을 추렴해 기증한 모양이다. 거울에 남은 흔적이 이런 사실을 전한다. 거울을 기증한 날짜는 1980년 3월 15일이었다. 우리가 보낸 여러 날 중 하루다. 다만, 옛 국군광주병원에 걸렸던 거울이라는 사실이 특별하다. 1980년, 국군광주병원에 저 거울을 걸어두고 즐거웠을, 얼굴 모를 그들도 불과 두 달여가 지난 후에 닥칠 일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글자와 숫자, 두발 규정 등 다양한 메시지와 눈에 보이지 않는 기억을 문신처럼 몸에 새긴 거울 50여 개를 40년이 지나 옛 국군광주병원 부속 시설인 옛 국광교회 천장에 매달았다. 모두 옛 국군광주병원에서 떼어낸 거울이다... 2021. 5. 7.
미술작품이 어렵다면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닐 수도 있어 미술작품이 어렵다면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닐 수도 있어 《상실,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 글·사진 황훈주 시가 미술이 될 수 있을까. 미술관 옆 카페에 앉아 나지막이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똑같은 전시를 두 번 보러 가는 일은 흔치 않았다. 대림미술관은 한번 입장권을 구매하면 같은 전시를 몇 번이고 다시 볼 수 있지만 아직 같은 전시를 두 번 본적은 없었다. 대부분 바쁘거나 시간이 안 맞았다. 그런데 이번 대전시립미술관 기획전은 두 번 보러 갔다. 그것도 일주일 동안에 말이다. 한 번은 전시를 보러 갔고 또 한 번은 관객 반응을 보러 갔다. 혹시 남들도 나와 같은 마음인지 궁금해서 말이다. 미술관 옆 카페에 앉아 아이스티를 쪽쪽 빨며 나는 상실감을 느꼈다. 이번 대전시립미술관 기획전 제목은 《상실, 나에.. 2021. 5. 6.
어른이어도 괜찮아, 황금비율 몰라도 괜찮아 어른이어도 괜찮아, 황금비율 몰라도 괜찮아 전시리뷰 - 대전시립미술관 어린이워크숍 전시프로그램 ≪황금비율 7대1≫ 글 염주희 사진 대전시립미술관 제공 낯선 비율과 마주하다 엑스포 시민광장 미디어큐브동 2층에 있는 DMA 아트센터는 그간 어린이 동반 가족을 위한 전시를 기획했다. 2020년에는 점, 선, 면, 색깔을 테마로 한 어린이워크숍이 열렸고, 2021년 상반기에는 비율을 주제로 한 이 전시 중이다. 어린이가 직접 만들고 그리는 참여적 요소를 갖추고 있기에 “어린이워크숍”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만, 어린이만을 위한 전시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설치미술과 회화를 넘나드는 이십여 개의 비율 파괴적인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충분한 예술적 자극과 몰입을 경험한다. 은 김나영&그레고리 마.. 2021. 5. 6.
5월 문화 예술 공연전시 5월 문화 예술 공연·전시 안녕하세요 토마토쥔장입니다. ^^ 이번 월간 토마토 5월호에 실린 문화 예술 공연·전시 정보입니다. 풍요로운 문화예술 만끽하는 5월 보내보시는 건 어떨까요? :) 1. 대전시립연정국악단 제 179회 정기공연 ‘오월의 춤 정원(庭園)’ 우리 민족의 뿌리 깊은 곳에는 예(禮)와 효(孝)가 담겨 있습니다. ‘오월의춤정원‘은 예(禮)와 효(孝)를 겸비한 고품격 춤사위로 5월의 풍요로움을 더한 무대입니다. 전통 춤의 아름다운 색채로 풍성하게 만발한 한 폭의 정원 같은 무대를 즐겨 보세요. 5월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절제의 멋과 단아함이 돋보이는 ‘정재무’, 풍류의 멋과 경쾌함이 가득한 ‘민속무’가 어우러진 전통 춤 정원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이번 5월, 고풍스러운 ‘오월의 춤 정원(.. 2021. 5. 6.
우리가 추구해야 할 완벽한 자유에 관하여 우리가 추구해야 할 완벽한 자유에 관하여 아이는 내달리고 있었다. 무거운 몸을 제법 재게 놀리며 겅중겅중 달렸다. 점심을 먹은 후 걷기 시작했을 때는 대전천 좌안을 따라 걸었다. 투덜투덜, 왜 걸어야 하는지를 모르겠다는 빈약한 논리를 들이대며 터벅터벅 걸었다. 걸어야 하는 이유 역시 고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시하고 계속 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아이는 시야 밖으로 벗어나 탕출을 시도할 만한 용기는 없었다. 처음은 아니더라도 대전천 주변이 아이에게 익숙한 풍경은 아니었다. 유치원에 다닐 때 나들이 나왔다가 징검다리에서 물에 빠졌던 기억이 트라우마로 남은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은 낯선 곳을 향한 호기심보다 두려움이 훨씬 큰 모양이다. 걸으며 티격태격하던 중에 할아버지가 식당에 마스크를 놓고 온 사실을 알아.. 2021. 5. 6.
지도를 만드는 사람 '진DoL' 박진석 대표 지도를 만드는 사람 '진DoL' 박진석 대표 토마토 동행_ 소셜여행 ‘소제골목과 대동마을을 거닐며 글 염주희 사진 염주희, 이은호 1. 사람 여행을 떠나요 “매번 똑같은 코스를 다니면 지겹지 않으냐고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사람 여행을 떠나는 것이에요. 매번 오는 사람이 달라서 새로운 이야기와 경험이 있어요. 저는 앞에서 설명하느라 여행자 얼굴을 보는데, 여행지에 온 사람은 하나같이 표정이 밝고 호기심에 차 있어요. 저는 그들의 눈에서 행복을 읽고 마음의 안정을 얻습니다. 그런 즐거움에 여행 프로그램을 진행합니다.” 대전에 살며, 대전을 소개하고, 대전을 누구보다도 아끼는 사람, 진돌 박진석 대표의 말이다. 대전역 호국보훈광장(동광장) 철도 영웅 동상 앞에서 처음 만난 그는 간단한 인사.. 2021. 4. 30.
"우리는 모두 무언가의 덕후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의 '덕후'다 글 정현구 사진 정현구, -philic 제공 2015년 여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즈음 나는 한화생명 이글스파크에서 선수들의 응원가를 부르짖었다. 4회쯤 지나면 목소리가 갈라졌고, 6회 말엔 비릿한 피가 목에서 올라올 정도로 열광했다. 안타에 웃었고 홈런엔 기뻐 펄쩍펄쩍 뛰었다. 모든 선수의 응원가를 외우고, 타율을 줄줄 꾀고 다녔으니 야구 마니아가 아니었는가! 이를 신조어로 '덕후'라고 한다. 그리고 내가 야구를 좋아하며 했던 일은 ‘덕질'이라고 한다. 여기 '우리는 모두 무언가의 덕후다'라는 문장을 내세운 잡지가 있다.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모여 같이 축구를 보기도 하고 피규어를 만들기도 하는 등 좋아하고 즐거울 법한 일을 나열한 잡지, -philic이다. 탈 .. 2021. 4. 30.
강물 아래 또 다른 강물이 흐르듯이 강물 아래 또 다른 강물이 흐르듯이 - 김채운 시인 글·사진 황훈주 공심채 볶음은 베트남에서 배웠다. 그들은 모닝글로리라고 했다. 베트남을 다녀와서도 한동안 공심채 볶음을 해 먹었다. 26살때 일이다. 지금도 공심채 볶음을 해 먹을 때면 나는 베트남을 생각한다. 엄마와 처음 간 해외여행이었다. 엄마는 나팔꽃을 키웠다. 엄마는 아파트 작은 베란다에 나팔꽃을 키웠다. 내가 아직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이었을 거다. 엄마는 아마 나에게 꽃을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잊고 있던 기억인데 시를 읽다 문득 선명히 그날 기억이 떠올랐다. 시는 다섯 줄밖에 안 됐다. ‘아침이 저물었습니다’로 시작하는 이 시의 부제는 ‘나팔꽃에게’다. 시가 마음에 들어 나팔꽃에 대해 찾아보다 나팔꽃이 영어로 모닝글로리란 걸, 공심채와 나팔꽃.. 2021. 4.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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